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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급한 상황을 알려주던 보신각터(普信閣址)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4. 5. 1. 05:52
위급한 상황을 알려주던 보신각터(普信閣址)
이곳은 조선시대에 도성문을 여닫는 시간과 화재와 같은 위급한 상황을 알리는 종이 걸려있던 보신각 터다.
원래는 종루 혹은 종각이라고 불렀는데 고종 때 다시 지으면서 이름을 보신각으로 바꾸었다.
1396년(태조 5년)에 종루를 짓고 도성 문을 열고 닫는 시간을 종을 쳐서 알렸다.
아침을 알리는 파루(罷漏)에 도성문을 열었다.
이때 종을 33번 쳤는데 이는 불교의 33천(天)을 의미한다.
저녁을 알리는 인정(人定)에 도성 문을 닫았다.
이때 종을 28번 쳤는데 이는 별자리수 28수(宿)를 의미한다.
태조 때 지어진 종루는 원래 인사동에 있었지만 태종 때 지금의 종로로 옮겨졌다.
화재와 전란으로 이나여 자주 소실되고 다시 지어지곤 하였다.
지금의 보신각은 세종 때의 건물규모를 따라 정면 5각 측면 4칸의 누각으로 지어졌다.
원래 보신각에 있던 서울 보신각종(보물 제2호)은 1468년(세조 14년)에
주조된 것으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있다
이곳에 있는 종은 1985년에 새로 만들어 설치한 것이다.
보신각은 1919년 3월 독립선언과 광복 이듬해
3,1절 기념행사의 현장으로서 민족사적 의미가 깊은 곳이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철동 45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0호 =
척화비(斥和碑) 있던 곳
19세기 후반 고종(高宗)의 생부(生父)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에 의하여
서양인의 조선침투를 방어 격퇴 시켰다는 의미로 전국 주요지역에 세웠는바 그중의 척화비가 있었던 곳.
3.1독립운동기념터(三一獨立運動記念址): 보신각(普信閣)앞
1919년 3.1 독립만세시위의 중심지로 4.23국민대회를 개최하고 한성정부(漢城政府)를 선포한 곳
보신각 새종
여기 보신각에 본디 있던 옛종은 조선 세조 14년 서기 1468년에 만들어져서 처음엔 사찰에서 불사에 쓰이다가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619년 광해군 11년부터 이곳 서울 한복판에서 자리하여 시민들에게 새벽과 밤을 알려왔는데
그만 일제시대 때는 민족 수난의 상징처럼 벙어리가 되었었고 해방 후에야 다시 울리기 시작해서
제야에는 새해 새아침을 알리는 축복의 종으로 또한 3.1절과 8.15에는 민족의 독립을 일깨우는
광복의 종으로 겨레의 가슴에 울려 새겨지며 5백17년이란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유서깊은 옛종의 수명이 다함에 따라 그것을 영구 보존하고
이와 갈음할 새종을 만들어야 한다는 시민들의 소리가 높아지자 서울신문사의 발의로
1984년 1월 20일 보신각종 중주위원회가 발족하여 전두환 대통령을 비롯한 온국민의 성금으로
기금을 마련하는 한편 그 제작을 전문가들에게 맡기어 5백 40여일 만에
새종의 완성을 보아서 뜻 깊은 광복 40돌을 맞아 첫종을 치게 되었다.
이 새종은 단순한 옛종의 복원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 양식과 현대 감각을 조화시켜 만든
예술과 과학의 어우름으로서 약진 한국의 슬기와 솜씨가 배어 있으며
면면한 이 나라의 시급한 통일과 무궁한 번영을 축원하는 온 겨레의 마음과 정성이 스며져 있다.
이처럼 이 새종에는 범국민적인 호응과 협력이 있었으나 여기에 그 사실을 일일이 밝히지 못하고
오직 이 일을 앞장서 애쓴 몇 기관과 몇 분들만의 이름을 아래에 새기며 이들의 공덕을 기리는 바이다.
1985년 8월 15일
주관: 보신각종 중주위원회 위원장 윤보선
운영위원: 이종찬, 이우재, 염보현, 구본석, 김원룡, 문태갑, 서정화, 정수창,
집행: 서울신문사, 설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부속 생산기술연구소
감리: 염영하, 이장우
조각: 강찬균, 주조: 성종사, 글: 구상, 글씨: 이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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