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온달관광지
    국내 나들이/관광지(觀光地)로 2016. 8. 27. 06:00

    온달관광지(溫達觀光地)


    온달 관광지가 있는 영춘면 지역은 삼국시대에는 을아단현(乙阿旦縣)이라 불리웠던 고구려 영토로

    백산맥 죽령과 남한강을 경계로 고구려와 신라간의 치열했던 영토전쟁의 각축장으로 전해지고 있다.
    온달관광지를 중심으로 한 영춘면 지역 부근에는 부상병을 치료하고 간호한 지금의 군 야전병원과 같은 장소를 의미하는 군간(軍看)나루,

    온달장군의 묘로 추정되는 고구려 적석총 형태의 태장이 묘(太將:큰 장군이라는 뜻), 휴식을 취하던 큰돌이 있는 휴석동(休石洞),

    포를 숨겨두었던 은포동(隱砲洞) 등 지금도 전쟁과 관련된 각종 지명과 다양한 삼국시대의 국경문화유적이 남아있는 지역이다.
    특히 온달장군이 쌓았다고 전해 내려오는 성산(成山) 위의 온달산성은 신라에게 빼앗긴 죽령 이북의 땅을 되찾기 위해

    신라와의 전쟁에 출정했던 고구려 온달장군이 온달산성 탈환의 전투에서 애석하게도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한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온달관광지는 이러한 고구려의 역사문화가 전해지고 있는 역사적인 소재와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사랑의 테마를 주제로 하는

    국민관광지 개발사업으로 단양군에서 1995년에 착공하여 1997년에 조성을 완료한 사업으로 총 3만평의 부지에

    고구려의 생활문화와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사랑을 재 조명하여 전시한 온달전시관, 온달장군 기마상, 온달과 평강 주제의 테마공원,

    미니 온달산성, 장승거리, 야외무대와 주차장, 매점 등 각종 편익시설이 설치되어 있으며

    관광지 서쪽 끝 지하에는 온달동굴이, 그 위의 산에는 온달산성이 위치해 있다.
    이러한 역사문화유적과 전해 내려오는 설화를 바탕으로 하여 지난 1996년도부터는 매년 10월 중에 이곳 온달관광지에서

    고구려 역사문화축제인 "온달문화축제"를, 온달장군 승전행렬 재현과 진혼제 등 문화행사를 중심으로 개최하고 있다.



    =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하리 147 =



































    온달장군(溫達將軍)


    ?∼590(영양왕 1년). 고구려시대의 장군.

    린 시절에는 집안이 몹시 가난해 눈먼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거리를 다니며 걸식을 하였다.

    그런데 용모가 파리하고 우스꽝스러워 사람들로부터 ‘바보 온달’이라고 불렸다.

    그러다가 어린 시절 울기를 잘해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을 보내야겠다던 평강왕(일명 평원왕: 平原王)의 놀림을 진실로 믿고

    온달과의 결합을 고집하다 쫓겨난 평강왕의 공주를 처로 맞아들이면서 가세가 펴지게 되고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고구려에는 매년 3월 3일 군신(君臣) 및 5부의 병사 등이 낙랑(樂浪)의 언덕에서 사냥한 노획물로

    천신(天神)과 산천신(山川神)에게 제사하는 국가적인 대제전이 있었다.

    온달은 여기에 공주가 기른 말을 타고 참여해 뛰어난 사냥 솜씨를 발휘해 왕의 감탄을 샀다.

    그 뒤, 북주(北周) 무제(武帝)군대의 요동 침입 때 고구려군의 선봉으로 북주군을 격퇴하는 대공을 세워

     비로소 국왕의 사위임을 공인받고 대형(大兄)이라는 관위를 받음으로써 점차 고구려 지배세력 내에서 두각을 드러내게 되었다.

    590년 영양왕이 즉위하자,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유역 탈환을 위한 군사의 출정에 자원해서 참전했으나

    아단성(阿旦城 : 지금의 峨嵯山城)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와 같이 ≪삼국사기≫에 전해지고 있는 온달의 일대기는 설화적인 색채를 강하게 지닌다.

    그러나 벽화고분을 제외하고는 고구려 자체의 자료가 거의 전해지지 않는 6세기단계의 고구려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서 여러 가지 각도에서의 검토가 요청된다.

    그의 출신은 고구려 최고지배세력에 속하지는 않았다고 생각되어 왕족과의 통혼권 밖에 존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그가 평강왕의 공주와 혼인할 수 있었고, 나아가 국왕의 측근세력으로서의 자기위치를 신장시켜나갈 수 있었다는 사실은,

    양원왕의 즉위를 둘러싼 고구려 귀족세력간의 다툼으로 인해 고구려 지배질서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온달설화>는 한낱 평민에서 부마에 오르고 무장으로 이름을 떨친 온달장군의 인물설화이며,

    역사상 실존인물을 다룬 역사설화라고도 할 수 있다.

    영웅전설의 일반적인 구조처럼 온달의 죽음으로써 이야기의 결말을 맺는다.바

    보온달로 구전되는 인물전설은 강화도 일대와 중부지방에서 주로 전승된다.

    그리고 갈등구조상 동일유형으로 파악되는 쫓겨난 딸과 숯구이 총각에 얽힌 민담은 전국적으로 분포한다.

    주제는 부녀간의 갈등을 통해서 부권중심의 전통적인 도덕률을 비판하고

    스스로의 독자적인 삶을 개척해나가는 여성의 주체의식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식은 여성 자체에 의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성취와 아버지의 인정에 의한 것이므로, 일정한 한계를 지니기도 한다.

    ≪삼국사기≫의 온달열전은 민간전승을 통해서 형성된 설화가 편찬자에 의해 다듬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구전되는 <바보온달전설>은 문헌에서 전하는 것과 거의 같으나,

    공주가 온달에게 글과 무예를 가르쳤다는 내용이 강조되어 나타난다.

    고소설 <온달전>의 줄거리도 이와 같으나 문학적 형상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열전에서보다 민중의식이 한층 두드러져 있다.

    갈등구조상 동일 유형인 민담에서는 세 딸을 둔 아버지와 자기 복에 먹고 산다고 해서

    쫓겨난 셋째 딸과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숯구이 총각이 등장한다.

    인물과 배경은 다르나 유형구조와 유형적 차원의 주제는 전설과 다름없다.

    화소들이 <무왕설화 武王說話>와 유사해 동일 유형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설화가 남녀간의 신분적 갈등을 다룬 것이라면, <온달설화>는 부녀간의 갈등을 다룬 것이다.

    사기와 설화를 바탕으로 창작된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King Lear>의 줄거리가 이와 비슷한 것을 보면,

    서구에도 이와 같은 유형의 설화가 전승되고 있는 것 같다.

    이 설화는 유기적인 대립구조로 형상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보온달과 울보공주에 대한 표면적 인식의 한계가 온달장군과 주체적 삶을 실현한 공주에 의해 극복됨으로써

    기존질서의 허위를 비판하고 근대적인 민중의식과 여성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당대의 설화문학이 가지는 민중적 미의식과 역사를 개척하려는 민중적 역사의식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단양의 온달이야기


    온달은 고구려시대(평원왕 ~ 영양왕)의 인물로 일반 평민의 신분을 탈피하여 평원왕의 딸인 평강공주와 결혼하였고,

    고구려의 대장군으로 각종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온달장군은 590년 접경지역인 죽령이북 전략지역을 확보하기 위하여,

    "죽령 이북의 우리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 출정하였으나,

    신라와 치열한 전투중 아단성(온달산성)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온달산성 주변의 마을은 온달장군과 관련된 지명을 갖고 있고,

    또한 대부분의 지명이 군사적 전술용어로 되어있어 온달장군 설화를 뒷받침하고 있다.
    온달공원 주변에는 고구려와 수.당시대 궁성을 재현한 드라마 촬영 세트장과,

    4억 5천만년의 신비스러움을 간직한 천연기념물 제261호인 온달동굴이 있으며,

    온달관에서 온달과 평강의 사랑 이야기를 엿본 후 가벼운 산행과 함께

    삼국시대 전통 기법으로 축성된 사적 제264호인 온달산성을 살펴볼 수 있다.








    온달관광지(溫達觀光地)


    온달관광지는 "온달 장군과 평강공주"의 아름다운 사랑을 테마로 국민관광지 개발사업으로

    단양군에서 1995년에 착공하여 1997년에 완료한 사업으로 3만평의 부지에 각종 역사유적보존사업과 관광편익시설을 조성하였다.
    온달동굴이 있는 이곳에서 돌계단을 올라 매점을 지난 지점에서 우측산길로 900m(왕복 1시간) 가량 오르면

    사적 제264호로 지정된 온달산성이 자리하고 있다.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인 온달장군이 쌓았다고 전해 내려오는 성산(成山)위의 온달산성은 남한강을 굽어보는 요새지역에

    퇴뫼식 내외협축방식으로 축조된 전형적인 고구려식 산성으로 성 둘레는 685m(1,523척), 높이는 5m(11척)이며,

    남문과 북문에는 고구려 산성의 특징인 치성(稚城)이 있다.
    1992년의 산성 발굴조사 과정에서 삼국시대의 기와조각과 토기편, 창 등 많은 유물들이 출토가 되었다.

    온달장군은 신라에게 빼앗긴 이 곳 고구려 땅을 회복하기 위한 전투를 하다가

    온달산성 아래에서 애석하게도신라군의 화살(流矢)에 맞아 전사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지역 단양군 영춘면 일대는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영토로 을아단현(乙阿旦縣)이라 불리웠으며,

    소백산맥 죽령(계립령)과 남한강을 경계로 신라왕의 영토전쟁이 치열했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