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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원 광한루원(南原 廣寒樓苑) - 명승 제33호
    국내 나들이/명승(名勝) 2017. 3. 22. 04:18

    남원 광한루원(南原 廣寒樓苑) - 명승 제33호
















    광한루원 방장정(廣寒樓苑 方丈亭)


    삼신산(三神山)의 영주(瀛洲, 한라산), 봉래(逢萊, 금강산), 방장(方丈, 지리산) 중방장에 위치하고 있는

    방장정(方丈亭)은 건축양식보다는 소박한 멋을 살린 아담한 모습을 하고 있다.
    방장은 전라감사 송강 정철이 삼신도(三神島)를 조성함에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방장정이 세워진 시기는 1963년부터 시작된 광한루원 확장 정화계획에 따라

    당시 남원군수 이화익의 창안으로 도편수 이한봉이 건축하였다.

    그 모습을 보면 기단부는 형성되어 있지 않고 원형의 가공초석 위에

    복석형태의 화강석을 얹고 위에 기둥과 귀틀을 세워 장마루를 깔았다.

    또한 누난간은 설치되지 않고 다소 높은 듯한 기둥위에 계두, 양서, 수서 등을 걸치고

    주심도리를 높게 설치하였으나 칸사이가 좁은 관계로 화반은 설치 하지 않은 듯하다.

    천장은 육각형의 소란대를 걸쳐 우물반자를 설치하였고 연목과 부연을 둔 겹처마를 형성하고 있으며

    단청은 기둥머리부터 금모로 단청을 하였다.
    규모: 8.37㎡ (1칸 6자 6각 모정),  건립시기: 1964년 12월 31일 준공
                



    광한루원 완월정(廣寒樓苑 玩月亭)


    옛날 옥황상제가 계신 옥경(玉京)에는 광한전이 있으며,

    그 아래 오작교와 은하수가 굽이치고 아름다운 선녀들이 계관의 절경 속에서 즐겼다는 전설이 있다.

    이 전설에 따라 광한루(廣寒樓)는 천상의 광한전을 재현한 것이며,

    완월정은 지상인이 달나라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 지은 누각이다.
    완월(玩月)이란 달을 완상(玩賞)한다는 뜻으로 음력 8월을 달리 부르는 말이다.
    완월정(玩月亭)은 1971년 신축한 수중누각으로 호두각집이라는 형식으로

    죄인을 건물 앞에 대령시키고 돌출된 부분에서 심문하는 격으로 한것 위엄을 살린 정자이다.
    남원팔경중의 "광한추월" 의 전경을 실질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광한루원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누각이다.







    광한루(廣寒樓) - 보물 제281호


    이 건물은 조선조 초기의 재상이었던 1419년 황희(黃喜)가 남원에 유배되었을 때 누각을 짓고 광통루(廣通樓)라 하였다.

    그 후 1434년 세종 16년에 남원부사 민여공이 중수하고 당시 충청 전라 경상 삼도 순찰사였던

    하동부원군 정인지가 이 누에 올라 경관을 감상하다가 “오호라 호남에서 가장 뛰어난 경관은,

    나의 고향의 경승을 감상하게 되면 나의 고향보다 나은 곳이 없고,

    더욱이 이곳 광한루보다 나은 곳이 없더라 '용성지(龍城誌)'고 했다.

    또 일설에는 "호남의 승경으로 달나라에 있는 궁전 광한청허지부가 바로

    이곳이 아니던가"하고 감탄하여 그 후 광한루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건물은 1597년 정유재란으로 인해 불타고 현재의 건물은

    1626년 당시 남원부사인 신감(申鑑)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광한루의 앞뒤에는 ‘호남제일루(湖南第一樓), 계관(桂觀), ’광한루(廣寒樓)란 편액이 걸려있다.

    호남제일루라는 말 그대로 호남에서 제일가는 누각이라는 뜻이며, 광한과 청허부는 하늘나라 월궁의 옥경에 들어서면

     ‘광한 청허지부’가 있다는 신화적 전설을 상징하고, 계관은 달나라의 계수나무 신궁을 상징한다.

    광한루 누각에 걸린 여러 편액중 광한루란 편액은 신익성이 호남제일루와 계관의 편액은

    1855년 남원부사 이상억이 누각을 중수하면서 손수 써 걸었다.

    이 중 계관의 편액은 동학란 때 없어진 것을 1930년대 광한루를 대대적으로 보수할 때 남원유지 강대형이 다시 써 건 것이다.

    또한 현재 광한루에 걸린 광한루란 편액은 전민의원 조정훈이 쓴 글씨라고 하는데

    금암봉의 금수정과 용성관의 편액 글씨도 썼다고 전해온다.

    1879년 광한루가 차츰 북쪽으로 기울어져 이를 방지하기 위해 루의 북쪽에 다락(월랑)을 세워 층층대를 만들어 놓았다.

    북쪽의 층층대는 1877년(고종14년)에 부임한 남원부사 이용준이 광한루가 퇴락하여

    본관 전체가 북쪽으로 기울어져 무너질 우려가 있어

    수지면 고평리에 사는 추(秋) 대목의 묘안을 받아들여 북쪽에 누를 오르내리는 계단을 만들되 본관과 같이

    아름드리 기둥을 세워 튼튼하게 고정시켜 본관의 기울음을 바로 잡고 외관으로도 더 화려하게 하였다.

    이는 우연하게도 누각 건축사상 큰 의의를 가지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나라 누각에 월랑을 가설하게 된 시초이며

    이전까지는 누상을 오르내리는 사다리만 설치하였다.

    월랑은 상하 2층으로 되어 있는데 하층은 5단, 상층 5단의 층층계단이 있고 양측 난간에는 칸살을 설치하였으며

    현관 옥상의 자그마한 지붕은 본관의 높고 큰 지붕과 조화를 이루어 누각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해준다.

    기단은 막돌바른층 쌓기의 낮은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그 위에 원형의 돌 기둥을 세우고

    2층 나루부분에는 나무기둥을 세웠으며 2층 누마루 주위에는 계자 난간을 둘렀고 기둥 사이에는

    모두 분합문의 들창을 달아 사방이 모두 개방되게 하여 북쪽으로 교룡산,

    남쪽으로 금암봉이 멀리는 지리산 노고단과 반야봉이 보인다.

    기둥 위에는 주두를 얹고 기둥머리부터 소 혀바닥 모양을 하나 내고 위에 행공첨차를 놓아 외출목을 구성하고

    다시 위에 우설을 내어 이익공과 비슷한 주심포건물을 만들었으며 창방과 주심도리 사이에는 화반을 끼웠다.

    가구는 칠량으로 대들보를 전면의 평주와 내진의 평주위에 걸고 보위에 동자주를 세워 종량을 받치며

    종량위에 조각된 일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연목 및 부연이 있는 겹처마이고 건물 네귀의 춘설에는 활주를 받쳤다.

    누의 뒤쪽에는 익랑식(翼廊式)으로 월랑(月廊)이라는 누에 오르는 층계를 만들었고

    그 구조의 익공식으로 창방위에 코끼리, 자라와 토끼 등 동물모양의 화반을 놓았다.

    누의 뒤쪽으로 연달아 낸 익루는 정면 3칸, 측면2칸의 익루(翼樓)로

    1795년(정조19, 부사 이만길 중수시)에 마련되었다고 하는데

    3면에는 퇴로를 둘러 개방하였고 그 안쪽으로 정면 2칸,

    측면 1칸의 온돌방용 아궁이와 굴뚝이 사방을 쌓은 고막이 벽체에 나있다.

    남원지(1960년) 및 증보 남원지(1972년, 조성교)등에는

    1925년 보수공사 때 만들어진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판단하기 어렵다.

    광한루가 다른 누각과 비교할 수 없는 점은 조선후기 문예부흥기라 불리 우는 영정조시대에

    창작활동이 활발하여 판소리계 소설 <춘향전>의 무대이며 국악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주지의 사실이다.




     

    광한루원 영주각(廣寒樓苑 瀛洲閣)


    영주각은 광한루원내 신성사상 배경의 정원으로 가꾸기 위해 축조된 상징적 누각으로서

     "용성지"에 누정편에 보면 "전라관찰사 정철이 요천에서 끌어 온 물이 누앞을 좁다랗게 흐르고 있던 개울을 넓혀서 평호로 하고

    은하수를 상징케 했으며 주위를 석축으로 하고 호중에 세 개의 섬을 만들어 하나에는 녹죽을 심고,

    하나에는 백일홍을 심었으며 다른 하나에는 연정을 세우고 호중에 여러 종류의 꽃을 가득 심었다."고 되어 있다.


    이 문헌에 따르면 영주각은 관찰사 정철이 주도한 광한루 확장 공사시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이때는 한주섬(漢州)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현재의 영주각은 정조 19년(1795)에 부사 이만길이 재건하고

    영주각(瀛洲閣)이란 편액을 손수 써서 걸었다고 "증보 남원지"에 기록되어 있다.
    그 후 1963년부터 경내가 확장, 정화되면서 1965년에 제36회 춘향제를 준비하면서 지금과 같은 단청이 되었다.
    영주각은 규모 36.02㎡로 정면3칸, 측면2칸 겹처마 팔작지붕의 단층 누각 형태로

    기단부는 화강석 장대석을 정밀 가공하지 않고 설치했으나 부분적으로 자연미도 보인다.

    1층 하부의 석주는 화강석으로 일정하지 않은 방형으로 가공해서 초석받침위에 세웠고

    초석위로 장귀틀과 동귀틀을 끼워 우물마루를 설치하였고 초석 위에 흠을 파서 귀틀장선을 끼웠다.

    상층 우물마루에는 누간을 두지 않고 기둥에 흠을 파서 여모중방을 끼우고

    머름을 낮게 설치하였으며 후면에 목조계단 5단을 설치하였다.

    기둥 위에는 주두를 얹고 기둥머리부터 양서를 하나 내고 위에 쇠서를 구성하여 이익공의 형태를 만들었으며

    창방과 주심도리 사이에는 화반을 끼웠고 주심도리와 주두에는 첨자를 끼웠다.
    가구는 5량으로 대들보를 외진 기둥 주두위에 얹고 보위에 동자주를 세워

    종량을 받치며 종량위에는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천정은 연등천정으로 연목과 부연이 있는 겹처마이고 건물 네 귀의 추녀에는 활주를 받쳤고

    기둥머리 이하에는 석간주 가칠하였고 상부는 모로 단청으로 마감되었다.

    용성지 누정조에는 1582년(선조15년) 전라감사 정철이 삼신산을 만들때 한주섬에 연정을 세웠다고 했으나,

    증보 남원지(1972년) 누정조에는 1795년(정조 19년) 남원부사 이만길 중수하고,

    영주각 편액을 손수 써서 걸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영주각은 1582년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광한루원 춘향사당(廣寒樓苑 春香祠堂)


    열녀 춘향의 굳은 절개를 영원히 흠모하기 위해서 1931년 건립된 사당이며,

    입구 대문은 "임 향한 일편단심"을 줄여 "단심문(丹心門)"이라 부른다.

    사당의 중앙에는 "열녀춘향사(烈女春香祠)"라는 현판이 있고, 안에는 춘향의 영정이 안치되어 있으며,

    이 사당에서 축원을빌면 백년가약(百年佳約)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참배객이 늘고 있다.
    춘향사당 안의 최초 영정은 진주사람 강주수가 그려 기증하고 1939년 가을, 이당 김은호가 그린 영정을 나란히 봉안하였으나

    6.25중에 훼손되어 1961년 기증받은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린 춘향의 영정이 현재까지 봉안되고 있다.
    이러한 춘향사당은 1931년 일제강점기에 남원의 유지들이 주축이 되어 권번의 기생들과 힘을 합하여

    민족의식 고취와 춘향의 절개를 이어받고자 설립하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해마다 5월5일에는 춘향제가 성대히 열린다.













     

    남원 광한루원(南原 廣寒樓苑) - 명승 제33호


    광한루원은 우리나라 4대 누각의 하나인 광한루와 더불어 하늘의 옥황상제가 살던 궁전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를

    지상에 건설한 인간이 신선이 되고픈 이상향으로 월궁의 광한청허부와 같다하여 얻어진 이름이다..


    시인묵객들은 궁궐에는 경회루(慶會樓)가 있고, 지방에는 광한루와 더불어

    평양의 부벽루(浮碧樓), 진주 촉석루(矗石樓), 밀양 영남루(嶺南樓)와 더불어

    우리나라 4대 누각이라 불려지는데 그 중 으뜸은 광한루라 했다.

    경회루는 궁궐의 건물로 황실에서 지은 곳이며 지방의 누각 중 평양의 부벽루는 애석하게도 아직은 가볼 수 없는 곳이고,

    진주 촉석루는 안타깝게도 6ㆍ25 때 불에 타 지금의 건물은 1960년 5월경 복원한 것으로 복원 역사가 짧으며,

    밀양의 영남루 역시 1844년에 지어 복원 역사가 길지 않다.


    그러나 광한루는 1419년에 지어 1597년 정유재란 때 불탔으나

    1626년에 복원한 건물로 복원 역사 면에서도 단연 으뜸이다.

    광한루원은 경복궁 경회루의 지원과 전남 담양군에 있는 양산보가 조성한 소쇄원(瀟灑園)과 함께

    한국의 경원을 대표할 만큼 우수하며 독특한 조경양식이 탄생하는 모체가 되고 있다.
    정원의 사상적, 역사적 배경은 자연적 사고방식 즉, 신선사상과 음양오행사상,

    풍수지리사상 또는 수심양성의 도로 표현되는 송, 죽, 국, 매의 사절과 유교의 선비사상이다.

    그중에서도 신선사상이 가장 크다고 불 수 있으며 이러한 신선정원의 양식은

    생성시기인 조선시대의 제도적인 원인에 기인하여 유교문화가 지방으로 분산되면서 형성되었다.


    옛적 우리 조상들은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조성에 세심한 배려를 하여

    신선이 사는 이상향을 이 땅에 건립하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생각은 분합문을 달아 열어놓고 지내어 건물이 탁 트이게 처리하였다.

    또한 누원 앞에 호수는 은하를 상징하도록 하여 하늘의 옥황상제가 사는 곳처럼 꾸며서

    월궁의 광한청허부와 같다고 한 광한루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정원은 인공적인 멋을 가리지 않고 토양 구릉을 자연 그대로 살렸으며,

    드문드문 자연석 고인돌을 구릉에 그대로 놓아 작은 언덕 공간처럼 하고,

    정원수도 전지를 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 자라도록 하여 흡사 숲속에 있는 착각이 들게 한다.

    이러한 연유로 건축기술과 사회상, 생활, 이상향 등 당시의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명승지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현재의 누원 모습은 누원 근처 시장이 불타고 옮긴 것을 비롯하여

    수차례 확장 사업을 하면서 차례로 근처의 부지를 매입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광한루원(廣寒樓苑)은 근세 전기에 조영된 대표적인 정원으로 꼽히고 있는데

    한국의 독특한 조경양식이 탄생하는데 모체가 되고 있으며 정원을 대표할 수 있을 만큼

    질적으로 우수하고 통시대적 문학사에 나타난 정원양식을 표현하고 있어

    전통예술을 계승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


    광한루원 앞에는 동서 100m, 남북 59m에 이르는 정방형의 호수와 호수 속의 3개의 섬(삼신산),

    그리고 서편에 4개의 홍예로 구성된 오작교로 구성되어 있다.

    오작교는 평교지만 교각의 형태가 원형으로 된 홍예교로 누정원을 구성하는 구성물의 일부로 처리되어 있는데

    직선적이고 평탄한 노면에 율동감을 주어 경관의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요소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호수에 직녀가 베를 짤 때 베틀을 고이는 돌인 지기석을 넣고 견우가 은하수를 건널 때 쓰는 배인

    상한사를 띄워 칠월 칠석의 전설의 은하수와 오작교를 상징한다.
    호수는 현재 상태에서 1:2의 비를 갖는 장방형으로 축조되어 있으며


    그 안에 3개의 섬이 동서방향으로 거의 같은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호수 북쪽 광한루 앞에는 돌 자라가 동남방향으로 향해 놓여 있어 신선사상에 입각한 지킴이의 기능을 갖고 있어

    전체적으로 광한루원의 구성은 넓은 은하세계, 즉 천체우주를 상징하고 있다.


    전라북도 남원시 요천로 1447 (천거동) 광한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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