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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릉 선교장(江陵 船橋莊)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5. 12. 26. 03:12

    강릉 선교장(江陵 船橋莊)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에 있는 조선시대 사대부의 주택으로 오죽헌으로부터 동쪽으로 1.5㎞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주위가 시루봉에서 뻗어내린 부드러운 산줄기로 둘러싸여 있고, 가옥 앞으로는 얕은 내가 흐르며,

    멀리 안산(案山)과 조산(朝山)이 보이는 명당에 자리잡고 있다.

    효령대군의 11대손인 이내번(李乃蕃)이 집터를 잡은 후 사랑채인 열화당(悅話堂:1815)을 비롯하여

    활래정(活來亭:1816), 동·서별당 등이 후손들에 의해 지어졌다.

    6·25전쟁 이후 일부 건물이 유실되었으나 안채·사랑채·동별당·서별당·가묘·행랑채를 비롯하여

    정자까지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 사대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주택이다.

    집의 배치는 서남향이며 전면에 긴 행랑채가 있다.

    행랑채에는 중앙부와 동쪽 끝에 문이 있는데, 하나는 솟을대문이고 다른 하나는 평대문이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서별당과 사랑채인 열화당으로 통한다.

    열화당은 앞면 4칸, 옆면 3칸의 크기로 거의 일자형 평면이며, 조금 돌출된 작은 대청은 누마루형식을 취하고 있어 운치가 있다.

    특히 사랑채 앞쪽에 석양을 가리기 위해 차양을 가설했는데, 이것은 당시의 주택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구조이다.

    안채는 부엌·안방·대청·건넌방 순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방에는 반침이 딸려 있어 이불 등 살림도구를 넣어 둘 수 있다.

    동별당은 안채 부엌 앞에 'ㄱ'자형으로 위치하는데 주인이 가족과 함께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다.

    또한 행랑채 바깥 마당에는 넓은 방지(方池)를 파고, 못가에 정자인 활래정을 세웠다.

    방지(方池) 가운데에는 삼신선산(三神仙山)을 모방한 가산(假山)을 만들어 노송을 심었다.

    활래정은 연못 속에 돌기둥을 세우고 건물의 일부를 누마루로 만듦으로써 마치 물위에 떠있는 형상으로,

    주변의 풍경과 함께 선조들의 뛰어난 조형미와 조원(造園)기법을 엿볼 수 있다.

    (중요민속자료 제5호)

     

     

     

     

    강릉 선교장(江陵 船橋莊) "활래정(活來亭)"

     

     

    선교장(船橋莊) 정원의 인공 연못 가운데에 세워진 누각형식의 정자이며, 선교장(船橋莊)은 경포호수(鏡浦湖水)가

     

    현재와 같지 않고 그 둘레가 12km였을 때 배(船)를 타고 건너 다녔다고 하여 배다리(船橋)라는 택호를 가지고 있다.

     

    선교장은 17세기 초 효령대군 11대손 무경 이내번(李乃蕃)이 저동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이주하며 지은 집으로,

     

    집터가 머리를 닮아선교장(船橋莊)이라 이름 지었다.

     

    하늘이 족제비 무리를 통해 명당지금의 선교장 자리를 점지했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활래정(活來亭)은 겹처마 팔작 기와지붕의 형태로 방과 마루로 구성되었다.

     

    외부의 벽면이 모두 분합문의 띠살문으로 구성되어 있어 장지문을 지르면 한쪽은 온돌방이 되고, 다른 한쪽은 대청이 된다.

     

    활래정 외부는 전부 창호로 되어 있어 여름을 지내는 별당 건축임을 알 수 있으며 방지의 가운데는 노송이 있는 봉래선산이 있다.

     

    활래정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다실이 방과 누마루 사이에 있어 한국 건축양식을 잘 보여준다.

     

    활래정(活來亭)이란 이름은  주자의 시 관서유감(觀書有感) 중 “위유원두활수래(爲有源頭活水來)”에서 집자한 것으로

     

    “맑은 물은 근원으로부터 끊임없이 흐르는 물이 있기 때문”이라는 의미이다.

     

    활래정은 1967년 4월 18일 중요민속자료 제5-4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열화당(悅話堂)

     

    열화당은 남주인 전용의 사랑채로서 내번의 손자 후가 순조15년(1815)에 건립하였으며

    당호인 열화당은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悅親戚之情話)에서 따왔다고 한다.

    열화당은 3단의 장대석 위에 세워진 누각형식의 건물로 아주 운치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선교유거(仙嶠幽居)

     

    “선교유거(仙嶠幽居)”라는 현판이 걸린 솟을대문은 남자와 손님이 출입하는 선교장의 공식 대문이고,

    솟을대문이 없는 오른쪽의 평대문은 여자와 가족이 출입하는 대문이라고 한다.  

    선교유거(仙嶠幽居) 현판은 “신선이 거처하는 그윽한 집”이라는 뜻이다.

    이 현판글씨는 조선 말기 서예가인 소남(少南) 이희수(李喜秀,1836~1909)의 글씨다.

     

     

     

     

     

     

     

     

     

    강릉 선교장의 역사

     

    효령대군(세종대왕의 형)의 11대손인 가선대부(嘉善大夫) 무경(茂卿) 이내번(李乃蕃)에 의해 처음 지어져

    무려 10대에 이르도록 나날이 발전되어 증축 되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99칸의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상류주택으로서 1965년 국가지정 중요 민속자료 제 5호로 지정되어

    개인소유의 국가 문화재로서 그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300여년동안 그 원형이 잘 보존된 아름다운 전통가옥으로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미를 활달하게 포용하여

    조화를 이루고 돈후한 인정미를 지닌 후손들이 지금가지 거주하는 살아 숨쉬는 공간이다.

    따라서 한국의 유형 문화재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뿐 아니라 강릉문화를 대표하며

    경포 호수권의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에 전통문화 시범도시인 강릉시의 문화 관광 자원으로서 부각되었다.

    하늘이 족제비 무리를 통해 점지 했다는 명당터인 선교장은 300여년전 안채 주옥을 시작으로

    동별당, 서별당, 연지당, 외별당, 사랑채, 중사랑, 행랑채, 사당들이 지어졌고 큰대문을 비롯한

    12대문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대장원을 연상케 한다.

    입구에는 인공 연못을 파고 정자를 지어 활래정(活來亭)이라 이름을 짓고 연못과 함께

    경포호수의 경관을 바라보며 관동팔경 유람하는 조선의 선비와 풍류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만석꾼 곳간채에는 항상 곡식이 가득하여 흉년에는 창고를 열어 이웃에게 나누어주며 베푸는 집안의 표상이 되기도 하였다.

    예전에는 경포호수를 가로질러 배로 다리를 만들어 건너 다녔다하여 선교장 이라고 지어진 이름 이지만

    그 호수는 논이 되었고 대장원의 뒤 야산에 노송의 숲과 활래정의 연꽃 그리고 멀리보이는

    백두대간 사계절 변화의 모습을 바라보는 운치는 한국 제일이라고 하겠다.

    2000년을 기해 한국 방송공사에서 20세기 한국 TOP 10을 선정할 때

    한국 전통가옥 분야에서 한국최고의 전통가옥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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