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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청 대성산 정취암(山靑 大聖山 淨趣庵)
    국내 나들이/사찰(寺刹), 불교(佛敎) 2015. 8. 21. 06:20

    산청 대성산 정취암(山靑 大聖山 淨趣庵)

     

    정취암(淨趣庵)은 경남 산청군 소재지에서 동남 방향 약 10km에 위치한

    대성산(大聖山, 일명:둔철산)의 기암절벽(奇巖絶壁) 사이에 자리한 사찰로

    그 상서(祥瑞)로운 기운이 가히 금강(金剛)에 버금한다 하여 옛 부터 소금강(小金剛)이라 일컬었다.

    신라 신문왕(新羅 神文王) 6년(丙戌, 서기 686년)에 동해에서 장육금신(丈六金身:부처님)이 솟아올라

    두 줄기 서광(瑞光)을 발하니 한줄기는 금강산(金剛山)을 비추고, 또 한줄기는 대성산(大聖山)을 비추었다.

    이때 의상조사(義湘祖師)께서 관(觀)해 보시고 두 줄기 서광을 쫓아 금강산에는

    원통암(圓通庵)을 세우고 대성산에는 정취사(正趣寺)를 창건하였다.

    정취암에 계시던 의상스님께서는 도리천(忉利天)의 길상천녀(吉祥天女)가 올리는 공양을 드셨는데,

    어느 날 원효대사(元曉大師)께서 방문하신 후부터 천공(天供) e,시는 것을 그만두셨다고 전(傳)한다.

    당시 정취사와 율곡사에 각기 주석하고 계시던 의상대사와 워효대사께서는 수시로 왕래하며

    수행력을 서로 점검하고 탁마 수행한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다.

     

    장취암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비롯한 조선중기 기록에는 정취사(正趣寺)로 사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조선후기에서 구한말(舊韓末) 사이에 조성된 불화(佛畵)에는 정취암(淨趣庵)으로 기록되어 있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취암(淨趣庵)은 정취관음보살(正趣觀音菩薩)을 번전불(本尊佛)로 봉안하고 있는 한국유일의 사찰이며,

    다른나라에서도 이 같은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정취보살상(正趣菩薩像)을 우리나라에 처음 모신 것은

    신라 헌겅왕(新羅 憲康王) 2년(戊寅, 858년) 굴산 범일선사(屈山 梵日禪師)가 낙산사에 봉안했었다.

    고려 고종(高麗 高宗) 41년(甲寅, 1254년)에 명주성(溟洲城)이 몽고병에 함락될 때 야별초(夜別抄) 10인과

    사노(寺奴)인 걸승(乞升)이 정취보살상을 땅속에 묻어 난을 무사히 피하게 되었다.

     

    그 후 기림사 주지(祇林寺 住持) 각유선사가 이 정취보살상은 국가의 신보(神寶)이니

    어부(御府:궁궐)에 모실 것을 왕에게 아뢰어 왕의 명을 받아 어부(御府)에 모시게 되었다.

    고려 공민왕(高麗 恭愍王) 3년(甲午, 1354년)에 화경(華敬), 경신(景信) 두 거사(居士)가 정취사(正趣寺)를 중건한 후

    어부(御府: 궁궐)에 봉안되어 있던 정취보살상(正趣菩薩像)을 정취사(正趣寺)로 이운(移運)하여 봉안(奉安)하게 되었다.

    또 이 무렵 설화로 전해지는 문가학과 정취암에 얽힌 구미호설화와 문가학의 역모사건은 당시 원나라를 추종하던 보수세력과

    공민왕을 따르던 개혁세력간의 갈등관계가 설화로 각색되어 전해지는 것으로 사료된다.

    이 같은 사건들은 정취사기 당시 공민왕의 개혁 의지를 실현하고

    원나라로 부터의 자주권을 회복하려는 개혁세력의 주요한 거점임을 말해주고 있다.

    정취암은 창건 이래 고승납자(高僧衲子)들의 요결처(了結處)가 되었으며,

    조계종 종정(曹溪宗 宗正)을 역임하신 고암 대종사(古岩 大宗師)께서도 한때 주석(主席)하시며 정진(精進)하였다.

     

    또한 수많은 선남선녀(善男善女)들이 정취관음보살(正趣觀音菩薩)의 가피력(加被力)으로

    보문속질행해탈(普聞速疾行解脫)을 성취하였으며, 정취관음보살께서 나투시는 최고의 성지(聖地)이다.

    그러나 무산살귀(無常殺鬼)를 그 무엇인들 막을 수 있으리요.

    조선 효종(朝鮮 孝宗) 3년 4월 26일(壬辰 서기 1652년) 화마(火魔)가 진동(震動)하여

    원통보전(圓通寶殿)을 비롯한 모든 전각(殿閣)이 전소(全燒)하였으며

    이때 정취보살상도 함께 소실(燒失)되어 창건 이래 가장 큰 비운(悲運)을 맞았다.

    당시 정취암에서 정진하던 봉성당 치헌선사(鳳城堂 致憲禪師)께서

    효종(孝宗) 4년(癸巳, 서기 1653년)에서 9년(戊戌, 서기 1658년) 사이에

    화주를 구하고 사재를 내어 중건하였는데

    현재의 목조관음보살좌상(정취관음보살상)은 효종 5년(甲午, 1654년)에 소실된 정취보살상을 재현하여 조성하였다고 전한다.

     

    봉성당 치헌선사(鳳城堂 致憲禪師)는 정취암(淨趣庵)의 중창조(重創祖)로 이후 평생을 정취암에 주석하시면서

    큰 법력으로 중생들을 안위(安爲)케 하였는데 지금까지도 그 가피의 명성이 전하여 지고 있다.

    선사의 생몰연대(生沒年代)는 전하여지지 않으나 입적(入寂)하신 기일(忌日)은

    음력 12월 20일로 기록되어 있어 이날을 개산일로 정하여 개산제를 봉행하고 있다.

     

    = 경상남도 산청군 신등면 둔철산로 675-87 (양전리) 대한불교조계종 정취암 =

     

     

     

     

     

     

     

     

     

     

     

     

     

     

     

     

     

     

     

     

     

     

     

     

     

     

     

     

     

     

     

     

     

     

     

     

     

     

     

     

     

     

     

     

     

     

     

     

     

     

     

    말을 위한 기도 (타고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수없이

    뿌려놓은 말의 씨들이

    어디서 어떻게 열매를 맺었을까?

    조용히 헤아려 볼 때가 있습니다

    무심코 뿌린 말의 씨라도

    그 어디선가 뿌리를 내렸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왠지 두렵습니다

    더러는 다른 이의 가슴속에서 좋은 열매를

    또는 언짢은 열매를 맺게 했을 언어의 나무

    하나의 말을 잘 탄생시키기 위하여

    먼저 침묵하는 지혜를 깨우치게 하소서

    헤프지 않으면서 풍부하고

    경박하지 않으면서 유쾌하고

    과장되지 않으면서 품위있는

    한마디의 말을 위해 때로는

    진통을 겪는 어둠의 순간을 이겨내게 하소서

    참으로 아름다운 언어의 집을 짓기 위하여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도를 닦는 마음으로 말을 하게 하소서

    언제나 진실되고 언제나 때에 맞고

    언제나 책임있는 말을 갈고 닦게 하소서

    좀더 겸손하고 좀더 분별있는 사랑을 하게 하소서

    나날이 깨어 있는 마음 새로운 마음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 언어의 집을 짓게 하소서.

     

     

     

     

     

     

    절암현정취(絶巖懸淨趣)

    산천일망통(山川一望通)

    만학백운기(萬壑白雲起)

    구문담진적(拘門淡塵跡)

     

    기암절벽에 매달린 정취암은

    산천이 한 눈에 다들어 오고

    골짜기에 흰 구름 펴오르는 곳

    문을 두드리면 세상에서 찌든 마음 맑게 씻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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