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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자산 법흥사 (獅子山 法興寺)
    국내 나들이/사찰(寺刹), 불교(佛敎) 2016. 7. 1. 05:30

    사자산 법흥사(獅子山 法興寺)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 중의 한 곳으로서 대표적인 불교성지이다.

    신라 때 자장율사(慈藏律師)가 당나라 청량산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친견하고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眞身舍利)와 가사(袈裟)를 전수받아 643년에 귀국하였다.

    그 뒤 오대산 상원사(上院寺), 태백산 정암사(淨岩寺), 영축산 통도사(通度寺), 설악산 봉정암(鳳頂庵) 등에 사리를 봉안하고

    마지막으로 이 절을 창건하여 진신사리를 봉안하였으며, 사찰이름을 흥녕사(興寧寺)라 하였다.

    신라 말에 절중(折中)이 중창하여 선문구산(禪門九山) 중 사자산문(獅子山門)의 중심도량으로 삼았다.

    당시 헌강왕은 이 절을 중사성(中使省)에 예속시켜 사찰을 돌보게 하였다.

    그러나 891년(진성여왕 5) 병화로 소실되었고, 944년(혜종 1) 중건하였다.

    그 뒤 다시 불타서 천년 가까이 소찰로서 명맥만 이어오다가

    1902년에 비구니 대원각(大圓覺)이 몽감(夢感)에 의하여 중건하고 법흥사로 개칭하였다.

    1912년에 다시 화재로 소실된 뒤 1930년에 중건하였으며, 1931년의 산사태에 옛 사지 일부와 석탑이 유실되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적멸보궁을 비롯하여 대웅전·무설전(無說殿)·요사채 겸 공양실인 심우장(尋牛莊)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적멸보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으로 1939년에 중수하였으며, 법당 안에는 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있다.

    이 적멸보궁 좌측 뒤에는 자장율사가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수도하던 곳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토굴이 있고

    좌측에는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진신사리를 넣고 사자등에 싣고 왔다는 석함(石函)이 남아 있다.

    적멸보궁 뒤에는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3호인 영월 법흥사 부도가 있다.

    토굴은 낮은 언덕으로부터 내려오는 완만한 경사를 이용하여 흙으로 위를 덮었고, 봉토를 올리기 위하여 토굴 주변에 석축을 올렸다.

    내부구조로 보아 고려시대에 축조 또는 보수된 것으로 추정되며, 내부의 높이는 160㎝, 깊이 150㎝, 너비 190㎝이다.


    =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 

     



    일주문(一柱門)


    절을 찾을 때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문이 일주문이다.

    신성한 사찰로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로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법흥사의 일주문 기둥에는 코끼리와 거북이 형상으로 만들어졌는데 영원한 진리의 가르침으로서,

    중생을 제도하기를 발원하며 사자산문을 일으키라는 뜻으로 조성되었다.




    원음루(圓音樓)


    2층 누각으로 조성된 이곳은 부처님의 법을 전하는 사물인 법고(가죽걸친 짐승),

    운판(날 짐승과 허공을 떠도는 영혼), 목어(물 속에 사는 생명)가 있다.

    예불시간에 이 소리들을 법계에 울리는 뜻은 모든 중생들이

    고통을 여의고 깨달음의 진리와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는 의미이다.










    극락전(極樂殿)


    극락의 주불인 아미타불은 자기의 이상을 실현한 극락정토에서 늘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는데,

    이를 상징하는 극락전을 아미타전 또는 무량수전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협시보살로서 봉안되어있다.

    관세음보살은 지혜로 중생의 음성을 관하여 그들을 번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며,

    지장보살은 지혜의 광명으로 모든 중생을 비추어 끝없는 힘을 얻게 하는 보살이다.




    조사전


    조사전은 조사스님, 사찰의 창건주 그리고 고승대덕의 영정을 모시는 전각이다.

    사찰에 따라 국사전, 국사당, 영각, 조사각 등으로 부른다.

    특히 선종사찰에서는 한 종파를 개창한 조사스님과 그 사법(嗣法) 제자들은 그 사찰의 상징적 존재이기에 영정을 봉안한다.

    교종은 경전에 의거한 문헌적 해석을 중시하지만, 선종은 직관을 통한 실천수행을 강조하기에 스승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징효대사의 스승 철감국사는 전남 화순 쌍봉사에서 입적하여 그곳에 승탑을 모셨으며,

    그의 제자 징효대사는 사자산문을 크게 중흥시킨 후 스승 철감국사를 사자산문의 개창조로 모시어 세웠다.

    법흥사의 조사전내부에는 자장율사와 징효대사를 모셔놓았다.





    범종각(梵鐘閣)


    대종은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아침에 28번, 저녁에 33번을 치는데

    우리나라 종은 특히 소리가 아름답고 여운이 길다.

    종을 매단 부분을 용뉴라 하는데 용의 모양을 하고 있고, 종을 치는 나무는 당목이라 하여 물고기(고래)모양을 하고 있다.

    옛날에 바닷가에 용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포뢰용이라는 용이 잘울고 고래를 무서워했다.

    그 울음소리가 마치 종소리와 같았다고 해서 종 위에 용모양의 용뉴를 만들게 되었으며,

    고래를 무서워해 고래모양으로 나무를 깍아 종을 치게 되었다.






    삼성각(三聖閣)


    삼성 신앙은 불교가 우리 민중의 생활과 정신에 깊숙이 토착화됨을 말해주는 곳이다.

    칠성님 또는 칠원성군님, 독성님 또는 나반존자님(홀로 깨달아 아라한의 경지에 이름), 용왕대신(물의 신)님을 모신 곳이다.








    만다라전(曼陀羅殿)


    만다라는 티베트 불교인 밀교에서 발달한 우주 진리의 법신세계를 나타낸다.

    가는 모래로 색깔을 입혀서 그림으로 나타낸 불화라 할 수 있다.

    신성한 단에 부처와 보살을 배치하여 우주의 진리를 표현한다.

    원래는 ‘본질을 소유한 것’이라는 의미였으나, 밀교에서는 ‘깨달음의 경지를 도형화한 것’을 일컫는다.

    2003년 티베트 스님들이 법흥사 법회 때 만다라를 조성하였다.











    약사전(藥師殿)


    약사여래불은 중생의 병을 치료하고 수명을 연장하며 재화를 소멸하고

    의복,음식 등을 만족하게 하는 등의 12대 서원을 세운 부처님으로서 보신부처님이라고 한다.

    이곳은 보궁을 뒤로 하고 있고 앞으로는 구봉대산과 금강송들이 바라보이는 좋은 기운이 모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24시간 열린 법당으로서 언제나 기도할 수 있는 곳으로 개방하고 있다.

















    산신각(山神閣)


    산신은 ‘산의 신’이라고 하여 명산에는 그 산을 지키는 산신님들이 계시다.

    보통 호랑이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한다.

    본래 산신은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부터 믿던 민속신앙으로 생명을 악귀로부터 보호해 주시고,

    그 산 주변을 삿된 기운으로부터 보호해 주시는 수호신으로 전해지고 있다.

    법흥사는 타 사찰과 다르게 사자산,구봉대산,백덕산의 세 분의 산신님을 모시고 있는데,

    특히 백덕산 산신님은 여 산신님으로서 아주 영험하시다.








    법흥사(法興寺)의 창건 역사

    창건 설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년) 자장율사가 중국 종남산 운제사에 모셔져 있는

    문수보살상 앞에서 7일간의 기도정진 끝에 문수보살님을 친견하였다.

    문수보살님으로부터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가사, 발우를 전수받은 자장율사는 해동국 사자산 연화봉에 이르러

    적멸보궁을 세우고,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해 흥녕사(興寧寺)를 개창하였다.

    흥녕사라는 사찰 이름에는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가 번영하고 온 누리의 백성이 편안하길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실제로 법흥사는 신라, 고려, 조선, 대한민국으로 이어져오는 장구한 역사 동안 신음하는 대중을 외호하는 복전(福田)의 역할릉 해왔다.

    출가 전 벼슬자리를 맡으라는 왕의 소환을 받고도 “내 차라리 계를 지키다 하루를 살고 죽을지언정 권세를 누리면서 살기를 원치 않는다”라는

    말을 남긴 자장율사의 일화는 후학들에세 큰 귀감이 되고 있다.



    구산선문 중 하나인 사자선문


    서기 847년 신라 말 도윤 철감 국사가 중국 선종의 중흥조인 마조도일 선사로부터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선법(禪法)을 전수받아 사자산에 선문(禪門)을 여니,

    그 이름이 사자선문(獅子禪門)이다.

    사자선문은 우리나라 선종의 효시라 할 수 있는 구산선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도윤철감 국사의 제자 징효절중 국사에 이르러 사자선문은 더욱 사세가 번창하였다.

    882년 국통(國統) 위공이 당시 수도인 경주에서 가까운 곡산사 주지로 천거했으나 징효절중 국사는 번다함을 꺼려 이를 사양했다.

    징효절중 국사가 사자산을 수행처로 삼자 학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당시 사자선문에는 2천여 명의 납자들이 모여 일념으로 화두를 잡고 용맹정진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신라 헌강왕 때는 중서성에 귀속시켜 후원하는 사찰로 지정될 만큼 국가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웅장했던 사자선문도 질곡의 역사와 세태의 부침에 따라 중창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891년 병화로 소실된 것을 944년 중건했으나 또다시 화재로 전소되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수차례 중창을 반복해오다가 1902년 대원각 스님이 중건하고 사찰 이름을 법흥사로 개칭하였다.

    1933년 현재 위치로 사찰을 이전했다.




    적멸보궁 상량문 쓴 탄허 대종사


    적멸보궁 중수는 1939년 시작해 1946년 회향했다.

    당시 적멸보궁 중건 상량문을 올린이는 당대 최고의 선지식이었던 한암 대종사의 제자 탄허스님이다.

    탄허 스님이 적멸보궁 상량문을 쓴 것은 오대산 상원사에 입산한 지 5년 되던 해의 일이다.

    세납 27세에 노사숙유(老士宿儒)의 문장가도 짓기 어려운 명문을 남긴 것만 봐도 탄허 스님이 얼마나 유불선에 능통했는지 알 수 있다.

    1991년 탄허 대종사의 상좌인 법흥사 주지 삼보 스님이 17평 규모의 여법한 적멸보궁을 중창하였다.


     

    어영차, 동쪽으로 상량 올리니

    윤기 나는 만물이 봄바람에 젖누나

    하늘땅이 함게 하는 곳 알고자 하면

    그것은 내 마음, 한생각에 있노라

     

    어영차, 서쪽으로 상량 올리니

    여러 중생 머물 곳 절로 엄숙하다

    외화(外貨) 감추고 내실(內實)로 그렇게 살아가니

    몸과 마음 살피며 덕이 날로 높아간다

     

    어영차, 남쪽으로 상량 올리니

    만물은 넘실넘실 천지조화 가득하다

    늘어선 산등성이 아홉 신선 머리를 조아린 듯

    저절로 승속이 모두 찾아오네

     

    어영차, 북쪽으로 상량 올리니

    모든 조화 고요하여 찾을 수 없다

    생생(生生) 이치 이 가운데 있는 줄 누가 아는지

    참된 근원 끝내 길하여 쉼이 없어라

     

    어영차, 위쪽으로 상량 올리니

    우주는 툭 트여 해 달 별이 맑아라

    이 마음 본디 한 터럭 사사로움 없어

    원래 그 자체가 밝고 드넓어라

     

    어영차, 아래쪽으로 들보를 놓으니

    어지러운 세상 기나긴 밤과 같아라

    지극한 가르침 경전에 담겨 있으니

    힘써 공부하면 변화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나

     

    엎드려 바라오니 상량을 올린 뒤에

    법당의 모습은 영구히 새롭고

    부처님 가르침 크게 펼쳐지고

    법당의 큰 주춧돌 하늘땅과 함께하고

    대들보는 길이 반석이나 태산처럼 견고하여

    말세의 무너진 폐단을 구제하여

    길이 우리 불법을 보호하여 주소서.

     

    - 탄허 대종사의 적멸보궁 <상량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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