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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여 부소산성(扶餘 扶蘇山城)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3. 8. 17. 04:11

     

     

    부여 부소산성(扶餘 扶蘇山城)

     

     

     

     

    백마강 남쪽 부소산(扶蘇山)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사비시대의 도성(都城)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백제본기(百濟本記)에는 사비성, 소부리성(所扶里城)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扶蘇山城)이라 부른다.

    웅진(熊津, 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백제 성왕(聖王) 16(538)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성왕(東城王) 22(500)경에 이미 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 있던 것을

    무왕(武王) 6(605)경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한 것으로 짐작되어

    백제 성곽 발달사를 보여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금강의 남안에 있는 부소산(扶蘇山)의 산정을 중심으로 테뫼식 산성이 동서로 나뉘어 붙어 있고,

    다시 그 주위에 북동쪽의 계곡을 둘러쌓은 포곡식(包谷式)산성을 동반한 복합식 산성으로,

    성내에는 사자루, 영일루(迎日樓), 반월루(半月樓), 고란사(皐蘭寺), 낙화암(落花巖),

    사방의 문지(門址), 군창지(軍倉址) 등이 있다.

    축성의 구체적 방법을 보면 성벽 안쪽의 흙을 파서 성내 벽쪽에 호()를 만든 한편,

    그 파낸 흙을 성벽의 축조에 판축의 재료로 이용하였다.

    바깥 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기둥을 세우고, 성벽의 안쪽과 중간에도 기둥을 세워 분할 축조되었다.

    기단에는 낮게 석축을 하거나, 기단 석렬을 마련하고, 안쪽으로 배수로 겸 통행이 가능한 좁은 부석(敷石)의 시설도 있다.

    성벽에는 가로 세로로 목재를 넣은 것도 있다.

    후대의 것은 무너진 흙을 내벽에 보축(補築)하기도 하였다.

    성의 바깥 벽면은 기반토(基盤土)를 마치 판축(版築)하듯이 황색 사질토와 적색점질토를 겹겹이 다져 놓았다.

    그 위에 돌을 35단으로 쌓고 흙을 덮었다.

    이런 방식으로 축조된 산성의 입지는 경사면이어서 원래의 경사도보다도 더욱 가파른 경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이 산성의 아래 너비는 7m 가량이며 높이는 대략 4~5m에 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산성이 백제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수축, 개축을 거치며 사용된 것이긴 하나,

    연차적인 조사에 의하여 성벽과 치성 및 특수한 시설과 내부의 여러 가지 양상이 차례로 밝혀져,

    우리나라 고대 축성 기술의 박람회장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표고 106m의 사비루 부근의

    산봉우리를 중심하여 조사된 구간에서는 다양한 집터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성에는 동,서남문지가 있으며, 북쪽의 금강으로 향하는 낮은 곳에 북문(北門)과 수구(水口)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구아리, 구교리 일원에 위치한 부소산성(扶蘇山城)은

    1963년 1월 21일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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