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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침략에 항전한 호국의 현장...강화산성(江華山城)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08. 10. 31. 22:10
몽골 침략에 항전한 호국의 현장...강화산성(江華山城)
강화산성은 고려 고종19년(1232년) 강화도로 천도하며 몽고에 대항하기 위해 흙으로 쌓은 성으로 몽고의 침략에
항전한 호국의 현장인 셈이다. 1259년 고려가 개성을 환도하기 전 성을 헐었는데 조선초에 다시 보수됐다가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의 침략으로 파괴됐다. 1677년 조선 숙종 때 다시 대대적인 개축공사를 했다.
하지만 병자호란 때 청군의 침략으로 다시 파괴되는 등 곡절을 겪었다.
근세에는 병인, 신미양요와 일본의 침략을 겪은 아픔의 현장이다. 성안에는 남쪽에 안파루, 서쪽에 첨화루,
동쪽에 망한루, 그리고 북쪽에 진송루 등 4대문이 있었다.
온갖 시련을 겪고 세월이 흐르며 성곽과 문루가 없어졌지만 지난 1974년에 남문을, 1977년엔 북문을 복원했고
서문은 다시 개축했다. 북문에서는 멀리 휴전선 넘어 장단과 개성의 송악산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고향을 북쪽에 두고 있는 이들은 이곳에 서서 눈시울을 붉히기도 한다.
강화산성 안내 홍보판
강화산성의 남문(按波樓)에는 강도남문(江都南門) 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여기서 강도(江都)란 강화도가 역사의 주요 무대로 기록되는 시기는 고려 후기이다. 몽골군과의 항쟁을 위해
개성에서 이곳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강도시대 江都時代 : 1232 ~1270년] 흔적을 볼 수 있는 고려궁터 및
성곽 등이 있어 북방유목민족의 침입에 따른 최적의 피난처로 강화도가 가능하였음을 본다.
강화내성의 정문 4곳 중 남문 안파루는 1975년에 완전히 복원되어 옛날 강화도의 한스러운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주고 있다.
사적 제132호로 지정된 강화내성은 고려 고종 때 처음 축조됐을 때만 해도 강화읍과 선원면 일부에 걸쳐 넓게
자리잡고 있었지만 몽고의 강요로 고종 46년 (1259년)에 헐리고 말았다.
강화산성의 남문 안파루의 모습.
현재의 내성은 강화읍을 감싸고 있으며 강화 주민에게 좋은 등산로를 제공하고 있다.
고려시대부터 임시수도의 역할을 잘 감당한 강화성은 쌓고 헐리기를 수차에 걸쳐 했다.
처음 고려내성은 몽골의 화친조약조건에 의해 헐리고, 조선 초에 축소하여 쌓은 내성은 병자호란에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다가 숙종때에 다시 옛 모습을 찾아 복원을 하게 되어 현재에 이르는 것이다.
강화내성은 병자호란 때 대부분 파괴됐다가 효종 3년(1652년)에 일부가 수축되었고 숙종 3년(1677년)에 강화유수
허질이 개축하여 전면에는 돌로, 후면에는 흙을 쌓는 방식으로 북산과 남산 등줄기로 범위를 넓혔다.
흙으로 쌓은 성은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으며, 외성은 1233년 강화 동쪽 해안을 따라 쌓았다.
이 외성은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방어시설이자, 정부가 39년간 육지로부터
물자를 지원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성돌이"란 성을 돈다는 의미이다. 옛날부터 고성이 있는 지방에서는 '성돌기'가 벌어졌다.
강화에서도 강화산성을 도는 "성돌이" 행사가 있어 왔다. '성밟기'라고도 하는 이 민속놀이는 4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윤달에 펼쳐졌다.
강화산성의 성벽에 자생하는 담쟁이 넝쿨도 단풍으로 물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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