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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꽃뫼(花山) 제사유적지-수원 화서동
    수원사랑/문화재(文化財) 2014. 10. 7. 05:36

    꽃뫼(花山) 제사유적지-수원 화서동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688-4에 위치한 꽃뫼 제사유적지는 수원시 도심의 서북부 서호천 근처의 낮은 구릉(丘陵)에 위치하며,

    화서역 주변의 택지개발지구로 예정되면서 1995년 수원대학교 박물관의 사전 지표조사를 통해 알려지게 되었고

    1997년도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유적에 대한 성격을 알게 되었다.

    발굴된 유구(遺構).유물(遺物)로는 제사유적과 관련된 석축(石築). 토광묘(土壙墓), 옹관묘(甕棺墓), 조선시대 평민(平民)의 묘,

    조선시대 회곽묘(灰槨墓), 토기류, 자기류(백자,청자,분청사기), 청동숟갈, 상평통보,쇠칼(鐵刀), 각종 제사용구 등이 있다.

    이상의 발굴결과 이 유적은 철기시대(鐵器時代) 전기(BC300~0)부터 조선시대 까지 제사를 지냈던 제사유적으로 추정된다.

    꽃뫼 제사유적지는 수원시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다.

     

    처녀의 슬픈사연이 서린 곳, 꽃뫼마을

     

    경부선 철도가 지나는 화서역주변 꽃뫼(花山)마을에는 야트막한 산이 하나 아파트 숲 사이에 가려져 있다.

    이 산 이름이 꽃뫼(花山)로서 한 처녀의 슬픈 사연이 담겨 있다.

    옛날 꽃뫼(花山)마을에 품행이 단정하고 마음씨가 고운 처녀가 병든 아버지를 극진히 모시면서 살고 있었다.

    홀아버지와 사느라 혼기가 찼어도 시집을 못가고 살았다.

    처녀는 여자의 몸으로 농사일을 하기가 힘들어 머슴을 두어 농사를 짓게 하고 자신은 아버지 병간호에 온 힘을 다했다.

    그런데 이 머슴은 처녀의 아름다움에 반해 어느 봄날 밤에 처녀에게 못된 짓을 하고 말았다.

    어렵게는 살았지만 양반의 후손이었던 처녀는 불가항력으로 몸을 유린 당하고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뒷동산에 올라가 흐느끼며 아버지가 계시는 집 쪽으로 큰절을 한 후 나무에 목을 매달고 말았다.

    양심에 가책을 느낀 머슴의 실토로 이 사실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은 처녀의 시신을 나무 아래 정성껏 묻어주었다.

    그런데 몇 해가 지나자 이곳에서는 진달래 꽃나무가 자라났고 점차 옆으로 퍼져나가 봄철엔 꽃이 온 산을 뒤덮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처녀의 효심과 고운 마음씨가 꽃으로 환생해 해마다 꽃이 피어나는 것이라고 여겨

    이 산을 꽃뫼(꽃산) 또는 화산(花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 이 마을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은

    1990년대 초반까지도 매년 이 산에서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한편 수원시와 수원대학교가 1997년 이곳을 발굴 조사한 결과,

    이곳이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는 중요한 제사 유적지임을 확인하기도 했다.

    얼마전 이 산꼭대기에서는 삼국시대 제사유적의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와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마을에서는 매년 추석을 전후한 시기에

    주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동제(洞祭)를 올리기도 했는데, 동제를 지내지 않으면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기고,

    특히 마을을 가로 지르는 꽃뫼 앞 철도(경부선)에서 열차 사고가 일어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동제는 이 마을이 철거되고 아파트 단지로 변화하면서 지난 1996년이후 명맥이 끊어졌다.

    꽃뫼의 지명에 대한 또 다른 견해는, 한자로 화산(花山)이라고 쓰게 된 연유에 대한 것이다.

    이 곳에는 경주 김씨(慶州 金氏)의 집성촌으로 한데 살고 있었는데

    이 곳에 예전에 살았던 선조인 김상연(金相淵, 또는 相衍,1677~1732)이

    여기산 기슭에서 이 곳으로 옮겨와 처음 터를 잡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곳 지명도 그의 호를 따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김상연은 조선 시대 숙종과 경종 때의 사람으로 경기좌방어사,

    가선대부 부사원종공신 등을 지낸 무관으로서 호가 화산(花山)이었다고 한다.

    그의 유해도 화산에 묻혔다가 최근에 발굴되어 화장되었다.

    따라서 경주 김씨 후손들에 따르면 처녀와 관련된 꽃뫼의 전설은 후세 사람들이 지어낸 것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명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견해는 위에 밝힌 두 가지 설과는 전혀 다르다.

    우리 지명에서는 땅 한쪽이 삐죽하게 튀어나간 곳을 '고지', '곶', '구지'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황해도 서해안의 '장산곶' 이나 서울 성동구의 '살곶이' 같은 땅 이름이 있다.

    수원에도 '황구지'라는 지명이 보인다.

    곶의 안쪽이면 곶안(고잔), 바깥쪽이면 곶밖(꽃밭)과 같은 땅 이름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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