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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탈해왕 탄강유허(昔脫解王 誕降遺墟)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6. 7. 25. 05:11

    석탈해왕 탄강유허(昔脫解王 誕降遺墟)

     

    이 유허는 신라 제4대 탈해왕(脫解王)이 탄생한 곳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진한 아진포구(辰韓 阿珍浦口)라 하였다.

    그리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계림동하서지촌 아진포(雞林東下西知村 阿珍浦)라 하였다.

    탈해왕에 대한 전설로는 왜국에서 동북으로 천여리 떨어진 다파나국(多婆那國) 왕비가 잉태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하나 낳았는데, 이는 상스럽지 못한 일이라 하여 궤속에 알과 칠보(七寶)를 넣어

    바다에 띄워보내 인연 있는 땅에 도착하여 나라를 세우라고 기원하였다.

    이에 붉은 용(赤龍)이 나타나 호위하여 그 궤가 신라 땅에 와 닿자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는 노파가 발견하여 데려다 기르니 그가 탈해였다.

    유허비(遺墟碑)는 높이 130cm, 45cm, 두께 25cm로 용 모양의 비머리와 좌대는 없다.

    조선 현종(顯宗) 11(1845) 이종상(李鍾祥)이 이 비문을 지었으며,

    상량문(上樑文)1845년 한문건(韓文建)이 썼다.

    비각기(碑閣記)1847년 이시우(李時愚)가 기록(記錄)하였다.

    (경상북도기념물 제79호)

     

    = 경상북도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 538-1 =


     







    新羅昔氏脫解王誕降遺墟碑

     

    堯舜禹以天下禪朴昔金三姓以一國禪大小雖殊其禪受一

    也堯授舜舜授禹而上受下禪惟舜爲然然則昔氏其我東之

    有虞氏乎王諱脫解古無謚故又稱脫解王初辰韓六部無君

    長赫居世始建國號曰徐羅至于次次雄聞脫解賢妻以女將

    薨捨其子儒理而禪于脫解脫解不義惟王立儒理而輔之時

    百姓富樂儒理之沒國人以先君之命共推之脫解乃立以瓠

    公爲相又得閼智於始林閼智者雞林氏之祖也旣又禪于儒

    理之子婆娑歷四世脫解之孫伐休又立其後與鷄林氏迭相

    禪授昔氏凡八王而三姓享有徐羅千年之治此古史所謂三

    代之所未有者也按稗記草本婆那國王之子懷難七年乃生

    大卵王以爲不祥命棄之其盛以金匱浮之海乃泊于辰韓

    阿珍浦有媼開視卵脫而兒出遂養之是爲脫解王其泊也

    有鵲報故去鳥以爲姓云其說頗弔詭然玄鳥哉學者所考

    信而至以三姓言之始林之雞蘿井之馬皆是物也而又何疑

    焉 我有鮮當東周之會咸秩祀典赫居氏鷄林氏則皆立殿

    以崇奉而獨昔氏未之擧也盖有待焉若乃琢石遺墟以聳人

    觀瞻則此邦人責也而亦復闕齾王之後孫鍾浩周浩文浩等

    爲是之慨博采輿論就阿珍立穹碑一如蘿始兩井之爲問銘

    於余或人以王之諱脫解疑所以名其碑者余嘗思之以諱事

    神今也非古也脫解之曰脫解猶堯之曰堯舜之曰舜若諱之

    則非虞史例王之於堯舜其心法也同禪受也同雖書法亦不

    宜異同銘曰

    新羅昔脫解王誕降遺墟碑

    崇禎紀元後四乙巳將仕郞前 莊陵叅奉驪江李鍾祥謹撰

    通訓大夫前行司諫院正言文臣兼宣 傳官驪江李在立謹書

    成造都監英陽南至陽

    後孫 之憲之權

    斗浩瑀浩尹浩永浩

    應浩炳浩英浩

    成範致大致道

    致範振華之和致安

     


     









     

    하마비(下馬碑)

     

    옛날 말()이 최상의 교통수단이던 시절, 누구든지 성역인 이 비각을 지날 때에는

    말에서 내려 걸어서 지나 가라는 뜻을 새긴 비석임.

     

    - 1845년 현종왕께서 하사한 비석임 -

     


     

    신라석탈해왕탄강유허비(新羅昔脫解王誕降遺墟碑)




     

    바다를 건너온 석탈해(昔脫解)


    고귀한 인물이 비정상적으로 태어나 버림받았다가 시련을 거쳐 왕위에 올랐다는 점에서

    '영웅의 일생' 구조로 되어 있지만 다른 신화와는 달리 인물의 비범한 부각되지는 않는다.

    석탈해는 인간적인 꾀와 기지를 지녔을 뿐이다.
    석탈해는 스스로 대장장이임을 자처하고 있는데, 금속기(철기, 무기)를 만드는 대장장이는

    고대 사회에서 주술적인 신비력을 인정받아 제사장으로서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해석되며,

    한편으로 민족 지도자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신라 제4대 탈해왕(脫解王)의 탄생 신화이다.

    주인공이 인간이 낳은 알에서 출생하였다는 것과 버림을 받아 표류하는 시련을 겪는다는 것,

    자신의 지략으로 목적을 성취하는 것 등이 핵심적 화소(話素)이다.

    이러한 화소들은 같은 남방계 신화인 혁거세(赫居世)나 수로왕(首露王) 신화보다 오히려 북방계 주몽신화와 더 유사하다.

    또한 다른 개국 신화가 대부분 천손하강형(天孫下降型) 신화인데 비해,

    이 작품은 외지에서 배를 타고 들어온 도래(渡來)형 신화라는 점에서 연오랑 세오녀와도 유사하다.


     

    신라 땅 바다 건너에 용성국의 왕비는 7년 만에 아기를 갖게 되는데 사람이 아니라 커다란 알을 낳았습니다.

    신하를 모아놓고 의논한 끝에 사람이 알이 낳은 적이 없어 나쁜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알을 바다에 띄어 보냅니다.


     

     

    커다란 상자에 알과 보물 등 일곱가지 보물을 넣어 배를 떠나 보냈는데 배는 커다란 파도를 만났습니다.

    갑자기 어디선가 붉은 용이 나타나 파도를 가르며 물길을 열어주어 서라벌의 아진포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곳에 있던 고기잡이 할머니가 까치를 엄청나게 끌고온 배를 보고

    상자를 열어보니 단정하게 생긴 소년이 있었습니다.

    알에서 깨어난 아이라 해서 탈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릴적부터 남다른 재주와 대장장이 재능을 물려받아 영특하게 자란 석탈해는

    남해왕의 마음에도 들게되어 왕의 맏사위가 되었습니다.

    탈해는 철로 농기구를 만들어 백성들이 쉽게 농사짓도록 도와주었고,

    전쟁에 쓰이는 칼과 창을 만들어 나라를 지켰습니다.

    유리왕에 이어 탈해가 왕이되며 23년 동안 백성들을 편안하게 다스렸습니다.


     


    석탈해왕 탄강유허비(昔脫解王 誕降遺墟碑)

     

    () · () · ()는 천하를 선위하고, () · () · 김씨() 3성은 한 나라를 선위하여

    크고 작음에 있어서는 현격한 차이가 있지만 선위하고 받았다는 점에서는 같다.

    요임금은 순임금에게 주고 순임금은 우임금에게 주었으니 위에서 받아 아래로 선위한 사람은 오직 순임금뿐이었다.

    그러므로 석씨야말로 우리 동방의 순임금이 아니겠는가?

    왕의 이름은 탈해(脫解)인데, 옛날에는 시호가 없었기 때문에 탈해왕이라고 칭하였다.

    당초 진한(辰韓)6(六部)에 군장이 없었는데,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처음으로 나라를 건국하여 서라(徐羅)라고 칭하였다.

    차차웅(次次雄) 때 탈해가 현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딸과 결혼을 시켰는데,

    죽음에 임박하여 아들인 유리(儒理)를 두고 탈해에게 선위하였다.

    탈해는 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유리(儒理)를 왕으로 세우고 보필하여 백성들이 부강을 누리게 되었다.

    유리가 사망하자 나라 사람들은 선왕의 명이라는 이유로 탈해를 추대하여 왕으로 세웠다.

    호공(瓠公)을 재상으로 삼고 또 시림(始林 : 계림의 옛 이름)에서 알지(閼智)를 얻었다.

    알지는 계림씨(雞林氏 : 金氏)의 조상이다. 탈해는 세상을 떠나면서 유리의 아들 파사(婆娑)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4대 뒤에 탈해의 손자 대휴(伐休)가 또 왕위를 이었으니 계림씨와 번갈아가며 왕위를 물려주게 된 것이다.

    석씨는 모두 8명의 왕이 나왔고, 3성이 향유한 서라는 1000년 동안 다스려졌다.

    이는 옛 역사에서 말하는 3대에도 없었던 일이다.

    비에 새긴 기록을 보면 "왕은 본래 파나국(婆那國)의 왕자로 회임된 지 7년만에 큰 알로 태어났다.

    왕이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겨 버리라고 명하자 왕비가 금궤에 담아 바다에 띄웠는데,

    진한(辰韓)의 아진포(阿珍浦)에 정박하게 되었다.

    한 노파가 알 속에서 아이가 나오는 것을 보고는 데려다 길렀다.

    이 사람이 바로 탈해왕이다. 정박하고 있을 때 까치가 알렸으므로 작()에서 조()를 떼어내고 성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그 설명이 자못 괴이한 데에 이르러 까치가 끼어들었으나 학자들이 고증하고 믿는 바이며,

    3성을 들어 말하면 시림(始林)의 닭과 나정(蘿井)의 말은 모두 이런 동물이니 또 어떻게 의심하겠는가?

    우리 조선으로 말하면 동주(東周) 시대에 해당되므로 모두 차례로 제사를 지내는 법이 있어

    박혁거세와 김알지는 전각을 세워 존숭하여 봉안했는데, 유독 석씨만 아직 거행하지 못했다.

    시기가 따로 있었던 것이다.

    돌을 쪼아 유허에 세워 사람들이 존경하며 바라보게 하는 것이야말로 나라의 책임이었으나 다시 여전히 누락되었다.

    왕의 후손 석종호(昔鍾浩석주호(昔浩周석문호(昔文浩) 등이 이것을 개탄스럽게 생각하고는

    여론을 널리 채택하여 아진(阿珍)에 큰 비석을 세웠는데,

    나정(蘿井시림(始林)과 똑같이 하기 위해 내게 명문(銘文)을 부탁했다.

    왕의 이름이 탈해인데 그것을 비의 이름으로 하는 데 대해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해 본 바로는, 죽은 사람의 이름을 피하여 신을 섬기는 것은 지금의 일이지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탈해를 탈해라고 하는 것은 요임금을 요임금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은 사람의 이름을 피하는 것은

    우사(虞史)의 전례가 아니다. 왕은 요순(堯舜)에 대해 심법(心法)이 같고

    선위를 받은 것이 같으니 서법(書法) 역시 달라서는 안 될 것이다.

    ()하기를, 신라 석탈해왕이 탄강한 곳의 유허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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