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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문수도량 "영시암(永矢庵)"국내 나들이/사찰(寺刹), 불교(佛敎) 2008. 10. 26. 06:29
설악산 문수도량 "영시암(永矢庵)"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설악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말사인 백담사(百潭寺)의 부속 암자이다.
1648년(조선 인조 26) 유학자이던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이 창건했다.김창흡은 이 절에 은거하여 죽을 때까지 세상에 나가지 않겠다는 맹세의 뜻으로 이름을 영시암이라고 했다.
그러나 6년이 되던 해에 그의 공역(供役)을 하던 사람이 호랑이에게 물려 가는 변을 당하자,
춘천(春川)으로 옮겨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폐허로 남아 있던 터에 1689년(숙종 15) 인제군수 이광구(李廣矩)가 김삼연유허비(金三淵遺墟碑)를 세웠고,1691년(숙종 19) 설정(雪淨)이 승당과 비각을 중건하고 자비성상(慈悲聖像)을 봉안했다.
1925년에는 백담사 주지 이기호(李基鎬)가 중수했다. 이어 1994년 법당과 산신각을 지어 중창했다.
영시암은 작은 암자다. 명성이 드 높은 것도 아니고, 좋은 위치에 앉은 것도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이름있는 백담사, 오세암, 봉정암에 치인 격이지만
그래도 영시암은 많은 불자들이 앞다투어 찾는 암자중의 제일의 암자이다.
영시암(永矢庵)
조선조의 당쟁은 때로는 나라의 위기를 가져오기도 했다.많은 선비들이 사화(士禍)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어갔고, 화를 피하기 위해 첩첩산중으로 피했다.
숙종16년(1689)에 있었던 기사환국(己巳換局)은 왕비 인현왕후 민씨가 폐출되고 장희빈이 중전으로 승격되면서
정권이 노론에서 남인으로 넘어가는 엄청난 사건이다.
숙종의 비 민씨는 아기를 낳지 못해 늘 근심과 걱정으로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임금의 총애를 받은 후궁 장희빈은 아들을 낳았고, 그 아이가 원자(原子)로 책봉 되었다.
장희빈을 사랑하던 숙종은 그녀를 왕비로 승격시킬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것을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노론이 반대하였고, 그래서 숙종은 이들을 숙청하고 남인을 등용했다.
희빈이 낳은 아이의 세자 책봉문제가 나오자 노론의 총수 송시열은, "임금의 보령이 이제 겨우 29세시고
중전은 23세로 아직 젊으신데, 후궁의 아들로 세자를 책봉한다는 것은 "시기상조" 라고 극구 반대했다.숙종은 송시열의 말을 묵살하고 그에게 사약을 내렸으며 정권을 남인에게 넘긴 것이다.
숙청된 노론 중 김수항(金壽恒)이 있었다.그의 아들 김창흡은 어지러운 속세와 인연을 끊고 수도를 하겠다고
암자를 지었는데 그것이 바로 문수도량 영시암(永矢庵)이다.
그런데 이 암자를 세우지 6년이 지난 어느 날 그의 하녀가 호랑이한테 물려죽고 만다.
이후 김창흡은 암자를 떠나 어디론가 떠났다고 한다. 혼란한 시대의 뒷면에 존재하는 슬픈 사연이다.2008년 10월 12일 오전에 문수도량 영시암 대웅전 상량식과 도윤 큰 스님 법회를 알리는 플래카드
산중에서 만나는 약수는 길손의 목을 축여 준다.
절집은 잠시 나그네들의 다리를 쉬게 하는 쉼터가 되기도 한다.
설악에 자리 잡고 있는 영시암은 고요함이라기보다 길손들이 줄을 이으니 그저 어수선 하기만 하다.
청정지역 영시암에서는 채소를 직접 재배하고 있다.
영시암 주변에서 중생들을 위해 겨울을 준비하는 풍경이 포근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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