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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銀河水) 처럼 신비로운 "미리내 성지(美里川 聖地)"국내 나들이/천주교(天主敎) 2011. 7. 23. 22:37
은하수(銀河水) 처럼 신비로운 "미리내 성지(美里川 聖地)"
미리내 성지는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美山里)에 소재하고 있다.
본래 박해 시대의 교우촌으로, 1846년의 병오박해때 순교한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와 1866년의 병인박해 때 순교한
성 이윤일(요한)의 시신이 이곳으로 옮겨져 안장되면서 순교 사적지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미리내는 순우리말로 ‘은하수’라는 뜻으로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미리내를 한자로 미리천(美里川)이라 표기하고
이것과 산촌(山村)의 이름을 따서 미산리(美山里)라고 하게 되었다.
이곳이 순교 사적지로서 의미를 갖게 된 것은 1846년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한성 김대건 신부의 시신이 교우들에 의해 미리내로 이장되면서부터이다.
당시 김대건 신부의 시신은 순교한지 40일 만에 비밀리에 거두어져
용산 뒤편의 와서(瓦署,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0월 26일 서 야고보, 박 바오로, 한경선, 이민식 등에 의해 이곳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1886년에 시복 판사인 프와넬 신부가 봉분 중앙을 헤치고 홍대를 확인하였으며,1901년 5월 21일 에는 유해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 안치하였고,
10월 17일 이를 다시 신학교 성당으로 옮겼다.
그리고 1960년 7월 5일에 그 유해가 서울 혜화동에 있는가톨릭대학교로 옮겨지면서 하악골만은 미리내 경당으로,
치아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분리 안치되었다.
본래 무덤이 있던 자리에는 1928년에 김대건 신부의 경당이 건립되었다.
1853년 2월 3일에 사망한 페레올 주교의 시신도“거룩한 순교자의 곁에 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이곳에 안장되었고,
그 무렵 사망한 김대건 신부의 모친 고 우르슬라의 시신도 인근에 안장하였고,
1907년에는 강도영 신부가 석조 성당을 건립하였고,
1921년에 사망한 이민식도 김대건 신부의 경당 앞에 있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 후 1965년에 이 공동묘지가 광장으로 조성되면서고 우르슬라와 이민식의 묘가 현재의 자리에 이장되고,
그 해부터 매년 9월 26일경에 이 광장에서 순교자 현양 대회가 개최되고 있다.
1970년대 미리내는 순례사적지로 가꾸어지기 시작했다.
1970년 수원교구의 지원으로 노곡 삼거리에서 사적지 입구까지의 길을 확장하였고,
1974년 김대건 신부 기념 시비 건립, 1976년에 무명 순교자 묘역이 조성된 후
16구의 순교자 시신이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같은 해 정행만 신부가 수도회를 설립한 후, 이곳은 순례지로서의 면모를 더욱 갖추게 되었다.1982년 가을 사적지 안에 있던 주민들을 새로 조성된 새마을 단지로 이주시켰고,
1991년에는 '한국순교자 103위 시성기념성당'을 건립하였다.
김대건 1822~1846(순조22 ~ 헌종12)
우리나라의 최초의 신부, 천주교 성인. 교명 앙드레. 본관 김해.충청 남도 내포에서 독실한 천주교도 부모사이에서 태어났다.
천주교의 탄압을 피하여 경기도 용인의 골배마을로 이사와서 살았다.
어려서부터 할머니와 부모님에게서 천주교의 교리를 익혔다.1836년(헌종 2) 프랑스 신부모방한테 영세를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최양업, 최방제 등과 함께 중국의 마카오에 건너가,
파리 외방 전교회의 칼레리 신부로부터 신학을 비롯한 서양학문과 프랑스어. 라틴어 등을 배웠다.
그 후 마카오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1839년에 필리핀의 마닐라에 가서 공부하여 6개국어를 익히었다.
1842년(헌종 8) 프랑스 군함 제독 세실의 통역관으로 있다가
몇차례의 실패 끝에 1845년(헌종 11) 고국을 떠난 지 9년만에 돌아왔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포교에 힘쓰다가 페레올 신부를 데려오기 위하여 쪽배를 타고 중국 상하이에 건너갔다.
거기서 탁덕으로 승품되어 24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그 후 페레올.다블뤼 두 신부를 데리고 충청남도 강경을 거쳐서 귀국하였다.그는 지방전도에 나서 10년 만에 고향에서 어머니를 만났으나, 아버지는 순교한 뒤였다.
1846년 최양업과 다른 신부의 입국을 위하여 비밀 항구를 찾다가 체포되었는데,
서울로 끌려와 40회에 걸친 문초를 받고 9월 새남터에서 순교(당시 26세)하였는데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참수하여 군문효수할 것인데
헌종이 편법을 써서 효수하지 않고 매장하게 하였는데
매장 40일 후에 양성면 미리내에 사는 이민식 씨에 의하여
밤으로 7일에 걸쳐 운구하여 현재 미리내묘지에 안장하였으며,
1925년 7월 5일 로마교황 바오로 XI세로부터 복자위에 올림을 받았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우리 나라에 와서
직접 거행한 시성식에서 가톨릭의 성인 자리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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