사도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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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세손서(諭世孫書)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1. 9. 2. 19:18
유세손서(諭世孫書) 세로: 58.0cm, 가로: 121.5cm 1776년(영조 52) 영조의 나이 83세에 왕세손이던 정조에게 은인과 함께 내린 유서이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한 《승정원일기》의 기사 삭제를 요청하고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정조의 효심에 영조가 감동하여 만들게 되었다. 정조는 조회나 거둥 때면 늘 은인과 를 앞세웠다고 한다. ‘유세손서(諭世孫書)’에는 정조의 효성을 만세토록 전하길 바라는 마음과 후계자에 대한 믿음을 적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왕은 이렇게 말한다. 아! 해동(海東)의 300년 (우리) 조선은 83세의 임금이 그 25세의 손자에게 의지한다. 오늘날 종통(宗統)을 바르게 하니, 나라는 태산 반석(泰山盤石)처럼 편안함이 있고, 또 진달 한 글을 보니 말은 엄명하고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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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대비(遲遲臺碑)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호수원사랑/문화재(文化財) 2020. 7. 15. 04:09
지지대비(遲遲臺碑)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호 지지대비는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의 지극한 효성을 추모하기 위해 1807년(순조 7) 화성 어사 신현(申絢)의 건의로 세워졌다. 정조대왕은 생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무덤인 현륭원(顯隆園, 현재 화성시 융릉)에 참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만 넘어서면 멀리서나마 무덤을 볼 수 없게 되므로, 언제나 이곳에서 행차를 멈추었다고 한다. 무덤을 뒤돌아보며 떠나기를 아쉬워했기 때문에 이곳에 이르면 왕의 행차가 느릿느릿 하였다고 하여 한자의 ‘느릴 지(遲)’자 두 자를 붙여 지지대(遲遲臺)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비문은 서영보(徐榮輔)가 짓고, 윤사국(尹篩國)이 글씨를 썼으며, 화성유수 홍명호(洪明浩)가 전액을 썼다. 지지대고개의 유래 정조는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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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서문(水原 華西門) - 보물 제403호수원사랑/수원화성(水原華城) 2019. 1. 10. 22:30
수원 화서문(水原 華西門) - 보물 제403호 수원 화서문(水原 華西門) - 보물 제403호 화서문(華西門)은 수원화성의 서쪽문으로 1964년 9월 3일 보물 제403호로 지정되었다. 좌우 성벽에 연결되는 돌로 된 기부에 홍예문(虹霓門)을 두어 그 위에 단층의 문루를 세웠다. 문의 앞부분에는 반달형으로 된 전축(塼築) 옹성(甕城)이 있는데 높이는 안쪽이 2.62m, 바깥쪽이 3.65m, 두께는 3.25m이다. 이 옹성은 한 평이 트여 있어 문을 출입할 때 통과하도록 되어 있다. 1975년 수원 화성을 중수 공사할 때 보수되었다. 수원 화성은 조선 정조 18년(1794)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정조 20년(1796)에 완성한 성곽이다. 중국성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