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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봉길의사가 성장한 집(생가) - 저한당(抯韓堂)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8. 2. 6. 05:30

    윤봉길의사가 성장한 집(생가) - 저한당(抯韓堂)

     

    이곳은 매헌 윤봉길의사(梅軒 尹奉吉義士)께서 부친 윤황()을 따라

    1911년 봄(4)에 이곳으로 이사하여 사시던 집이다.

    의사의 부친은 이집에서 32녀를 낳으니 슬하의 자녀가 모두 52녀였다.

    장남으로 태어난 의사께서는 자랄 때부터 동생들에 대한 우애가 각별하였고,

    선천적인 총명으로 신.구 학문을 이집에서 닦으셨다.
    1930년 봄 만주로 망명하기까지 온갖 민족운동을 펴시던 독립운동의 터전이다.

    의사께서 순국(殉國)하신 후 해방되는 날까지 말할 수 없는 왜경(倭警)의 탄압과 감시속에서 시달리던 집이기도 하다.
    의사의 유족(遺族)이 사적지(史蹟地)로 지정되던 19728월까지 이 집에서 살았고 1974년에 정부에서 중수하였다.

    '어려운 한국을 건져낼 집'이란 뜻으로 '저한당(抯韓堂)'이라 한다.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야학방(夜學房)

     

    이곳은 윤의사(尹義士)가 오치서숙(烏峙書塾)을 마치고 돌아와 문맹(文盲) 퇴치운동의 일환으로

    야학회(夜學會)와 농촌부흥운동(農村復興運動)을 처음 으로 시작한 방임.

     

     

     

     

     

    예산 윤봉길의사 유적(禮山 尹奉吉義士 遺蹟) 사적 제229

     

    윤봉길의사는 1908년에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도중도(島中島)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집은 광현당(光顯堂)이고, 성장한 집은 저한당(抯韓堂)이라 하였다.

    11세에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에 일본인 선생에 불만을 품고 자퇴하였다가

    13세에 한문공부를 시작하여 매곡 성주록 선생으로부터 매헌(梅軒)이라는 아호를 받았다.

    19세에 신문화 습득과 농촌부흥에 노력하여 농민독본(農民讀本)을 편찬하여 가르치고 월진회를 조직하였다.

    1930년에 일본 경찰의 탄압으로 집을 떠나 김구선생이 이끄는 독립운동 조직인 상해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었다.

    1932429일 일본 국왕의 생일인 천장절과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을 겸한 기념식장에서 폭탄을 던져

    상해 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을 비롯한 여러명의 일본인 수괴를 죽이거나 부상을 입혀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세계 여러 곳에 보여 주었다.

    의사는 현장에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같은 해 1219일 일본 삼소정공병(三小井工兵) 작업장에서

    총살형으로 장렬히 순국하였다.

    19721014일 사적 제229호로 지정된 예산 윤봉길의사 유적은

    의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충의사, 忠義祠)과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기념관,

    생가인 광현당(光顯堂)과 성장가인 저한당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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