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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 홍주읍성(洪城 洪州邑城) - 사적 제231호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8. 12. 13. 21:30
홍성 홍주읍성(洪城 洪州邑城) - 사적 제231호
홍화문(洪化門)
홍화문은 홍주성의 남문이다.
본래 홍주성은 4개의 관문으로 문이 있었으나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3문으로 바뀌었다.
1870년 고지도에는 남문의 존재가 확인된다.
이는 남문 주변에 송림을 만들어 풍수지리상 나쁜 기운을 막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 발굴을 통해 과거 남문의 형태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가 있는 성문으로 확인되었다.
홍성군은 2013년 12월 남문을 복원한 후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홍성의 앞날을 상징하는 ‘홍화문’으로 문의 이름을 정했다.
김좌진 장군 흉상(金佐鎭 將軍 胸像)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출신인 김좌진 장군(1889년~1930년)은
15세 때 집안의 노비(家奴)를 해방 하였으며, 논밭은 소작인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1907년 호명학교를 세웠으며, 1917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1920년 10월 만주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벌인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홍주읍성(洪州邑城)
홍주읍성은 1905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이에 반대한 의병들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곳으로 유명하다.
홍주성전투는 1906년에 의병장 민종식이 1,100여 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남포와 보령 등지에서 일본군을 습격하고 병기를 탈취한 뒤 홍주성을 점령한 전투를 가리킨다.
당시 홍주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덕산(예산)으로 퇴각했다가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의병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의병들 모두가 구국 일념으로 떨쳐나섰다고는 하지만 어찌 의기만으로 전투를 할 수 있겠는가?.
구식무기를 들고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맞아 싸우던 의병들은 3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결국 패하고 만다.
성은 함락 당하고, 의병 수백 명이 순절했다. 홍주의병 대부분은 양반이 아니었기에 제대로 된 이름조차 없었다.
그리고 의병이 치룬 단일 전투로는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기에 홍주성전투는 한말의병사에서 최고의 항쟁으로 평가된다.
뿐만 아니라 홍주성은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천주교도들을 구덩이에 몰아넣고 생매장시킨 순교성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홍주는 바다와 연해 있었기에 19세기 초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처음 전래되었을 때 전국에서 신자가 가장 많은 지역이었다.
당시 천주교도들은 배교를 강요당했으며 이를 거부한 신자들은 관아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고 처형당했다.
천주교도들을 구덩이에 넣고 흙으로 덮어 생매장한 곳은 홍주성 북문 밖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교수형에 처해진 천주교도의 시신을 매장한 곳도 북문 인근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홍주성 순교자는 211명에 이르며, 무명 순교자를 포함하면 실제 순교자 수는 1천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지금 성내에는 순교한 천주교도들의 넋을 기리는 ‘신앙증거터’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순례를 하는 대표적인 순교성지이다.
홍주아문(洪州衙門) - 사적 제231호
홍주아문은 홍주 관아의 외삼문으로서 홍주목사였던 한응필이 홍주성을 보수할 때 만들어 세웠으며,
우리나라의 아문들 가운데 가장 크고 특이한 형태를 갖고 있다.
홍주아문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라고 전한다.
당초 홍주아문 안에는 열칸 반짜리 규모의 내삼문과 문의 양 옆으로 행랑을 길게 이어서 담장을 대신했던 관아가 있었다.
그런데 3.1운동 당시 홍성의 만세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홍주성에 진주한 일본군이 군청을 병영으로 삼고 내삼문을 헐어버렸다.
그 이후 행랑은 보수하지 못해 결국 무너져버렸으며 오직 바깥 출입문인 홍주아문만 남게 되었다.
홍주아문은 조선시대 관아의 구조와 형태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사적이다.
사적 제231호 홍주성지(洪州城址)
홍주성 토성 유적
홍주성 역사관의 남쪽 구릉진 언덕은 2006년 의병공원 부지 발굴 결과 토성으로 밝혀졌다.
이 토성은 둘레가 약 500m로 추전된다.
홍성(당시 운주)을 엿사책에 처음 알려지게 한 홍규(긍준)가 터를 잡고 살았던 곳으로 보인다.
사찰 부재
조선 초기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하면서 많은 사찰의 토지와 노비가 몰수되었다.
또한 사찰 건물과 탑을 부수고 거기서 나오는 부재들을 관아 건물과 유교 시설을 짓는데 사용했다.
홍주성 주변의 사찰 부재들도 홍주성 관아와 성벽을 쌓을 때 사용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홍주성벽 곳곳에 에 사용된 탑의 몸돌과 여러 가지 사찰 관련 부재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홍주성 내 잔디밭에 일부의 사찰 부재를 모아놓았다.
홍성 홍주읍성(洪城 洪州邑城) - 사적 제231호
최초 축성 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 시대 백월산 중턱에 위치했던 해풍현이 현재 위치로 옮겼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때 성을 축조한 것으로 추측되며 규모는 1,300척의 토성으로 400개의 성첩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그 후 여러 차례 보수 확장을 하였고 조선시대 고종 7년(1870년) 홍주목사 한응필이 연금봉 3천냥과 원납급,
지세부과금으로 석성을 개축하여 1,830척에 560척을 증보하여 석축 하면서 650개의 첩과 130개의 치,
2개의 곡성(曲城), 4곳의 우물과 연못을 신설한 다음 동서에 수문을 두어 서문천의 물을 끌어 동편 수문을 거쳐
남문천과 금마천으로 흐르게 하고 동서북에 문을 세우고 남문은 문루가 없는 홍예문(虹霓門)으로 하였다.
같은 해 흥선대원군이 휘호한 문액(文額)을 받았는데 동문은 조양문(朝陽門),
서문은 경의문(景義門), 북문은 망화문(望華門)이라 하였다.
그 후 홍성지방 일본인들이 서문과 북문을 훼철하고 성곽 곳곳을 철거하면서
동문마저 훼철하려던 것을 읍민들의 강경한 반대로 보존하였다.
홍주읍성은 최장 1,772m에 달하였으나 810m만 현존하며 성내에는 관아건물이 35동에 이르렀으나
조양문, 홍주아문, 안회당(동헌), 여하정 만이 남아있다.
1978년 10월 7일 강도 5의 지진이 발생하여 성곽의 일부가 붕괴된 것을 계기로
성곽 주변 가옥 64동 철거와 토지를 매입하여 주변정비 및 성곽을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홍성군에서는 홍주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홍주읍성의 복원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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