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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세량리 화수재(和順 細良里 花樹齋)일상생활속에서/사람사는 현장 2016. 3. 27. 04:42
화순 세량리 화수재(和順 細良里 花樹齋)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전주 이씨 집성촌(全州 李氏 集姓村) 세량리(細良里).
전주 이씨 입향조인 이정윤(李廷允)과 이발세, 이익룡 등 3위를 향사하는 저존묘(著存廟)와 저존묘 재각인 숭유재,
이익룡의 재각인 화수재(花樹齋), 전주 이씨 입향 시조비, 춘토거사 전주 이공 유적비,
증 통정대부 사간원 사간 추정 선생 전주 이공 유허비 등이 있다.
이정윤(李廷允, 1576~1645)을 입향조로 하여 이어오는 화순읍 세량리의 전주 이씨 집성촌이다.
이정윤은 임진왜란 시 의병으로 나선 원종공신 이소종(李紹宗, 1554~1622)의 셋째 아들이다.
1597년(선조 30) 임진왜란이 끝난 후 화순군 동면 운산에서 화순군 화순읍 세량리 세량 마을로 입향하였다.
사간원 사간이 증직되었다.
이민신(李敏臣, 1593~1624)은 이소종의 손자로 이정식(李廷式, 1571~1635)의 아들이다.
증손자인 이중휘(李重輝, 1701~1775)가 장수하여 1867년(고종 4) 사복시 정에 증직되었다.
이시환(李時煥, 1623~1692)은 이민신의 아들로 호는 만은(晩隱)이다.
손자 이중휘(李重輝)가 장수하므로 1867년 종정경 겸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이운개(李雲開, 1668~1733)는 이시환의 아들로 호는 백미(白湄)이다.
아들 이중휘(李重輝)가 장수하여 수직을 받으므로 1867년 호조참판 동지의금부사에 증직되었다.
이중휘는 이운개의 아들이니 호는 매천(梅川)이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으며 집이 가난하였으나
아버지를 섬김에 맛있는 것이 빠지지 아니하였고 효경으로 섬겼다.
아버지 상을 당해서는 삼년을 묘 곁에 움막을 짓고 생활하여 효행으로 천거되어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이중경(李重慶, 1689~1752)은 이운개의 아들이며 호는 송계(松溪)이다. 1867년 부호군에 증직되었다.
이득창(李得昌, 1736~1815)은 이중휘의 아들이며 호는 임계(林溪)이다.
동몽교관을 지냈다. 이두현(李斗鉉, 1847~1923)은 이득창(李得昌)의 증손이며 이갑기(李甲基)의 아들이니 도정을 지냈다.
이태승(李泰承, 1854~1905)은 이득창의 현손이며 이문현(李文鉉, 1829~1887)의 아들로 호는 담헌(淡軒)이다.
집안을 다스릴 때 엄정하게 하고 몸가짐을 청렴하고 검소하게 하였으며
서가에 책을 가득 쌓아놓고 평생 동안 스스로 즐겨하였다.
1893년 참봉을 지냈다. 이태화(李泰和, 1869~1918)는 이득창의 현손이며 이옥현(李屋鉉, 1830~1878)의 아들이다.
장례원 부정을 지냈다.
이동현(李東鉉, 1847~1894)은 이중휘의 현손이며 이진기(李鎭基, 1818~1894)의 아들이다.
경전을 두루 섭렵하여 집안 다스리는 것은 효제로써 하고 몸가짐을 공경과 의리로써 하였고,
일찍이 말하기를 ‘말은 행할 것을 돌아보고, 행함에는 말을 돌아보니 내가 일생 동안 힘쓸 것이다’ 하고
자리 오른쪽에 걸어 놓았으며 또 「방심명(放心銘)」의 글을 구해다 걸어놓고 스스로 깨우쳤다.
세량리는 원래 샘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새암골이라 하던 것을 ‘새암골’이 ‘세양골’로 와전된 후 세량리로 한자 표기한 것이다.3688 '일상생활속에서 > 사람사는 현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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