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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삼도수군통제영(統營三道水軍統制營) - 사적 제402호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7. 1. 25. 22:30
통영삼도수군통제영(統營三道水軍統制營) - 사적 제402호
통영 삼도수군 통제영은 조선 후기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3도의 수군을 통솔하는 해상 방어 총사령부의 터로,
1998년 2월 20일에 사적 제402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1603년(선조 36)에 경상남도 통영시 문화동에 세운 이후,
1895년(고종 32) 각 도의 병영과 수영이 없어질 때까지 292년간 그대로 유지되었으나,
일제 강점기를 거쳐 세병관을 제외한 건물이 대부분 사라진 상태이다.
통제영은 1593년(선조 16)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직제를 새로 만들어 전라좌수사에게 이를 겸임하게 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삼도수군통제영’으로 통칭되며, 약칭은 ‘통영(統營)’이다.
임진왜란 당시 초대 통제사로 제수된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의 한산 진영이 최초의 통제영이다.
정유재란으로 한산 진영이 폐허가 되자, 통제영은 전세에 따라 이리저리 떠돌아 다녔고,
전란이 끝난 뒤에도 거제도 오아포(烏兒浦), 고성현 춘원포(春元浦) 등지로 옮겨 다니며 제자리를 잡지 못하였다.
1603년(선조 36) 제6대 통제사 이경준(李慶濬)이 통제영을 두룡포(頭龍浦: 현 통영시 문화동)로 정한 이후,
터를 닦고 건물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1605년(선조 38) 음력 7월 14일에는 여황산 남쪽 기슭에 객사인 세병관(洗兵館), 백화당, 정해정 등을 세웠다.
이후 1678년(숙종 4) 제57대 통제사 윤천뢰(尹天賚)가 영문 주위의 산 능선을 따라
높이 1장 반(약 4.6m), 둘레 1만 1730자(약 3.6㎞), 성가퀴 707개 규모의 평산성(平山城)을 쌓았다.
그리하여 19세기 중엽의 통영성에는 4대문(大門)과 2암문(暗門) 그리고 3포루(鋪樓)가 있었고,
세병관을 위시하여 100여 개의 관아가 있었다.
그러나 1910년 일제에 강점된 뒤 세병관을 제외한 대·소 관아 100여 동의 건물들이 모두 헐렸고,
그 자리에 학교, 법원, 검찰, 세무서 등이 들어섰다.
1975년 이후에 세병관 및 주변 지역을 정비하고, 1996년 지표 조사를 실시하여 유구를 확인하였다.
통제영 건물 중 현존하는 것은 보물 제293호로 지정된 세병관 뿐이며, 1987년에 복원된 수항루(受降樓) 1동이 있다.
경상남도 통영시 세병로 27외(문화동)
망일루(望日樓)
광해군 3년(1611년) 제10대 우치적(禹致績) 통제사가 세운 통제영의 종루(鐘樓)이다.
그 뒤 영조 24년(1748년) 제112대 장태소(張泰紹) 통제사가 친제(親題)을 내렸으며,
제127대 이국현(李國賢) 통제사가 다시 지었다. 지과문 바로 앞에 있었다.
중영청(中營廳)
통제사의 아장(亞將)인 중군(中軍)이 있던 곳으로, 중군의 명령을 수행하는 곳이었다.
통제영의 폐쇄와 함께 철폐되었다.
아장(亞將)은 용호별장(龍虎別將), 도감중군(都監中軍), 병조참판(兵曹參判),
금위중군(禁衛中軍), 어영중군(御營中軍) 등 무관 계통의 통칭이다.
통제영(統制營)의 객사(客舍), 세병관(洗兵館) - 국보 제305호
세병관은 통제영(統制營)의 객사(客舍)로 제6대 통제사 이경준(李慶濬)이 이곳에 통제영을 옮겨온 이듬해인 1605년에 처음 세웠다.
제35대 통제사 김응해(金應海, 1588~1666)가 1646년 규모를 크게하여 다시 지었으며,
제194대 통제사 채동건(蔡東健)이 1872년에 다시 고쳐 지은 것이다. 정
면 9칸, 측면 5칸의 9량 구조 단층 팔각집으로 경복궁 경회루(국보 제224호), 여수 진남관(국보 제304호)과 더불어
지금 남아 있는 조선시대 건축물 가운데 바닥면적이 가장 넓은 건물 중 하나이다.
장대석 기단, 50개의 민흘림기둥, 2익공 양식에 벽체나 창호도 없이 통칸으로 트여 있으며,
질박하면서도 웅장한 위용이 통제영의 기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우물마루(짧은 널빤지를 마루의 귀틀에 끼워서 '井'자 모양으로 만든 마루)에
연등천장(삿갓 천장의 하나, 서까래 사이의 개판 또는 앙토 밑이 그대로 치장이 되게한 천장)을 시설한 것이나,
안쪽의 중앙 3칸만은 한단을 올려 전패단(殿牌壇)을 만들고
상부를 소란반자(틀을 '井' 자 모양으로 짜고, 네모진 구명에 넓은 널빤지를 덮은 반자)로 꾸민 후
3면에 분합문을 두어 위계를 달리하였다.
세병이란 만하세병(挽河洗兵)에서 따 온 말로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는다”는 뜻이다.
세병관(洗兵館)이라 크게 써서 걸어 놓은 현판은 제137대 통제사 서유대(徐有大)가 쓴 글씨이다.
수항루(受降樓)
임진란의 승전을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숙종 3년(1677년) 제57대 윤천뢰(尹天賚) 통제사가 건립하고,
그 후 숙종 23년(1697년) 제74대 이홍술(李弘述) 통제사가 재건하였으나
숙종 25년(1699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중건하였다.
영조 31년(1755년) 제117대 이장오(李章吾) 통제사가 확장시켰다.
수항루는 지금의 한일은행 근처에 위치하였고, 수항루 앞마당을 병선(兵船)마당이라고 불렀는데,
그 후 춘추 군점(軍點=수조)때에 모의 왜병으로부터 항복 받는 행사를 거행하여 왔다.
1986년 수항루가 있던 자리에 표석(標石)을 세웠다.
산성청(山城廳)
숙종 34년(1708년) 제82대 오중주(吳重周) 통제사가 건립했다. 산성군이 있던 곳.
통제사비군(統制使碑群)
통제사비석군은 역대 통제사(統制使)들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이 시내 일원에 흩어져 있던 것을현 위치에 모아서 동향(東向)으로 나란히 세워 놓은 것을 말한다.
이 통제사비석군은 통제사가 부임하여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 후에 이 지방 군(軍), 관(官), 민(民)이 세운 일종의 송덕비인데,표제(表題)도 송덕비(頌德碑), 추사비(追思碑), 거사비(去思碑), 사적비(事蹟碑), 불망비(不忘碑),
타루비(墮淚碑), 유애비(遺愛碑), 선정비(善政碑) 등으로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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