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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학(家學)의 전통이 빛나다. 가보(家寶)특별전-성호기념관
    국내 나들이/기념관(記念館) 2015. 4. 3. 05:18

    가학(家學)의 전통이 빛나다. 가보(家寶)특별전-성호기념관

     

    성호 이익을 중심으로 한 여주이씨 가문의 가보와 가학 이야기.

    성호기념관에서는 국립민속박물관과 공동으로 '가보(家寶), 가학(家學)의 전통이 빛나다' 특별전을 개최하고 있다.

    이번 특별전은 조선 후기 실학의 태두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을 배출한 여주이씨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가학의 전통을 국가지정문화재인 “천금물전(千金勿傳)”을 비롯해 50건의 존귀한 가보와 자료 등이 전시되며,

    소릉(少陵) 이상의(李尙毅, 1560∼1624)로부터 옥동(玉洞) 이서(1662∼1723)까지

    가문에 전해오는 가학의 전통을 살펴보고 국가지정문화재 및 도지정문화재 등을 함께 공개한다.

    역사인물 성호 이익부터 성호의 학문적 업적 및 삶과 언행을 기록하고 묶어 책으로 간행함으로써

    성호학을 새로운 가학의 전통으로 만든 후손들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생애의 대부분을 안산에 머물며 농사를 지면서 '백성을 살리자'는 대장부의 뜻을 가지고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도리를 연구한 대학자 성호 이익의 일상적인 삶과 언행 및 그의 대표적 저작들을 볼 수 있다.

    성호학이 밑거름이 되어 조선 후기 정치·경제·사회 문제에 대한 실천적이고 실용적인 답을 찾고자 했던

    성호 이익의 후손과 후학들의 발자취를 통해 찬란하게 빛난 가학의 전통이 소개된다.

     

     

     

     

    성호기념관은 성호 이익(1681~1763)의 그 학문적 업적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건립한 기념관으로,

    2002년 5월에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개관했다.

    지하 1층에는 기획전시관, 영상관, 체험학습장, 수장고, 성호학당, 유물관리실이 있고

    지상 1층에는 매표소와 사무실이 있으며 지상 2층에는 상설전시실, 실학정보실, 이익 선생 묘소전망대 등이 있다.

     

     

     

     

     

     

     

     

    발문 이익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증조부를 직접 모셔보지 못했다.

    말씀과 덕행에 대해서는 그래도 들을 수가 있었으나, 증조부의 기상(氣像)과 정채(精彩)는 보지 못했다.

    그런데 기상은 초상화에 잘 나타나 있고 정채는 필획(筆劃)에 잘 보존되어 있었다.

    오늘부터 증조부의 유묵(遺墨)을 만져 보고 초상화를 볼 수 있게 되었으니 후손으로서 감회가 깊다.

    이 서첩(書帖)은 간찰(簡札)을 모으고 그 위에다 초상화를 삽입하였는데, 그 속에 담긴 의도가 매우 치밀하다.

    이 서첩을 만든 이는 현손 관휴(觀休)이고 초상화를 그린 이는

    외예손(外裔孫) 윤덕희(尹德熙)이며 증손인 내가 또 그 발문을 썼다.

     

    청풍계첩도(靑楓稧帖圖)

     

    계회도 속에 보이는 정자는 장안 최고의 경관을 자랑하는 유람의 명소 청풍계(서울 청운동)의 태고정(太古亭)으로,

    ‘산이 고요하기가 마치 태고와 같다(山靜似太古)’는 소강절(邵康節)의 시구에서 이름을 딴 것이다.

    그리고 정자 주변에는 세심지(洗心池), 함벽지(涵璧池), 척금지(滌衿池)라 불리는 세 연못이 조성되어 있는데

    세심지에 물이 차면 함벽지로 넘쳐들고, 함벽지의 물은 다시 척금지를 거쳐 계곡으로 흘러나가게끔 설계되어 있었다고 한다.

    특히 계회도는 겸재 정선이 출현하기 전까지는 청풍계를 그린 유일한 작품이다.

    청풍계첩(靑楓稧帖)의 계회도는 청풍계의 실경을 그린 17세기 실경산수화이지

    계회도의 연장선에서 18세기 시회도의 새로운 형식을 갖춘 그림으로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묵희

     

    명필 가로 알려진 이익의 셋째 형 이서의 서첩으로 "글씨에 기력이 있다"는 평의 다양한 서체가 수록되어 있다.

    묵희는 "필묵의 유희"라는 의미이다.

     

     

     

     

     

    천금물전(千金勿傳)-보물 제1673호

     

    이익의 아버지인 매산(梅山) 이하진(李夏鎭)의 서첩으로, 천금물전(千金勿傳)은

     "천금을 준다 해도 그 사람이 아니면 전하지 말라”는 뜻으로

    “금전이 아닌 대의를 추구하라”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이서간찰

     

    이익의 세째 형 이서가 어머님을 모시고 있는 안산의 동생 이익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이다.

    그는 양아버지 이주진의 묘소가 있는 포천에서  살았다.

     

     

     

    이서초서

     

    이익의 셋째 형 이서가 아들 이원휴에게 주기 위해 쓴 초서체 글씨이다.

     

     

     

     

     

    이삼환 영정(李森煥 影幀)

     

     

     

     

    반 숙 가 (半菽歌)

     

    - 이   익 -

     

     

    하늘에서 난 오곡에 콩이 한 자리를 차지하니

    그 중에서도 붉은 콩이 특히 좋다 할 수 있네

     

    여름에 싹터서 겨울에 죽으니

    달고 부드러워 맛 더욱 좋네

    가난한 집 재물 없어도 좋은 방편이 되고

    싼 값에 쉽게 구하니 이 또한 좋은 일이네

     

    쌀과 콩을 고르게 섞어서

    가마솥에 푹 익혀 찌니 김이 올라 안개 같네

    한 사발 가져오니 훈기 가득 서리고

    쌀과 콩이 섞여서 엉기어 있네

     

    봄바람에 여러 꽃이 겹겹이 피어

    붉은 복숭아꽃 하얀 오얏꽃이 함께 있는 모양이네

    어른 아이 갈라 앉아 다투어 수저 들고

    다 같이 씹으니 치아가 향긋하네

     

    요즈음 고기 맛을 잊은 지 오래니

    황하강 잉어, 송강 농어 자랑하지 마라

    앞마을에 밥 빗는 연기 끊긴 것을 보라!

    콩밥도 나에게는 사치스럽지 않은가?

     

    듣자하니 부귀한 자들은 사치를 다투어

    한 끼에 만 금 들여 고기를 나열 한다네

    배불리 먹고도 그치려 하지 않고

    백성 고혈 짜내어 제 욕심 채우나니

     

     

    위 시는 성호 사농합일론(士農合一論)을 바탕으로 농사도 짓지 않으면서

    착취한 재물로 사치에만 여념이 없는 집권층을 비판하는 시이다.

    아울러 콩이 백성들의 부족한 식생활을 메울 수 있는 고기에 견주어 지는

    좋은 먹거리로 인식하여 이를 권장하는 시이기도 하다.

     

     

     

    성호(星湖) 이익(李瀷) 생애(生涯)

     

     

    조선후기 실학의 대가로 알려진 그는 1681년(숙종 7) 신유년 10월 18일

    아버지 이하진의 유배지(流配地)인 평안도 운산(雲山)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는 성호가 두 살 되던 1682년(숙종 8) 임술년 여름

    향년 55세로 귀양이 풀리지도 않은채 그곳에서 세상을 버렸다.

    이처럼 성호의 생애는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작되었다.

     

    어린 성호를 키운 것은 편모인 권씨부인이었지만

    그를 학문의 세계로 이끈 것은 둘째 형님 섬계공(剡溪公) 이잠(李潛)이었다.

    스물 두 살 터울로 마치 어버이 같고 스승같던 이 형님마저 성호의 나이 26세 나던

    1706년(숙종 32) 진사의 신분으로 서인(西人) 중신(重臣)의 잘못을 임금께 상소했다가

    역적으로 몰리어 곤장을 맞고 작고하였다. 연이은 당쟁의 환난(禍難)이었다.

     

    성호는 이보다 일년전인 1705년(숙종 31)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답안지[科紙]에 적은 이름[錄名]이 잘못되었다는 빌미로 제2차시험인 회시(會試)에 조차 나가지 못하였다.

    이 사건 이후 그는 과거를 아예 작폐한 채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이같은 일들을 일러 다산 정약용은 “성호선생께서 집안에 화를 당한 뒤로 이름난 학자가 되셨으니

    권세있는 부호가의 자제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라고 기록했다.

     

    그가 33세 나던 1713년(숙종 39)은 성호의 생애에 있어 대단히 의미있는 한 해였다.

    기다리던 외아들 맹휴가 태어나고 본격적인 저술 활동이 시작된 해였기 때문이다.

    ‘질서(疾書)’의 시작인 『맹자질서』는 이 해에 완성되었다.

    성호의 학문이 알려져 많은 제자들이 안산으로 찾아든 것은 그의 나이 30대 부터였다.

    또한 47세 때에는 나라에서 그의 학문과 덕행(德行)을 듣고 몇 차례 벼슬을 내리고자 불렸으나

    한번도 이에 응하지 않고 성포동에서 농사지으며 학문에만 정진하였으니 그가 주장한 ‘사농합일(士農合一)’

    즉, ‘선비는 농사로서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철저히 실천한 셈이다.

     

    본래 병약했던 그가 등과 가슴에 악성 종기가 심해지기 시작한 것은 60대 이후였다.

    외아들 맹휴도 같은 증세로 39세에 젊음을 버렸으니 이 병은 성호가의 고질이었던 듯하다.

    수많은 친족에 대한 보살핌과 자신의 병을 다스리는 동안 이미 가산은 탕진되어

    나중에는 ‘송곳조차 꽂을 단 한 평의 땅도 없을’ 정도로 경제적 몰락과 모고(困苦)를 겪게 되었으나,

    이런 고통 속에서도 83세로 이승을 버리기까지 세상을 위한 실용·실증의 학인 경세치용의 학문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

    그가 83세 되던 1763년(영조 39), 영조는 고령의 노인을 우대하는 나라법에 따라,

    성호에게 정3품 당상관직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의 벼슬을 내렸다.

    세상을 떠나기 몇 개월 전의 일이었다. 같은 해(1763) 11월 병상에 들어 12월 섣달 17일 정침에서 임종했으니 향년이 83세였다.

     

     

    이상의 영정(李尙毅 影幀)

     

     

     

     

    성호(星湖)이익[李瀷,1681(숙종7)~1763(영조 39)]

     

     

    유형원(柳馨遠)의 학문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의 실학을 대성했다. 독창성이 풍부했고,

    항상 세무실용(世務實用)의 학(學)에 주력했으며, 시폐(時弊)를 개혁하기 위하여 사색과 연구를 거듭했다.

    그의 개혁방안들은 획기적인 변혁을 도모하기보다는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한 것으로

    현실에서 실제로 시행될 수 있는 것을 마련하기에 힘을 기울였다.

    그의 실학사상은 정약용(丁若鏞)을 비롯한 후대 실학자들의 사상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자신(自新), 호는 성호(星湖)이다.

     

    그의 가문은 남인 계열이었다. 증조할아버지 상의(尙毅)는 의정부좌찬성을,

    할아버지 지안(志安)은 사헌부지평을, 아버지 하진(夏鎭)은 사헌부대사헌을 지냈다.

    그가 태어난 바로 전 해인 1680년(숙종 6) 남인정권이 무너지고 서인이 재집권하는 경신대출척이 일어나

    남인이었던 아버지도 진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곧 다시 평안도 운산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이 유배지에서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1682년 아버지가 유배지에서 죽은 후

    어머니 권씨는 선영이 있는 안산의 첨성촌(瞻星村)으로 이사했고,

    이후 그는 이곳의 성호장(星湖莊)에서 평생을 지내게 되었다.

     

    둘째 형인 잠(潛)에게 글을 배웠다. 처음 학문에 뜻을 두어

    맹자〉·〈대학〉·〈소학〉·〈논어〉·〈중용〉·〈근사록〉을 읽고,

    다시 〈심경〉·〈주역〉·〈서경〉·〈시경〉을 거쳐 정주(程朱)와 퇴계(退溪)를 탐독하여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1705년 증광시에 응시하여 초시에는 합격했으나 이름을 적은 것이 격식에 맞지 않아서 회시에는 응시할 수 없었다.

    이듬해 둘째 형 잠은 진사로서 장희빈(張禧嬪)을 옹호하면서

    노론집권당을 공격하는 격렬한 상소를 올려 국문 끝에 장살(杖殺)당했다.

    이익은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아 과거를 완전히 단념하고 두문불출하며 독서에 전념했다.

    이후 셋째 형 서(漵)와 사촌형 황(況)에게서 수학했다. 1715년 어머니를 여의고

    복상이 끝난 후에는 노비와 집기 일체를 종가(宗家)에 돌리고 약간의 토지만으로 생계를 이었다.

    1727년(영조 3) 학명이 알려져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에 임명되었으나

    끝까지 사양하고 성호장에 묻혀 저술에만 몰두했다.

    1763년에는 노인을 우대하는 제도에 따라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12월 83세의 일생을 마쳤다.

     

    그가 삶을 영위한 시기는 18세기 전반기로서

    임진왜란·병자호란으로 말미암은 피폐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때였다.

    나라의 재정은 궁핍했고 황폐된 전지(田地)가 복구되는 과정에서 궁방전·아문둔전·영문둔전,

    그리고 양반의 대토지 소유가 새로이 전개되면서 지주전호(地主佃戶) 제도가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또한 동서분당이 남인·북인·노론·소론의 사색당쟁으로 발전되고 다시 노론의 일당독재가 굳어지는 추세 속에서

    정치 기강은 극도로 문란해지고 감사·수령의 가렴주구가 심화되었다.

    이로써 농민의 광범한 몰락이 현저하게 전개되었다.

    이익은 이 시기에 관직의 길을 절연하고 평생을 초야에서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글만을 읽고 성인(聖人)의 도리만을 말하면서,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는 방책에 대하여 연구하지 않는다면 그 학문은 개인생활에 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국가적 관계에서도 무용한 것"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그의 학문의 성격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는 학문을 연마하는데 있어 반계 유형원의 학문을 계승하여 조선후기의 실학을 대성하였는데.

    독창성이 풍부했고 항상 "세무실용" 에 주력하였다.

    그의 개혁 방안들은 획기적인 변화를 도모하기보다는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한 것으로써

    현실에서 실제로 시행될 수 있는 것을 마련하기에 힘을 기울였다.

    이리하여 그의 실학사상은 다산을 비롯한 후대 실학자들의 사상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철학사상에는 자연과학 사상이 그 바탕에 깔려 있는데 그는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하여 "천원지방설" 을 부정했으며

    이로써 "지전설" 까지도 제기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당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과거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함으로써

    관리로서 능력이 있는 사람들만을 기존의 숫자보다 줄여 엄격하게 선발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한 실학자이다.

     

    한편 양반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개혁하여 그들도 농업과 상업에 종사하면서 삶을 이어가야한다고 주장한다.

    경제 제도에서는 토지제도가 가장 핵심적인 관건이라고 생각하였기에 "균전제" 를 주장하는 등

    이익의 기본적 개혁사상 성격은 봉건적 전제주의와 양반 통치제도 그리고 봉건적 토지 소유의 횡포와 함께

    화폐유통으로 인한 소농과 빈농의 몰락도 저지함으로써 모두가 노동하며 함께 사는 자영농으로서

    아울러 소득을 얻으며 사는 일명 "자영농경리" 를 지향하였다.

     

    성호 이익. 그가 유교적인 도덕윤리에서 비록 완전히 자립화시켜 독립된 학문으로 확립시키지는 못하였으나

    민족의식의 빛을 보였고 근대적인 역사학을 일단 출발시킴으로써 한국에서 근대적역사 인식을 성립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저서로는 <성호선생문집> , <성호집속록> . <성호사설> . <곽우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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