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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강산 화암사(金剛山 禾巖寺)
    국내 나들이/사찰(寺刹), 불교(佛敎) 2015. 6. 27. 05:55

    금강산 화암사(金剛山 禾巖寺)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로

    769년(신라 혜공왕 5) 진표(眞表)가 창건하고 이름을 금강산 화엄사(華嚴寺)라 했다.

    사적기에 의하면, 당시 금강산으로 들어온 진표는 금강산의 동쪽에는 발연사(鉢淵寺)를,

    서쪽에는 장안사(長安寺)를, 남쪽에는 이 화엄사를 창건했는데,

    화엄사라 한 까닭은 이 곳에서 “화엄경(華嚴經)”을 강하여 많은 중생을 제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화엄경을 배운 제자 1백 명 가운데 31명은 어느 날 하늘로 올라갔으며,

    나머지 69인은 무상대도(無上大道)를 깨달았다고 한다.

    또 진표는 이 곳에서 지장보살을 친견하고 그 자리에 지장암(地藏庵)을 창건하여 이 절의 부속 암자로 삼았다 한다.

    그 뒤 941년(고려 태조 24) 월영암(月影庵)을 창건했으며,

    1401년(조선 태종 1) 지장암을 동쪽으로 옮기고 미타암(彌陀庵)으로 이름을 바꿨다.

    1623년(인조 1) 불에 타서 1625년 중건했다.

    1628년에는 광명(廣明)이 지장보살상을 조성했으며, 안양암(安養庵)을 창건했다.

    그러나 1635년 산불이 일어나 다시 불 탔다.

    이에 동쪽 20리 지점으로 임시 이전했다가 1644년(인조 22)에야 옛터에 중건했다.

    1662년(현종 3)에도 화재가 있어 중건했고, 1716년(숙종 42)에는 산적들이 불 태워 버렸다.

    이듬해 승려들은 동쪽으로 10리 가량 떨어진 무릉도(武陵島)에 초옥을 짓고 거주하다가,

    1721년(경종 1) 옛 절터로 돌아와 중건했으며, 해성(海城)은 안양암을 중수했다.

    1760년(영조 36) 화재로 대웅전과 향각(香閣), 승당이 불 타자 승려들이 협력하여

    이듬해 승당을 세우고, 1762년 대웅전과 향각을 중건했다.

    1794년(정조 18)에는 화성 도한(華城 道閑)이 약사전에서 나라를 위한 기도를 주야 21일 동안 올렸는데

    기도가 끝나자 방광(放光)이 뻗쳐 그 빛이 궁궐의 뜰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이에 정조는 제조상궁(提調尙宮) 최(崔)씨를 이 절에 파견하여 도한을 궁궐로 데려오도록 했다.

    도한으로부터 경위를 들은 정조는 크게 감격하여 이 절을 가순궁(嘉順宮)의 원당으로 삼고 요사채 2동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1796년에는 미타암의 화응전(華應殿)을 정조의 원당으로 정하여

    관음보살상과 정조의 친필 병 6폭, 연(輦)을 하사하고, 절의 사방금표(四方禁標)를 정해 주었다.

    이로써 이 절은 창건 이래 가장 큰 사역(寺域)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60년(철종 11) 산불로 암자까지 모조리 소실되었으며, 승려들은 춘담(春潭)을 중심으로 중건에 착수했다.

    전국 여러 곳을 다니며 시주를 모으고 왕실의 도움을 받아 화엄사와 안양암을 중건했으며, 수봉(穗峰)은 탱화를 조성했다.

    1864년(고종 1) 다시 산불로 소실되어 불 타지 않은 승당에 임시 법당을 마련하고 지내다가

    1864년 지장탱화와 신중탱화, 현왕탱화를 조성 봉안했다.

    그리고 화재를 면하고자 풍수지리에 입각해서 남쪽의 화기를 지닌 수암(秀巖)과

    북쪽의 코끼리 바위의 맥이 상충하는 자리를 피하여 100m 아래에 절을 짓기로 했다.

    1872년 수봉이 새 터에 법당, 영각(影閣), 누각, 요사채를 중건했으며,

    1882년(고종 19) 자허(자虛)와 선월(船月)이 철원 장구사(長久寺)로부터

    아미타여래좌상과 약사여래좌상을 모셔 봉안했다.

    1893년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안양암이 붕괴되었고, 1894년축성(竺星)이 중했으며,

    1909년 영운(影雲)이 안양암에 칠성각을 건립했다.

    1912년에는 사찰령에 따라 전국 31본산 중 건봉사(乾鳳寺)의 말사가 된 뒤부터

    화암사라는 이름을 공식 명칭으로 사용했다. 1915년 9월 다시 불 타서 1917년 중건했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 때 크게 파손되어 외채 1동만 남게 되었다.

     1953년 휴전 뒤에 건봉사 극락암에 있던 한 비구니가 정착하여 머물렀다.

    1986년에는 주지로 부임한 양설(良說)이 세계 잼버리대회와 때를 맞추어

    절을 중창함으로써 다시 큰 절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잼버리로 163-100 =

     

    일주문(一柱門)

     

    화암사 입구에서부터 포장된 길을 따라 2.8km 들어가면 “금강산 화암사(金剛山 禾巖寺)”라는 현판이 걸린 일주문이 나온다.

    이 일주문은 “금강산 화암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중생과 부처가 하나이고 진(眞)과 속(俗)이 하나이며,

    만법이 일심(一心)의 소현임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문이다.

     

     

     

     

     

    범종루(梵鐘樓)

     

     

    범종루 종각에는 “풍악제일루(楓嶽第一樓)”라는 현판이 쓰여 있으며 안에는 범종(梵鐘)이 매달려 있다.

    이 범종은 주지 김문석 스님과 문창하(文昌廈) 신도회장(信徒會長) 외 30여 명의 시주와 성금으로

    불기(佛紀) 2539년(乙亥年) 범종사(梵鍾社)에서 주조(鑄造)한 것이다.

    옛날에는 용뉴 아래 부분이 주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볼트 모양의 인위적인 연결부가 종을 지탱하는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이 범종은 삼라만상이 깨어나는 시각 웅장하게 울려 퍼져 산사의 아침을 알린다.

    범종소리는 지옥의 고통을 쉬게 하고 모든 번뇌를 소멸시키며 중생의 각성을 일깨우는 지혜의 소리이다.

    이곳 범종루는 좋은 전망대이기도 하다. 범종루 앞에 서면 절벽 끝에 세워진 란야원이 시선을 자극하며

    이 란야원 지붕위로는 저 멀리 끝없이 펼쳐지는 동해와 속초 시가지가 시야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동해와 속초 시가지는 한가롭고 평화롭기 그지없다.

     

     

     

     

    선시(禪詩)의 길을 조성(造成)하는 취지(趣旨)

     

    선(禪)의 핵심은 깨달음에 있고, 선(禪)에 의해 깨달음의 지혜가 열린다.

    순수한 집중과 깊은 사유로 자기실상을 자각하고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선(禪)이다.

    그리고 자기응시와 깊은 탐구로 신(神)과 내통하고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부처를 돈오(頓悟)하여 자기존재의 핵심에 도달케 하는 것이 선(禪)이다.

     

    선시(禪詩)는 스스로 깨닫고 체험된 세계를 언어로 형상화하고 표현한 것을 말한다.

    즉, 돈오(頓悟)적 직관으로 존재의 실상을 깨닫고 내심자증(內心自證)된 세계를 언어로 표현한 작품을 선시(禪詩)라고 한다.

    화암사는 일주문에서 절 입구에 이르는 도로포장공사를 시작하면서

    이 길을 사색과 명상이 있는 선시(禪詩)의 길을 만드는 계획을 세웠다.

    절로 올라오는 오른편에는 현대에서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깨달음을 이루었던 고승들의 오도송(悟道頌)을 중심으로

    비를 만들고 다시 절에서 내려가는 오른편쪽에 고승들의 열반송(涅槃頌)을 위주로 비(碑)를 세워서

    이곳을 찾는 탐방객들에게 명상과 사유의 즐거움을 누리는 공간을 만들기로 하였다.

    진리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배우는 일이다.

    자기를 배우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를 내려놓고 배워야 본래 자기 모습이 드러난다.

    올라오는 길에서는 깨달음을 배우고, 내려가는 길에서는 내려놓고 비우는 지혜를 통해 자기현존을 뒤돌아보게 하였다.

     

     

     

     

     

     

     

     

     

    감로수(甘露水)

     

     

    “깨끗하며 시원한 맛의 물”이라는 “감로수(甘露水)”

    이곳에는 ‘한모금의 청정수로 갈증을 가시옵고 원컨대 위업의 깨달음을 얻으소서’라는 글귀가 음각되어 있다.

    또 불기 2537년 4월에 설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웅전과 구층석탑

     

     

    화암사의 중심 법당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多包系) 겹처마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1991년 건립되었다.

    대웅전에는 지혜의 제화갈라보살, 2m정도의 본존불인 석가모니불,

    미륵보살이 온화한 모습으로 정좌하고 있는데, 이 순서는 법화경에 의한 것이다.

    제화갈라보살은 과거불인 연등불이 부처가 되기 전의 이름이며,

    석가가 과거세에서 선혜보살로 수행 중 일 때 연등불에게서 “다음 세상에서 여래가 되리라”는 수기를 받고 현재불이 되었고,

    석가모니불은 미륵보살에게 미래에 미륵불이 되리라는 수기를 내렸다고 한다.

    이렇게 서로 수기를 주고받은 세분의 불· 보살을 모신 것을 삼세불 또는 수기삼존불이라고 한다.

    삼존불 위의 보궁형(寶宮形) 닫집에는 구름 속을 노니는 두 마리의 용과 극락조(極樂鳥) 등이 조각되어 있다.

    이 대웅전은 화강암으로 견고하게 쌓은 석단이 건물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건립된 지 얼마 안 된 건물이지만 꽃 문살과 단청이 매우 화려하면서도 정교하게 장식돼 있다.

    대웅전 앞에는 구층석탑이 마주보고 자리해 있다. 화암사는 절터의 기운이 매우 센 곳이라 예부터 많은 화재가 발생하였는데,

    이 탑은 주변의 이러한 센 기운을 억누르기 위해 최근에 세운 비보성격의 탑이다.

     

     

     

     

     

     

     

    평화의 불

     

    해와 달이 다하고 중생업이 다해도

    우리는 둘이 아닌 불이의 진리

    이 도랑 밝게 비춘 평화의 불

    남과 북이 하나되길 서원하오며

    무명번뇌 모두 태운 모든 중생들

    평화, 열반 이루도록 발원하나이다.

     

    선묵혜자스님이 부처님 탄생성지 룸비니를 밝히던

    평화의 불을 채화하여 삼만리 이 운의 길을 통해

    한국으로 모셔와 오늘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며

    화암사에 평화의 불을 밝힌다.

     

    불기 2557년(2013년)10월 19일

    대한불교 조계종 화암사 주지 웅산

     

    선묵혜자 스님과 마음으로 찾아가는 108산사 순례기도회

     

     

     

     

     

     

    명부전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심포 맞배지붕으로 구성된다.

    내부에는 지장보살상과 지장보살의 협신인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비롯한 명부의 10대왕이 도열해 있다.

    그리고 대왕을 대신하여 심판을 하는 판관과 기록 및 문서를 담당하는 녹사,

    수명이 다한 사람을 잡아간다는 저승사자, 우두와 미두신이 있다.

     

     

     

     

     

     

    樹下降魔(苦行修道)相

     

    29세에 출가한 싯다르타는 구도자 보살(菩薩)로서의 삶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행의 삶이었다.

    극도의 고행으로서 “위없는 깨달음(무상보리)”을 얻으려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6년의 갖은 고행이 최상의 깨달음이 아님을 알아차리고

    6년 금식고행의 수행생활을 청산하고 수자타의 우유죽 공양으로 기운을 차리게 된다

    이렇게 수자타의 우유죽 공양을 드신 보살은 넓은 그늘을 드리운 피팔라나무(Pippala:보리수)에 이르러

    주위를 세 바퀴 돈 뒤 길상(吉相)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솟띠아로부터 길상초 받아 반석 위에 고르게 펴서 깔고

    동쪽을 향해 몸을 바르게 세우고 호흡을 고른 후 보살은 맹세하였다.

     

    “여기 이 자리에서 내 몸은 메말라 가죽과 뼈와 살이 다 없어져도 좋다.

    저 깨달음을 얻기까지는 이 자리에서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

     

    갖은 마라(악마)의 유홋에도 굴하지 않고 깊은 명상에 들어,

    칠 일째 동쪽의 새벽녘 샛별을 보고 드디어 보살은 모든 미혹의 번뇌를 일순간에 다 끊어버릴

    “아뇩다라 삼먁삼보리” 무상보리의 정각(正覺)을 이루었다. 태자 나이 35세 때 12월 8일의 일이었다.

     

    49일간 선정에 든 후 “내 이제 감로의 문을 여나니 귀 있는 자는 들어라 낡은 믿음을 버리고...” 함께

    고행을 닦았던 아야교진여 등 다섯 비구에게 처음으로 가르침을 설하는데

    이를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 하며 이들은 석가모니의 첫 제자가 되었다.

     

    수하항마(樹下降魔)상 석가모니 부처님께 참배 드리고, 우리 모두 수행정진(修行精進)하여 성불(成佛)합시다.

     

    나무석가모니불

     

     

     

     

     

     

    삼성각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장방형 구조이며 맞배지붕, 겹처마로 구성되어 있다.

    삼성각은 칠성(七星)과 독성(獨星) 및 산신(山神) 세분을 한 곳에 모셔놓은 곳으로,

    중앙의 칠성탱화를 중심으로 왼쪽에 산신탱화, 오른쪽에 독성탱화가 그려져 있다.

    칠성탱은 1982년에 조성하였고 독성탱은 1981년, 산신탱은 1982년에 조성되었다.

    삼성각 내벽에는 금강산 천선대, 상팔달, 세전봉, 삼선대 등 불전임에도 불구하고

    금강산의 이채로운 풍경을 주제로 그려진 점이 눈길을 끈다.

    이것은 화암사가 금강산 1만2천봉 8만9암자 중 남쪽에서 시작하는

    첫 봉인 신선봉 아래의 첫 번째 암자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주민과 신도들도 삼성각이 금강산의 시작점인 신선봉 바로 아래 세워져 있어 매우 영험하다 믿고 있으며,

    지금도 전국에서 수많은 신도들과 스님들이 찾아올 정도로 유명한 기도도량이다.

     

     

     

    영은암

     

     

    옛 조사(祖師)들이 이곳에서 생멸(生滅)을 뛰어 넘는 지혜(智慧)를 닦아 각지(覺地)에 오른 곳이고

    누구나 이곳에 머물고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으면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얻는 선불장(選佛場)이다.

    항상 맑은 물이 흘러 소리를 내면 산이 울리고 골짜기가 응하며

    때로는 물결이 뒤집혀 흰 물방울이 설화(雪花) 처럼 뛰어 오르기도 하고

    때로는 반석(盤石) 위에 무지개를 드리우고 구슬을 뿌리는 기관(奇觀)이 있으니

    참으로 신령스럽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송골(松骨)을 깎아서 들보를 만들고 앞산에 머물고 있는 구름을 끌어다가 지붕을 만들고

    지나가는 바람을 멈추게 하여 벽을 만들었으며 밝을 달을 걸어서 등불을 삼았다.

    이곳에 머문 자는 본분(本分)을 깨닫는 돈오(頓悟)의 진미(眞味)를 맛 볼 것이며

    이곳을 찾는 이는 빈손으로 와 실리(實利)를 거두어 갈 것이며

    기보(奇寶)와 기용(機用)은 뭇 마왕(魔王)을 몰아서 호법(護法)하는 선신(善神)을 만들고

    대지(大地)를 변화(變化)시켜 진불(眞佛)의 국토(國土)를 만드는데 있다.

     

     

     

     

     

     

     

     

     

     

     

     

     

     

     

     

    수바위(秀巖, 水巖) 이야기

     

    신라 제36대 혜공왕(惠恭王) 5년 진표율사가 769년에 창건한 화암사 남쪽 300m 지점에 위치한 수바위는

    화암사 창건자인 진표율사를 비롯한 이 절의 역대스님들이 수도장으로 사용하여 왔다.

    계란 모양의 바탕위에 왕관모양의 또다른 바위가 놓여 있는데 윗면에는 길이가 1m, 둘레길이 5m의 웅덩이가 있다.

    이 웅덩이에는 물이 항상 고여 있어, 가뭄을 당하면 웅덩이 물을 떠서 주위에 뿌리고 기우제를 올리면 비가 왔다고 전한다.

    이때문에 수바위 이름의 "수"자를 수(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바위의 생김이 뛰어나 빼어난 수(秀)자로 보는 사람이 많다.

    수바위의 전설을 보면 화암사는 민가와 멀리 떨어져 있어 스님들은 항상 시주를 구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절에 사는 두 스님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수바위에 조그만 구멍이 있으니,

    그 곳을 찾아 끼니 때마다 지팡이로 세번 흔들라고 말하였다.

    잠에서 깬 스님들은 아침 일찍 수바위로 달려가 꿈을 생각하며 노인이 시킨대로 했더니 두 사람분의 쌀이 쏱아져 나왔다.

    그후 두 스님은 식량 걱정없이 편안하게 불도에 열중하며 지낼수 있게 되었다.

    몇년이 지난 어느날 객승(客僧) 한 사람이 찾아와 이절 스님들은 시주를 받지않고도

    수바위에서 나오는 쌀로 걱정없이 지냈다는 사실을 알고 객승은 세 번 흔들어서 두사람분의 쌀이 나온다면

    여섯번 흔들면 네 사람분의 쌀이 나올것이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다음날 수바위로 달려가 지팡이를 넣고 여섯번 흔들었다.

    그러나 쌀이 나와야 할 구멍에서는 엉뚱하게도 피가 나오는 것이었다. 객승의 욕심탓에 산신(山神)의 노여움을 샀던 것이다.

    그후부터 수바위에서는 쌀이 나오지 않았다고 전한다.

     

     

     

     

     

     

     

     

     

     

     

     

     

    諸行無常 是生滅法(제행무상 시생멸법)

    모든 현상은 한시도 고정됨이 없이 변한다는 것이곧 생하고 멸하는 생멸의 법이니

     

    生滅滅已 寂滅爲樂(생멸멸이 적멸위락)

    이 생멸에 집착함을 놓으면곧 고요한 열반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초전법률이란

     

    부처님께서는 깨달으신 후 한동안 보리수 아래 머물고 삼매에 들어 깨달음의 내용이 심오하고 난해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더라도 이해되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하며 설하기를 주저하셨다.

    이때 범천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부처님께 중생을 위해 설법해 주실 것을 세번이나 간청하였다.

    마침내 부처님께서는 탐욕에 허덕이는 둥생을 지혜의 길로 이끌기 위해 진리의 수레바퀘를 굴리기로 결심하고 이렇게 선언 하신다.

     

    '감로의 문은 열렸다.

    귀 있는 자는 들어라.

    낡은 믿음을 버려라.

     

    부처님은 깨달음의 진리를 알 수 있는 사람으로 한 때 스승이었던

    알라라 탈라마와 웃다카 라마 풋다를 생각하였지만 이미 그들이 세상을 떠난 것을 아시고

    전에 함께 수행하던 다섯 수행자(콘단냐,마하나마,바수파,아슈바치트.바디야)를 찾아 녹야원으로 갔다.

    다섯 수행자는 멀리서 부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아는 체하지 않기로 하였으나,

    부처님께서 다가오자 그 위엄과 자비에 압도되어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절을 하고 자리를 권하였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서 중도와 사성제 팔정도를 내용으로 한 첫 설법을 시작하셨다.

    이것을 최초의 설법인 초전법륜(初傳法輪)이라 한다,설법과 대화,토론을 통해

    다섯 수행자 가운데 교진여(콘단냐)가 맨 먼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게 되고

    곧 나머지 수행자 모두 그 가르침을 이해하여 생사의 괴로움으로부터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러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이들이 부처님의 최초의 제자로 비구(比丘)의 시초이다.

     

    불기 2550년 4월 8일

     

     

     

     

    금강산 화암사 표석(金剛山 禾巖寺 標石)

     

    설악산 울산바위의 전설

     

    전설에 따르면 조물주가 금강산의 경관을 빼어나게 빚으려고 잘생긴 바위는 모두 금강산에 모이도록 불렀다.

    경상남도 울산에 있었던 큰바위도 그 말을 듣고 금강산으로 길을 떠났으나 워낙 덩치가 크고 몸이 무거워

    느림보 걸음걸이다 보니 설악산에 이르렀을 때 이미 금강산은 모두 빚어지고 말았다.

    울산바위는 그 한 많은 사연을 간직한 채 고향 울산으로 돌아갈 체면도 없어 설악산에 눌러앉고 말았다.

    한편 설악산 유람길에 나셨던 울산 고을의 원님이 울산바위에 얽힌 전설을 듣고

    신흥사 스님에게 울산 바위는 울산 고을의 소유이니 신흥사에서 그 차지한 대가(對價)로 셋돈을 내라고 하여

    해마다 세를 받아 갔는데 어느 해인가 신흥사의 동자승이 이제부터는 세를 줄 수 없으니 울산바위를 울산으로 옮기라고 하였다.

    이에 울산 고을 원님이 바위를 재로 꼰 새끼로 묶어 주면 가져가겠다고 하였더니

    자승은 청초호와 영랑호 사이에 많이 자라고 있는 풀(草)로 새끼를 꼬아

    울산바위를 동여매 새끼를 불에 태워 재로 꼰 새끼를 만들었다.

    그러자 울산 고을의 원님은 이 바위를 가져갈 수 없었으려니와 세를 내라는 말도 더는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있고부터 청초호와 영랑호 사이가 한자로 ‘묶을 속(束)’자와 ‘풀 초(草)’자를 써서 속초(束草)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위의 이야기들은 속초라는 한자 지명의 뜻을 풀과 묶음에서 찾고 있지만 모두 전설적일 뿐이며 그 이상일 수 없다.

     

     

     

    금강산 화암사 숲길 안내도

     

    금강산 화암사 숲길은 약 4.1km(약 2시간 소요)로 금강산 신선봉, 설악산 울산바위와

    푸른 동해를 함께 감상하면서 산림에서의 치유와 자연의 경이로움을 즐길 수 있는 숲길이다.

     

     

    화암사(禾岩寺)

     

    이 사찰은 769년(혜공왕 5년) 진표율사가 처음 건물을 짓고 화엄사(華嚴寺)라 하였다.

    1623년(인조 1년)에 소실되어 1625년(인조 3년)에 다시 지은 후에도 몇 차례의 소실과 중건이 거듭되었다.

    1912년 화암사(禾巖寺)로 이름을 고쳤고, 1915년 소실된 후 다시 지었으나 한국전쟁으로 다시 소실된 것을 그 후 법당만 다시 지었다.

    화암사 경내의 현재 건물들은 1991년 8월, 이곳 신평들에서 개최되었던

    제17회 세계잼버리대회의 개최준비를 위한 주변정비계획에 따라 기존 건물인 법당을 철거하고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경내에는 삼성각.미타암.법당.명부전.설법당.요사채.종각.금강누각.일주문 등의 건물이 조성되어 있다.

    사찰 입구에는 조선시대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부도 15기가 남아 있다.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14호(1990년 9월 7일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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