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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 '황악산 직지사(黃嶽山 直指寺)'
    국내 나들이/사찰(寺刹), 불교(佛敎) 2019. 4. 23. 04:30

    동국제일가람(東國第一伽藍) '황악산 직지사(黃嶽山 直指寺)'



    일주문(一柱門)


    직지사 사적에 따르면 3(三門)2(二樓)가 있었다고 되어있는데 삼문의 첫 번째가 일주문이다.

    고려시대에 건립된 이후 여러차례 중수를 거친 일주문은 다른 이름으로 자하문(紫霞門)으로도 불리며,

    사천왕문, 천불전과 함께 임란의 병화를 모면한 3동의 건물 중 하나이다.

    "黃岳山直指寺(황악산직지사)"라는 현판 글씨는 송설체로 유명한 원나라 조맹부(趙孟頫)의 필체로 알려져 있다.

    일주문이란 기둥이 일렬로 서있어서 옆에서 보면 하나의 기둥으로 보인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직지사 일주문의 기둥은 천년묵은 싸리나무와 칡으로 세웠다고 전해진다.

    이 문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하나, ()에 있다.

    불교에서는 우주만유를 일심(一心)으로 보고 있으며 화엄경에 일체유심조(一體唯心造)라 하여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하였다.

    이 문을 들어설 때 일심에 귀의한다는 결심을 가지도록 마음을 촉진시키는데 그 뜻이 있다.

    또 한가지는 부처님의 첫 번째 설법인 중도(중용)이다.

    기둥이 하나인 일주문이 한쪽으로 조금만 기울어도 넘어지기 때문에 일주문을 사찰의 입구에 세워서

    중생들이 이 문을 드나들며 중도의 마음을 가지라는 메시지를 주는 것.

    일주문을 기준으로 승()과 속()의 경계가 이루어지며, 세간과 출세간, 생사윤회의 중생계와 열반의 불국토로 나누어진다

    그래서 일주문에 사찰명을 적은 현판을 걸어서 사찰의 대문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직지사 금강문(直指寺 金剛門)


    금강역사를 좌우로 모시는 금강문이다.

    금강역사는 불교의 수호신으로 사찰의 문 양쪽을 지키는 수문신장(守門神將)의 역할을 하며 인왕역사(仁王力士)라고도 한다.

    이 신은 여래의 온갖 비밀스러운 사적을 알고 있으며 5백야차를 거느리고 불법과 진리를 수호한다

    문의 왼쪽에는 밀적금강(密迹金剛), 오른쪽에는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이 있었는데 지금은 비어있다.

    나라연금강은 입을 크게 열고 ~“!”~하는 소리를 내면서 공격적인 자세를 취한다.

    그래서 나라연금강을 아금강역사 라고도 하는데 ~“”~라는 것은 범어(인도의 산스크리티어)의 첫글자이다.

    나라연금강은 천상계의 역사로 그 힘의 세기가 코끼리의 백만 배가 된다고 한다.

     

    밀적금강~“!”~하는 소리를 내고 입을 굳게 다문 채 방어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어 훔금강역사 라고 부른다

    ~“”~은 범어의 마지막 글자이다. 밀적금강은 손에 금강저(金剛杵)라는 무기를 가지고 항상 부처님을 호위하는 야차신으로,

    부처님의 비밀한 사적을 들으려는 서원을 세웠으므로 밀적이라고 한다.

    그래서 두 금강역사의 입은 시작과 끝을 연결하는 영원과 통일, 완성을 상징한다.

    또한 이들의 머리 뒤에는 커다란 원형의 두광(頭光)이 있다.

    이는 이들이 단순히 힘센 이가 아니라 신성한 지혜를 고루 갖추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직지사 금강문에 얽힌 전설

    옛날 떠돌이 승려가 있었는데 경남 합천에 들렀다가 한 마을 촌장의 딸인 노처녀와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하였는데

    아내는 스님 남편이 도망칠까봐 장삼을 깊숙이 감추어 두었는데,

    아들을 낳고 삼년이 지나서 도망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장삼을 내주었더니

    남편이 도망갔고 전국을 수소문 하던중 직지사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직지사를 찾았다가

    남편을 만나기 직전에 지금의 금강문 있는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고 말았다고 한다.

    이후부터 매년 부인이 죽은날이 되면 직지사 스님들이 한사람씩 불려 나가 부인이 죽은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갔고

    절에서 부인의 원귀를 위로하고자 그 옆에 사당을 지어 해마다 제사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몇 년후에 고승 한분이 직지사를 찾았다가 사찰내에 사당이 웬말이냐고 나무라서 지난 날의 자초지정을 얘기 했더니

    "그렇다면 사당 대신에 금강역사를 모신 금강문을 지어 원귀를 막아라"고 해서 금강문이 세워졌다고 한다.   






    천왕문(天王門)


    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기 위해 동서남북의 네 방위를 지키는 사천왕을 모신 문으로

    원래 사천왕은 고대인도의 바라문교에서 숭상하던 신들이었으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감명을 받아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천왕문은 사찰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이 일주문에서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은 후에

    이곳에서 다시한번 자신의 마음을 점검하라는 뜻이 담겨있는 공간이며 중생들이 불이(不二)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도록 격려한다.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

    증장천왕은 수미산 남쪽 유리타에 살면서 남방세계를 수호한다. 자신의 위덕을 증장시켜 만물을 소생시키는 덕을 베푼다.

    오른손에는 용을 잡고 있으며 왼손에는 여의주를 쥐고 있다.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

    광목천왕은 수미산 서쪽 백운타에 살고 있으면서 서방세계를 수호한다.

    악인에게 고통을 주어 구도심을 일으키게 한다.

    오른손에는 창을 들고 왼손에는 탑을 들고 있다.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

    다문천왕은 수미산 북쪽 수정타에 살고 있으며 북방 세계를 수호한다.

    언제나 부처님의 설법을 잘 듣는다고 하여 다문이라 하며 어둠속에서 방황하는 중생을 구제한다.

     양손에 비파를 들고 있다.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

    지국천왕은 수미산 동쪽에 살면서 동방세계를 수호한다.

    착한이 에게는 복을, 악한이 에게는 벌을 주면서 인간을 고루 보살피고 국토를 수호한다.

    오른손에는 칼을 쥐고 있다.

     



    사명대사와 천왕문앞 돌에 얽힌 일화


    직지사는 임진왜란때 나라를 구한 호국선사 사명대사의 출가득도 사찰이다.

    사명대사(1544-1610)는 경남 밀양 태생으로 본관은 풍천임(豊川任)씨로

    속명은 응규(應奎), 법명은 유정(惟政), 호는 사명당(四溟堂)이다.

    13세에 황악산아래 유촌마을(현재의 직지사앞 상가일대로 추정)의 황여헌 선생 문하에서 공부하다

    15세에 모친을 여의고 16세에 부친을 여의게 되자 직지사로 출가하여 신묵(信黙)대사의 제자가 되었고

    18세에 승과에 합격하고 30세에 직지사 주지가 되었다.

    32세에 봉은사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로 휴정(休靜,서산대사)를 찿아가 제자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승병을 조직해 승병장으로서 명승을 떨쳤다.


    황여헌(黃汝獻.1486-1566)

    장수황씨로 황희의 현손(황희2남의 손자) 이조정랑,울산군수 역임. 울산군수재임시 사건에 연루되어 퇴임후 김천에 은거 


    사명당과 신묵대사의 첫대면에 얽힌 전설

    어느날 오후 신묵대사가 참선을 하던 도중 꿈에 천왕문옆 은행나무에 황룡이 서려있는 것을 보고는 깨어나

    기이하게 여겨 꿈에 본 장소로 가보니 한 소년이 잠을 자고 있었는데

    신묵대사가 소년의 사연을 듣고 거두어 제자로 삼았는데 이 소년이 바로 사명대사이다.

    당시의 은행나무는 1800년 만세루 소실 때 불타 없어졌고 천왕문앞 돌은 소년 사명당이 누워 자던 돌이라고 전해진다.

     





    만세루(萬歲樓)


    황악루와 함께 직지사의 2개의 누각 중에 하나인 만세루는 1800년에 소실되었던 것을 1978년에 신축하였다.

     

    불이문(不二門)

    천왕문과 대웅전 사이에 배치되는 이러한 누각은 2층은 불법을 설하는 강당으로 사용하고

    아래로는 불이문, 해탈문이라 하여 누각밑을 통과하는 형태로 문을 만든다.

    불이(不二)란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며 세속과 불가의 세계도 둘이 아니며 상대적인 것들이 결국에는 모두 하나라는 의미이다.

    또 이 문은 번뇌의 속된 마음을 돌려서 해탈의 세계에 이르게 한다하여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한다.

    불가에서는 번뇌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진입하는 중요한 문으로 보며

    이 문을 통과하면 사찰의 중심 공간인 부처가 거처하는 불국토의 세계로 들어간다고 본다.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직지사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임진왜란때 전소되었다가 1735(영조11)에 중건되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모든 번뇌를 쓸어버리고 깨달음을 얻었기에 위대한 영웅이라 해서 대웅(大雄)이라 일컬었고

    그래서 이분을 모신곳을 대웅전이라 했다.

    통일신라 때까지는 불상을 모신곳을 통칭해서 금당(金堂)이라 했는데

    고려시대 이후부터 사찰 건축물이 세분화되면서 대웅전이란 말이 등장했다.

    내부에는 중앙에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고 밖에서 볼 때 우측이 약사여래, 좌측이 아미타부처님이시다.

    이 세분을 함께 모신 경우 그 격을 높혀 대웅보전이라 한다.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부처님은 원래 인도 히말라야 산맥 아래 소국 석가국의 왕자로서

    세속의 영화를 버리고 위대한 깨달음을 얻은 영웅이므로 다른 이름으로 대웅(大雄)이라 한다.

    따라서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신 불전을 대웅전이라 한다.

    아미타여래불: 아미타(阿彌陀)라고 하는 것은 산스크리트어로 위대한 광명을 가진자라는 뜻으로

    서방정토의 극락세계에 있으면서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큰 서원을 세운 부처로 광명의 끝을 이루 다 셀 수도 없다하여

    무량수(無量壽)라고도 하며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모신 불전을 극락전 또는 무량수전이라 한다.

    이 부처를 믿고 염불을 외면 죽은뒤에 극락정토에 태어난다고 하여 가장 흔한 염불인 나무아미타불(아미타불에 귀의한다)로 나타난다.

    뒤로 보이는 후불탱화 3점은 1744년 완성되었으며  보물 670호로서 벽에 그려진 것이 아니라 천에 그려진 걸개그림이다

    대웅전 내부의 천정에는 연꽃무늬를 비롯한 화려한 단청조각과 함께 닫집 또는 감실(監室)이라고 불리는 특이한 형태의 모형이 있는데

    이것은 세속의 왕인 임금과 출세간의 법왕인 부처님의 정수리 위에 설치되는데 통상 절의 닫집이 궁궐의 것보다 훨씬 화려하다












    포대화상(布袋和尙)


    포대화상은 불교의 나눔을 상징하고 있는 스님이다.

    중국의 스님으로 이 '자유로운 영혼'은 중국 명주 태생의 선승(禪僧)이다. 이름은 계차(契此),

    사람들에게 기부받은 물건을 담은 포대를 메고 거리를 배회해 '포대화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포대화상은 전란으로 부모를 잃고 걸식하는 고아, 굶주린 이들을 위해 종일 탁발(托鉢)하고 그것을 어려운 이들에게 나눠 줬다.

    그에게 물건을 얻은 가난한 이들은 그때부터 재복이 일어 가난을 면하고,

    음식을 얻어먹은 사람들은 이들은 먹을 복이 생겨 굶주리는 일이 없어졌다 한다.

    포대화상이 빛나고 사랑받는 것은 재물을 쌓아두지 않고 어려운 이들과 나눠야 복된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관음전(觀音殿)


    관음전은 원통전(圓通殿), 대비전(大悲殿)이라고도 부르며, 관세음보살을 모신 불전이다.

    대승불교(大乘佛敎)가 낳은 수많은 보살 중에서 관세음보살만큼 대중의 신앙대상이 된 보살도 드물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모든 중생의 애환을 대자대비로 거두어주며 ,

    세상 사람들의 기도 소리를 듣고 중생의 근기에 맞게 32응신으로 화현하여 중생을 구제한다.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내재해 있음을 나타내는 연꽃을 들고 미소를 짓고 있거나

    감로수병을 들고 있는 형상으로 표현되며 대개 여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사명각(四溟閣)


    사명각은 직지사의 고승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영탱(影幀)을 모신 곳으로

    정조11(1787)에 창건하였으며 사명각의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다.

    사명대사는 16세에 직지사로 출가하여 신묵대사(信默大師)의 제자가 된 이후에 30세에 본사의 주지가 되셨고

    임진왜란 때 구국선사로서 큰 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그 공적을 기리기 위해 별도로 독립된 건물에 영탱을 모시고 있다.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은 저승의 유명계를 관장하는 곳으로서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무독귀왕, 시왕을 모시고 있다.

    시왕상(十王像)을 봉안하고 있으므로 시왕전이라고도 하며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시기 때문에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불린다.

    고려 태조14(931)에 능여조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현종 9(1668) 팔상전으로 중건되었다가 명부전으로 개액했다.

    명부(冥府)라는 것은 도교에서 쓰이는 말로 일반적으로 사람이 죽은 뒤에 간다는 영혼의 세계

    또는 사람이 죽은 뒤에 심판을 받는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명부전 내부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밖에서 볼 때 오른쪽에 도명존자,

    왼쪽에 무독귀왕이 협시하여 있고 그 옆으로 시왕이 나열해 있다.

    지장보살은 끝없는 용서와 사랑의 보살이요 말세 중생에게 행복을 안겨주고 지옥을 완전히 없애고자 하는 분으로서

    성불하지 못하는 중생이 하나라도 있으면 나는 결코 부처가 되지 않겠다고 선언한 분이다.

    도명존자는 중국 양주 개원사의 승려로 우연히 사후 세계를 경험한 후 지장보살의 협시가 되었다고 한다.

    무독귀왕은 지장보살의 안내자로  등장하고 있는 재수보살의 전신이라고 한다.

    시왕은 원래 불교 경전에는 등장하지 않고  중국의 도교에서 나온 말로

    시왕들이 지옥에서 죄의 경중을 판결한다고 하는 10명의 지옥왕으로 각기 하나의 지옥을 다스린다고 한다.

    사람이 죽으면 49일까지는 7일마다 각 시왕앞에 가서 심판을 받고 그 이후부터는 100,

    소상, 대상 때에 차례로 생전에 지은 선악을 심판받는다고 한다.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명부전에서 제를 지내 사후의 길을 편안케 한다.


    진관대왕 - 도산지옥  : 칼산에 떨어지기

    초강대왕 - 화탕지옥  : 끓는물에 담그기

    송제대왕 - 한빙지옥  : 얼음속에 묻기

    오관대왕 - 검수지옥  : 칼로 몸베기

    염라대왕 - 발설지옥  : 집게로 혀빼기

    변성대왕 - 독사지옥  : 독사로 몸 감기

    태산대왕 - 거해지옥  : 톱으로 몸 자르기

    평등대왕 - 철상지옥  : 쇠판에 올리기

    도시대왕 - 풍도지옥  : 바람길에 앉히기

    전륜대왕 - 흑암지옥  : 암흑속에 두기  




    응진전(應眞殿)


    응진전에는 석가여래상과 16나한상이 모셔져있으며

    고려태조 14년에(931) 능여조사(能如祖師)가 창건했다가 임진왜란 때 전소된 것을 효종 7(1656)에 중건했다.

    응진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과 과거불인 갈라보살(竭羅菩薩)을 모시고 있다.

    보살(菩薩)이란 위로는 부처님의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자비의 상징으로

    부처가 될 수 있는데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윤회하는 세계에 남아있기를 서원한 분.

    나한(羅漢)은 아라한(阿羅漢)의 준말로 완전한 사람,

    즉 존재의 참본질에 대한 통찰을 얻어 열반(涅槃), 또는 깨달음에 이른 사람을 말하는데

    불교에서는 아라한이 되는 것이 불교수행자가 추구해야할 목표로 보며 남녀를 불문하고 출가(出家)해야만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대표적인 나한인 16나한은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의 가까운 제자들로 석가모니의 부탁으로

    다음 부처(未來佛, 미래불)가 올 때 까지 사람들이 섬길 수 있도록 열반에 들지 않고 세상에 남아있게 되었다고 한다.

    나한신앙은 중국불교에서 신앙으로 발전했으며 우리나라에는 통일신라 때 들어왔다.

     




    안심입명(安心立命)


    안심(安心)은 안온(安穩, khema)에서 온 말이고, 입명(立命)은 귀명(歸命) 삼보(三寶)케 하는 것.

    부처님은 먼저 보시, 지계, 생천론(生天論) 등을 설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그 성숙된 정도를 보아 차례로 네가지 진리인 사성제(四聖諦)와 여덟 갈래로 이루어진 바른 수행의 길인 팔정도(八正道)를 설하였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교화방식을 안심입명((安心立命)이라는 말로 간략히 지칭하게 되었다.

    따라서 안심입명 하였다는 것은 "안온하고 편안한 경지에 도달하여 스스로 뿐 아니라

    다른 이에게도 바른 법을 전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였다"는 뜻이 된다.

    일설에 입명((立命)맹자(孟子)의 진심장(盡心章)에서 온 말이라 하고,

    후세에 선종(禪宗)에서 이 말을 받아들여 선수행을 통하여 견성(見性)의 경지에 다다른 것을 가리킨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약사전(藥師殿)


    약사전에는 동방유리정 세계의 교주라고 하는 약사여래(藥師如來)를 모시고 있는데

    약사여래는 모든 중생의 질병을 치료해주고 생명을 연장해주는 의왕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부처님으로 손에 약합을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불상은 1955년 국보 제475호로 지정되었다가 1963년 국보와 보물이 구분되면서 보물 제319호로 재지정 되었다.

    원래 모셔져 있던 석조약사여래좌상은 현재 성보박물관으로 사용되는 청풍료에 모셔저 있다.

    파손이 심하게 되어있으며 제작기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로전(毘盧殿)


    고려 태조때 능여조사에 의해 처음 세워진 비로전은 천불상을 모시고 있다고 해서 천불전(千佛殿)으로 불리며

    임진왜란 때 일주문, 천왕문과 함께 병화를 모면하였으며 그 가운데서도 불전으로는 유일하게 소실을 면하였다.

    정면 7, 측면 3간의 맞배지붕이며 크기는 53평에 금단청을 하였다.

    비로전내에는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좌우에 약사여래불과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천불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삼천불 중에서 현재의 천불을 신앙하는 것이며,

    14개의 나무계단에 경주 옥돌로 만들어진 천개의 서로 다른 표정을 가진 불상이 모셔져있다.

    임진왜란 때 295구가 분실되었던 것을 후에 보완했다고 한다.

    천불 가운데 독특하게 발가벗은 동자상(童子像)이 비로자나불 뒤에 서있는데

    법당에 들어가서 참배할 때 첫눈에 바로 이 동자상이 보이면 옥동자를 낳는다고 전해진다.











    황악루(黃嶽樓) 


    황악루(黃嶽樓)는 본래 대웅전 앞의 누각건물이었으나,

    주지 녹원화상(綠園和尙)에 의하여 비로전(毘盧殿) 앞으로 이전 개축(1980)되어 비로전을 진출입하는 문루이다.

    정면 3, 측면 2칸의 2층 누각의 모로단청 건물로 2층 누각에는 동종이 걸려 있다.





    청풍료(淸風寮) - 직지사 성보박물관


    원래는 불교를 논하는 강원으로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불교 문화재를 보존하는 성보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사용되고 있다




    수령 100년이 넘어 보이는 직지사 개나리











    범종각(鐘閣)


    범종각에는 절에서 사용하는 기본되는 4가지 중요한 불구인 사물 즉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을 보관하고 있는 공간으로

    보통 네 가지를 함께 보관하는 경우가 많은데 어떤 사찰에서는 범종을 따로 두는 경우도 있다

    직지사 범종각  현판은 범어범()자를 쓰지 않고 뜰범()자를 쓰는데 이는 범종각의 자리가 원래 연못이었던 데서 연유한다.


    범종(梵鐘)

    범종은 세상과 지옥의 모든 중생들이 고통을 떠나 해탈하기를 바라며 치는 부처님의 음성으로

    아침에는 세상의 중생들이 부처님으로부터 달마대사에 이르기가지 28분의 위대한 깨달음을 본받자는 의미로 28번을 치고

    저녁에는 지옥의 중생들에게 고통을 덜어주고 도리천 33천을 위해 33번을  친다.

    사찰에서 시각을 알려주거나 의식이 있을때 대중을 모으기 위해 치기도 한다.


    법고(法鼓)

    불법을 전하는 북이라는 뜻에서 법고라고 하며

    북소리가 부처님의 설법과 같이 널리 전해져 땅위의 모든 축생들을 제도하고자 마음심()자를 그리며 두드린다.


    목어(木魚)

    나무의 속을 파내어 물고기 모양을 만드는데 이것을 두드려서 소리를 내는 것으로서

    원래 용도는 사찰내의 대중을 불러 모으거나 경전을 외울때 두드렸다고 한다.

    물고기는 항상 눈을 뜨고 있으므로 수행자들이 마음을 누그러뜨리지 말고 항상 경계하라는 의미도 있으며 물속의 중생들을 제도한다.


    운판(雲板)

    청동이나 철을 재료로해서 구름모양의 판으로 만드는데 사찰의 식사 시간을 알리는 용도이다.

    이를 두드려 공중의 중생들(날짐승)이 교화를 받는다  











    직지사 법회 안내




    한국불교 16백년의 역사를 같이한 '황악산 직지사(黃嶽山 直指寺)'


    소백산맥(小白山脈)의 준령(竣嶺)이 남쪽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그 서쪽 추풍령(秋風嶺)에서 잠시 머물러 관문(關門)을 이루었고,

    다시 서남쪽으로 웅장(雄壯)한 산세(山勢)를 유지하며 달려와 힘차게 솟아오른 황악산(黃岳山) 동남쪽 산자수명(山紫水明) 한 곳에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直指寺)가 자리해있다.

    해발 1,111m에 달하는 황악산은 북쪽으로 충청도,서쪽으로 전라도, 동남쪽으로는 경상도에 연이은 삼도(三道)의 도계(道界)에 접하였으며,

    이중심에 눌러 앉은 본사는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북도(慶尙北道) 김천시(金泉市) 대항면 (代項面) 운수리(雲水里) 216번지이다.

    황악산(黃岳山) 의 황자는 청(), (), (), (), ()5() 중에서도 중앙색을 상징하는 글자이다.

    따라서 예로부터 직지사는 해동(海東)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으뜸가는 가람이라는 뜻에서

    동국제일가람(東國第一伽藍)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본사(本寺)의 초창(草創)은 신라 눌지왕(訥祗王) 2(418) 아도 화상(阿道和尙)에 의하여 도리사(桃李寺)와 함께 개창(開創)되었다.

    그 사명(寺名)을 직지(直指)라 함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禪宗)의 가르침에서 유래되었다 하며,

    또 일설에는 창건주(創建主) 아도 화상이 일선군(一善郡, 善山) 냉산(冷山)에 도리사를 건립하고 멀리 김천의 황악산을 가리키면서

    저 산 아래도 절을 지을 길상지지(吉祥之地)가 있다고 하였으므로 하여 직지사(直指寺)라 이름했다는 전설(傳說)도 있다.

    또는 고려의 능여 화상이 직지사를 중창할 때 자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지(測地)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 설도 있다.

    이는 모두 창건설화와 연관된 직지(直指)의 미화(美化)된 전설에서 유래되고 있지만,

    실은 불교 본연의 직지인심(直指人心)을 상징하는 의미로 풀이 될 수 있다.

    즉 창건 설화의 직지(直指)와 선가(禪家)의 직지(直指)가 둘이 아니라고 볼 때,

    이는 곧 불교의 본질을 나타내는 이름이라 하겠으며, 또한 사명 (寺名)에 불교의 본지(本旨)

    이처럼 극명(克明)하게 나타내는 사찰도 흔치 않으리라 본다.

    아도 화상에 의하여 개창된 직지사는 신라시대에 2차에 걸친 중수가 있었다.

    그 첫째는 선덕여왕(善德女王) 14(645) 자장 법사(慈藏法師)에 의한 중수를 들 수 있고,

    두 번째는 경순왕(敬順王) 4(930) 천묵대사(天默大師)에 의한 2차 중수가 그것이다.

    먼저 자장 법사의 중수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잘 알 수 없고, 오히려 경순왕대의 사실이 보다 자세히 전해진다.

    아마 이때는 신라의 국운이 쇄진하여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投降)하기 불과 5년 전의 일이며,

    이 시기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변혁기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직지사 사적에 따르면 이러한 시기에 천묵 대사는 본사를 중수하고,

    더 나아가 금자대장경(金字大藏經)을 서사(書寫)하여 신라 조정(朝廷)에 헌상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는 현존 유품(現存遺品)이 전해지지 않아 그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다음에 언급하게 될 금자대장경비(金字大藏經碑)가 이를 입증(立證)하고 있다.

    다만 이제 지난날 직지사의 찬란하였던 사격(寺格)을 밝히면서

    신라시대에 이미 금자대장경을 제작하였다는 이 놀라운 사실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대장경이라고 하면 해인사(海印寺)의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을 그 대표로 삼아 왔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서 이미 신라시대에, 그것도 금자대장경을 만들었다는 사적기의 내용은 진실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더구나 이를 접한 경순왕은 어찰(御札)로써 점제(點題, 經名을 쓰는 것)하였다고 하였으므로 더욱 그러하다.

    러나 불행히도 이에 대한 현품이 전래되지 않아 그간의 사정을 잘 알 수 없지만,

    왕조(王朝)가 바뀐 고려시대 초기에 본사(本寺)에는 금자대장경이 봉안되었고, 또한 대장당비(大藏堂碑)가 건립되고 있다.

    즉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직지사의 고승 능여 조사(能如祖師)의 도움으로 후백제(後百濟)와의 불리한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직지사는 국가적 비호(庇護)를 받았으며, 이후 능여 조사(能如祖師)의 제자들 역시 대대로 본사를 중흥(中興)하더니

    광종 원년(光宗元年, 950)에는 31일부터 약 50일 간 법회(法會)를 개설(開設)하여 경찬회(慶讚會)를 성대히 베풀었다.

    그런데 이때의 경찬법회는 금자대장경을 다시 필사한 것에 대한 법회인지,

    아니면 경순왕이 점제(點題)하였던 금자대장경을 경순왕의 투항 후 신라 조정으로부터 인수하고

    대장당(大藏堂)을 건립한 낙성연(落成宴)인지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더욱 짙다.

    그것은 신라의 국운이 고려로 이양되는 과도기적 상황과 함께 태조 왕건의 불교신앙과 아울러 능여 조사로 인한

    그간의 사정에서 짐작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보다 분명한 것은 금자대장당비(金字大藏堂碑)를 새겨 절을 북정(北亭)에 세웠다는 사적기의 내용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에 대한 물적 근거는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실려 있는 직지사 대장당기비(大藏堂記碑)의 탁본(拓本)이며,

    이는 왕우군(王右軍)의 집자(集字)로서 유명하다.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직지사는 제 2대 정종 원년(定宗元年, 1339) 정종의 어태(御胎)를 절의 북봉(北峰)에 봉안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고, 이로 인하여 조선시대에도 줄곧 사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 중기에는 사명 대사(四溟大師)가 본사(本寺)에 출가(出家)하여 신묵 대사(信默大師)의 제자가 된 것이 유명하거니와,

    이로 인하여 직지사는 배불(排佛)의 그늘 속에서도 사운(寺運)을 유지할 수 있었다.

    30세에 직지사 주지(主持)가 된 사명 대사는 이후 임진왜란(任辰倭亂)이 발발(勃發)하자

    구국제민(救國濟民)의 선봉(先鋒)에서 큰 공을 세웠음은 너무나 유명하다.

    이렇게 구국(救國) 사명 대사의 공로로 인하여 직지사는 조선(朝鮮) 8대가람(八大伽藍)의 위치에 놓이게 되었고,

    300여 소속사암(寺庵)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리고 직지사의 사세가 가장 흥성했던 시기에는 현재 김천시내 법원이 있는곳을 비롯하여

    구화사(九華寺)까지가 직지사의 사유지였으며,뿐만 아니라 상주 통로 우시장(牛市場) 근처의 다리이름이 직지교(直指橋)였고,

    그 상류(上流)는 모두 직지사의 영유(領有)였다 하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직지사는 조선시대 말엽 국운의 쇠퇴와 함께 그 사운(寺運)을 같이 하여 한때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직지사는 일제시대(日帝時代)사찰령(寺刹令)이 제정되면서 한때 해인사(海印寺)의 말사(末寺)로 전락하기도 하였으나,

    광복 이후 50년대에 본산제도(本山制度)가 재편성되면서 본산(本山)으로 승격되어 그 사세를 차츰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국내 25본산(本山) 가운데 하나로서 제8교구(第八敎區) 본사(本寺)이며 소속 말사(末寺) 54개 사찰에 이르고 있다.

    관할 구역은 4개시(個市), 1개군(個郡)으로 김천, 구미, 상주, 문경시와 예천군이다.

    또한 본사의 산림(山林)은 약 600정보(町步)에 달하며, 사찰 경내 면적만도 약 30,000평에 이른다.

    그리고 본사에 소속된 말사 역시 수많은 성보문화재(聖寶文化財)와 고적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본사는 역대의 중건(重建), 중수(重修)를 거치면서 천 수백년 법등(法燈)을 이어 오다가

    최근(最近) 반세기 동안 창사 이래(創寺以來) 최대의 불사를 일으키어 그 면모가 일신되었으니

    이는 오로지 1958년 본사의 주지로 부임한 녹원 화상(綠園和尙)에 의한 중흥불사(中興佛事)의 공덕에 힘입은 바라 할 것이다.

    먼저 사찰 주변의 정화(淨化)를 위하여 사유대지(私有垈地) 10,088평과 전답 12,627, 그리고 임야 3,740평을 매입하였다.

    이와 함께 사적기(事蹟記)에 따라 모든 불전(佛殿)과 당우(堂宇)를 중건,중수함은 물론

    국제회의와 대법회를 위한 본사 최대의 건물인 만덕전(萬德殿)을 건립하는 한편

    4()의 신라시대 고탑(故塔)을 이건(移建)하였으니

    이는 창건 이래 최대의 불사(佛事)이며 일대변혁(一大變革)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직지사길 95 (운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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