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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연서원(龜淵書院)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6. 3. 15. 05:43

    구연서원(龜淵書院)


    1694년(숙종 20)에 지방 유림이 요수 신권(樂水 愼權)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신권이 제자를 가르치던 구주서당(龜州書堂) 자리에 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석곡 성팽년(石谷 成彭年)과 1808년 황고 신수이(黃皐 愼守彛)를 추가 배향(追享)하여,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에 훼철(毁撤)되었다.
    건물은 본당이 1945년에 소실되었던 것을 1946년에 재건하였고 후원에 구연사(龜淵祠)와 신문(神門)이 있으며

    앞으로는 정면에 관수루(觀水樓)가 있고 동편으로 전사청(典祀廳)과 관리사가 있으며,

    신권의 사적비와 신권을 위한 산고수장비(山高水長碑), 열녀, 효자비가 있다.

    춘향(春享)은 음력3월 말정(末丁)이고 추향(秋享)은 음력 9월 말정이다.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은하리길 100 (황산리)





    입구에 들어서면 요수신선생장수지지(樂水愼先生藏修之地)라고 써져 있는 문이 있다.
    요수신선생장수지지 라는 말은 요수 신권선생이 초야에 묻혀 수양하던 곳이라는 뜻이다.
    요수(樂水)는 신권(愼權 1501~1570)선생의 아호이다.
    요수(樂水)란 요산요수(樂山樂水)로 표현되는 공자사상의 핵심이다.
    요(樂)는 '좋아할 요'로서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하다' 라는 뜻이다.
    이 아호는 퇴계 이황선생이 지어준 것이다.





    구연서원앞 마당의 비석들


    신권의 사적비와 신권을 위한 산고수장비(山高水長碑)와 성팽년의 석곡성선생유적비(石谷成先生遺蹟碑),

    신수이의 황고신선생유적비(黃皐申先生遺蹟碑)


    산고수장(山高水長)이라고 새겨놓은 우뚝 솟은 커다란 비석은 요수 신권(樂水 愼權)선생의 공적비이며,

    요수선생의 학문과 덕이 산처럼 높고 물처럼 영원하다는 뜻을 담고 있는듯 하다.
    가운데는 석곡 성팽년(石谷 成彭年), 오른쪽은 황고 신수이(黃皐 愼守彛)선생의 공적비이다.
    이 세분의 학자들은 평생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제자를 양성했는데
    그 문하에서 두 정승과 일곱 명의 판서가 나왔다. 이 비석들은 그 문하생들이 스승을 존경하여 세운 것이라고 한다.









    구연서원(龜淵書院)의 현판(懸板)


    이 서원은 조선 중기 중종(1540) 때 요수(樂水)선생이 구연재(龜淵齋)란 서당을 세워

    제자들을 가르친 곳으로 숙종(1694) 때 구연서원으로 명명 되었다.










    배향인물

    주벽-신권(愼權, 1501~1573)

    조선 전기의 문인으로 호는 요수(樂水)이며 안음출신이다. 임득번(林得蕃)의 사위로 임훈(林薰)과 더불어 학문을 쌓았다.

    선생은 천성이 효성스럽고 덕이 많았다. 또 학문에 뜻이 깊어 널리 성현을 찾아 배웠다.

    과거 공부를 하였으나 중앙의 회시(會試)에는 뜻을 이루지 못해 관직에는 진출하지 못하였다.

    평생에 소학(小學)을 중요시하여 그 문도를 가르침에 반드시 소학으로 우선하였다.

    후진들에게는 퇴계와 일두선생을 종사(宗師)로 삼으라고 가르쳤다.

    공이 야담(夜潭)에 갈 때 천석(泉石)의 절승이 있어 그 귀에 집을 짓고 요수(樂水)라고 편액을 하고

    때때로 처형제인 임훈과 이정(李楨)이 모여 여러 날을 강의하며 토론하고 혹은 시를 짓고 소요하다가 세상을 마치니

    학자들이 일컫기를 요수선생이라고 하였다 한다.

     

    성팽년(成彭年, 1540~159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이옹(頤翁), 호는 석곡(石谷). 안음(安陰) 출신. 아버지는 교위(校尉) 한량(漢良)이다.

    임훈(林薰)의 문인이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유생으로 있었다.

    그러던 중 1569년(선조 2) 아버지가 죽자 학업을 그만두고 오직 어머니에게 효성을 다하였다.

    효행으로 천거받아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면(金沔)이 고령·거창·현풍 등 경상도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 때 정유명(鄭惟明) 등과 함께 안음에서 기병유사(起兵有司)로 창의문(倡義文)을 발통하는 등 김면의 참모가 되어 의병활동을 하였다.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고, 의약(醫藥)·복서(卜筮)·산경(山經)·지지(地誌) 등 유학 이외의 분야도 두루 섭렵하였다.

    지평에 추증되고, 안의(安義)의 구연사(龜淵祠)에 제향 되었으며, 저서로는 문집인 ≪석곡집≫이 있다.

     

    신수이(愼守彛, 1688~1768)

    자는 군서(君叙)이며 호는 황고(黃皐)이다.

    도백(道伯)이 선생의 학문이 독실하고 효행이 극진함을 수차 조정에 보고하여 동몽교관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셋째 아들 인명(認明)이 한림원의 시종관이 된 은전으로 통정대부의 품계에 오르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경기도 용인의 한천(寒泉)으로 도암 이재를 찾아 뵙고 몇 달 동안 같이 지내고 제자가 되었다.




    구연서원 관수루(龜淵書院 觀水樓)


    관수루(觀水樓)는 요수 신권(樂水 愼權), 석곡 성팽년(石谷 成彭年), 황고 신수이(黃皐 愼守彛) 선생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사림이 세운 구연서원의 문루로 1740년(영조 16년)에 건립하였다.

    관수(觀水)란 「맹자(孟子)」에 ‘물을 보는데(觀水)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의 흐름을 봐야한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다음으로 흐르지 않는다.’고 한 말을 인용한 것으로

    군자의 학문은 이와 같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름 지었다.

    누각은 일반적으로 군현의 관아 소재지의 경치가 수려한 곳에 세워서

    고을의 현감이나 중앙의 관리들이 일정한 날을 택해 인근 선비들을 불러 시회(詩會)나 연회를 열기도 하고,

    평소에는 고을 사람덜이 올라 쉬거나 더위를 피하는 장소로 이용하였다.

    따라서 누각은 고을을 상징하는 대표적 건물이 되기 때문에 사찰의 대웅전 앞이나

    향교와 서원의 입구에 세워 그 건물의 격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이 누각은 정면 세칸, 측면 두 칸에 계자난간 팔작지붕이고, 커다란 거북이 형상을 한 자연석 위에 세운 활주와

    일부러 휘어지고 굽어 용트림한 형태의 기둥이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거창지역 누각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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