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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장군 사당(金佐鎭將軍 祠堂)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8. 12. 12. 20:07
김좌진장군 사당(金佐鎭將軍 祠堂)
백야사정비(白冶祠庭碑)
"할 일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 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
중국 북만주 산시역 부근 정미소에서 공산당원이 쏜 흉탄을 맞고 운명하시기 직전 장군의 말씀 중에서
화룡문(和龍門)
와룡재(臥龍齋)
청산문(靑山門)
백야사(白冶祠)
김좌진 장군(金佐鎭 將軍)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1991년 생가지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세워진 사우(祠宇)이다.
건물은 한식목조 와가로 총 24.37평의 규모이다. 재실과 내삼문, 외삼문으로 구성된다.
재실은 김좌진 장군이 와룡천(臥龍川)에서 무예를 연마했다는 의미로 와룡재(臥龍齋)라고 지었고,
외삼문과 내삼문은 화룡현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하여 각각 화룡문(和龍門), 청산문(靑山門)이라고 지었다.
김좌진 장군은 구한말∼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로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이다.
충청남도 홍성(洪城)출신으로 청산리(靑山里) 80리 계곡에서 일본군 3,300여 명을 섬멸했다.
김좌진장군 사당(金佐鎭將軍 祠堂)
이 사당은 구국의 이념으로 혼신을 다하다 순국하신 백야 김좌진(白冶 金佐鎭, 1889∼1930) 장군의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고자
1997년부터 건립 사업을 추진해 오다가 생가에서 약 300m 떨어진 이 곳에 세우게 되었다.
장군은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1889년 음력 11월 24일에 김형규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남 다른 일을 하며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장군은 17세에 가노(家奴, 장군의 집 노비)들을 해방시키고
무상으로 땅을 나누어 주었으며, 80칸이나 되는 집을 학교 교사로 내어주고 장군 자신은 현재의 생가지로 이사하여 생활하였다.
장군의 집터는 지금까지도 갈산고등학교의 부지로 이용되고 있다.
또한 1907년에 호명학교(湖明學校)라는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신교육으로 구국 계몽운동을 실시하였고,
1920년에는 독립전쟁 사상 최대의 승리로 꼽히는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는 전승을 거두었으나
1930년 1월24일 공산주의자가 쏜 흉탄에 맞아 41세에 순국하였다.
이곳 사당에서는 매년 장군의 독립운동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추모대제를 지내고 있다.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산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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