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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독립문(사적 제32호)과 서울 영은문 주초(사적 제33호)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9. 3. 14. 04:30
서울 독립문(사적 제32호)과 서울 영은문 주초(사적 제33호)
서울 독립문 - 사적 제32호
독립문(獨立門)은 1897년에 자주 독립의 결의를 다짐하기 위해 세운 석조물이다.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세웠는데,
1979년 성산대로 공사로 인해 북서쪽으로 70m이전하여 현재의 위치에 있게 되었다.
독립협회가 주도하여 국왕의 동의를 얻고 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받아서 완성하였다.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러시아인 사바틴이 설계하고 한국인 심의석이 시공하였다.
화강암으로 쌓았고 높이는 14.28m 너비는 11.4m이다.
가운데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있고, 문 안쪽의 왼쪽에는 정상으로 통하는 돌계단이 있으며, 정상에는 돌난간이 둘러져 있다.
이맛돌에는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오얏꽃 무늬를 새겼다.
문의 정면과 뒷면에 있는 현관석에는 각각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을 새기고, 그 좌우에는 태극기를 새겼다.
서울 영은문 주초 - 사적 제33호
영은문 주초(迎恩門 柱礎)는 모화관(慕華館)의 정문인 영은문의 기둥을 받쳤던 초석(礎石)이다.
태종 7년(1407)에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모하루(慕華樓)를 지었고,
세종 12년(4130)에는 모화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홍살문을 세웠다.
중종 31년(1536)에 격이 낮은 홍살문을 없애고 청기와를 덮은 영조문(迎詔門)을 만들었으며, 3년 뒤에 이름을 영은문이라고 고쳤다.
철거되기 전 영은문 사진을 보면, 현재의 초석 위에 원기둥을 세우고 다포로 공포를 짜 올린 뒤 우진각 지붕을 덮은 모습이었다.
독립협회를 설립한 서재필(徐裁弼; 1866~1951)은 사대외교의 상징인 영은문을 철거하고 독립문(獨立門)을 지을 것을 주장했다.
그의 의견에 따라 1896년에 모화관을 수리하여 독립관으로 하고, 영은문을 없앤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독립문 앞쪽에 있던 초석은 1934년에 약간 남쪽으로 옮겼다가 1979년 성산대로를 만들면서 독립문과 함께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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