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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조대왕이 잠시 쉬던 행궁,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7. 2. 14. 05:06

    정조대왕이 잠시 쉬던 행궁,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

     

     

     

     

     

     

     

     

     

     

     

     

     

    주교사지(舟橋司址)

     

    주교사는 임금이 행차할 깨 한강에 부교(浮橋)를 넣는 일과

    전라도와 충청도 지방의 조운(漕運)을 맡아 보던 조선시대의 관아이다.

    정조 13년(1789년)에 설치 되었으며 고종 19년(1882년)에 폐지된 후 업무가 금위영(禁衛營)에 이관되었다.

     

     

     

     

    노량주교도섭도(鷺梁舟橋渡涉圖) - 화성행행도팔첩병(華城行幸圖八疊屛)

     

    '화성행행도팔첩병'의 마지막 폭으로서 1795년 윤 216일 노량진(鷺梁津)의 주교(舟橋)를 건너며

    서울로 환궁하는 정조와 혜경궁의 행렬장면을 용산 쪽에서 바라보고 묘사한 것이다.

    멀리 남쪽의 노량진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 뒤로 하고 혜경궁의 화려한 가마가

    지금 한강을 가로지른 거대한 주교의 한 가운데 홍살문을 막 통과하고 있다.  

    그리고 그 뒤로 산선(傘扇) 시위(侍衛)에 겹겹이 둘러싸인 정조의 좌마(座馬)가 뒤따르는데,

    조선시대의 기록화가 대개 그러하듯 정조는 감히 묘사하지 못하고 말만 묘사하는 상징적 기법을 사용하였다.

    용양봉저정의 행궁 앞 홍살문 뒤에는 군주쌍교(郡主雙轎)가 막 길을 돌아 다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36척의 교배선(橋排船)240쌍의 난간, 3개의 홍살문, 그리고 수많은 상풍기(相風旗)군기(軍旗)가 펄럭이는

    거대하고 화려한 주교가 긴 병풍의 화면을 실로 효과적으로 활용하며 전개되어 화면 전체를 압도하고 있다.

    이 주교는 기왕의 부교(浮橋)에 위험성과 번거로움이 많았기 때문에 1789년 정조가 새로이 고안 설치하며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이 주교는 한편으로 정조의 지혜(智慧)와 애민(愛民)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의궤에 이'주교도(舟橋圖)'가 강조되어 그려진 것도 이 때문인데,

    이 그림은 여기에 화려한 행렬을 첨가하여 완성함으로써 이제 정조의 효성(孝誠)까지 담고 있다.

    이 병풍의 8폭 중에 환어장면이 2폭에 걸쳐 그려진 것도 주교가 시각적 효과도 좋지만

    이처럼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주교의 앞뒤로 끝이 없는 수행행렬은 장대한 주교를 더욱 강조해 준다.

    그리고 주변에 구경나온 많은 사람들은 이 그림을 더욱 풍부하고 다양하게 꾸며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생생한 풍속화의 성격을 부여해 주고 있다.

    아울러 주교의 인물과 주변의 경치가 분리되지 않고 적절히 연결되며 조화되도록 만드는 놀라운 조형적 작용도 발휘하고 있다.

    여기에 다시 주교가 뒤로 갈수록 좁아지고 주교 뒤편의 정조는 다리 앞의 백성들보다도 작을 정도로

    엄격한 초점투시법을 적용하여 묘사함으로써 화면전체가 더욱 생생한 현장감을 얻고 있다.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

     

    이 정자는 정조(正祖) 때 배다리(舟橋, 주교)로 한강을 건너는 전후에 휴식을 하는 주정소(晝停所)였다.

    이후. 여러 왕들도 이곳을 이용하였다. "용양봉저정기에는 1789(정조13) 망해정(望海亭)을 구입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후 다시 지은 것인지 이름만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으로 바꾸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정조가 이곳에서 주위를 살펴보고 "북쪽의 우뚝한 산과 흘러드는 한강의 모습이 마치 용이 굼틀굼틀하고

    봉이 나는 것같아 억만년 가는 국가의 기반을 의미하는 듯 하다."라며 "용양봉저정"으로 이름 지었다.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2칸이며 내부는 마루와 온돌방으로 꾸몄다.

    당시 주변에는 배다리를 관장하는 관아건물이 몇채 있었으나 모두 없어졌고,

    이 정자도 한때는 음식점으로 쓰일 정도로 훼손되었다.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에 실린 "주교도(舟橋圖)"에는 당시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조선시대에 임금이 한강 남쪽으로 거둥(擧動)할 때는 용주(龍舟)를 타고 건넜다.

    이 때문에 선창(船艙)을 만들기 위해 배를 동원해야 했으므로 뱃사람들이 큰 고통을 겪었다.

    생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소 현륭원(顯隆園, 지금의 융릉)을 수원으로 옮긴 정조는

    한강의 흐름이 원만한 노량나루에 배다리를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정조는 강을 쉽게 건널 수 있었고 백성의 고통도 줄어들었다.

     

     

     

    정조대왕이 잠시 쉬던 행궁,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은 동작구 본동 10-30번지인 한강대교 남쪽 노량진 수원지 건너편 언덕에 북향하여 자리잡고 있다.

    정조 13(1789)에 공사를 시작하여 2년 후에 완공한 건물로 정조가 수원 화산(華山)에 있는

    아버지 장조(莊祖, 思悼世子)의 무덤인 현륭원(顯隆園)에 참배하러 갈 때,

    지금 한강의 노들강에 배다리(舟橋, 주교)를 설치하고 건너가 잠시 쉬는 행궁(行宮)으로 쓰던 곳이다.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이란 용이 뛰놀고 봉이 높이 난다라는 뜻이다

     

    이 정자는 일반 누정(樓亭) 건축과 마찬가지로 언덕 위에 북향하여 자리잡아

    경관이 수려한 한강을 내려보도록 지은 점은 비슷하지만,

    단순히 풍류를 즐기며 심신을 수양하려는 목적으로 지은 것이 아니고

    정조가 수원 화산에 가는 도중에 마음을 가다듬고 휴식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한강변의 다른 많은 정자들처럼 이 정자를 노래로 표현한 글이 없음도 이러한 사실을 반영한다.

     

    원래 사도세자의 무덤인 영우원(永祐園)은 지금 전농동 서울시립대학교 뒷산인 배봉산(拜峰山)에 있었다.

    정조는 부왕의 무덤을 정조 13(1789) 11월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고쳐 불렀다.

    그리고 이곳 화산 아래에 있던 수원 관아와 민가를 지금의 수원으로 이주시키고

    화성(華城)을 건설하면서 행궁을 다시 크게 고쳐지었다.

    정조가 화산에 행차하던 당시의 모습은 화성능행도병(華城陵行圖屛)에 그려져 남아있다

     

    이곳은 정조가 잠시 휴식을 취하며 점심을 들었기(晝食) 때문에 주정소(晝停所)라고도 칭하였으며,

    당시에는 주교(舟橋) 가설을 담당하는 주교사(舟橋司)와 주교대장(舟橋大將)도 두었다

    주교사가 맡아보던 배다리는 관()의 것과 개인 소유의 배, 큰 것 80척과 작은 것 400500척을 징발하여

    한강을 건너지르게 한 다음 그 위에 긴 널판 1천여 장을 깔고, 양쪽 가에는 난간을 설치하여 만들었다.

    난간에는 깃대를 쭉 꽂고 배다리 양쪽 끝과 중앙에는 홍살문(紅箭門)을 세웠는데,

    화성능행도병의 그림을 보면 도강 행차는 장관을 이루는 성대한 행렬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주교사는 고종 19(1882) 폐지되었다.

     

    당초 이 건물에는 정문과 누정(樓亭) 등 두 세 채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다.

    이 건물터는 선조 때 우의정 이양원(李陽元)의 별서였으며 고종때 유길준(兪吉濬)에게 하사되었다.

    그 후 1930년 일본인 이께다(池田)의 손에 들어가면서 건물 일부를 철거하고 부근 5,300여 평에

    온천, 욕장, 운동장, 식당 등을 두어 오락장으로 삼고 그 이름도 용봉정(龍鳳亭)으로 고쳐졌다.

    광복과 함께 이곳을 국유로 환원하여 오락시설을 철거하고 원래의 이름으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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