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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살곶이다리(箭串橋) - 보물 제1738호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9. 4. 26. 04:30
서울 살곶이다리(箭串橋, 전관교) - 보물 제1738호
살곶이다리는 한양과 동남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도로에 만든 돌다리이다.
매 사냥터, 말 목장, 군대를 사열하는 장소로 쓰인 동교 일대를 ‘살곶이들(箭串坪, 전관평)’이라 하여
다리 이름을 ‘살곶이다리’라 불렀다.
평평한 평지를 걷는 듯해서 제반교(濟盤橋)라고도 불린다.
세종 2년(1429)에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중단된 뒤 성종 14년(1483)에 완성하였다.
1925년의 대홍수와 6,25전쟁으로 다리의 일부가 손상되었는데, 1970년대에 다리를 보수하였다.
조선 전기에 만든 다리로는 가장 긴 다리로 모두 64개의 돌기둥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돌기둥은 흐르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마름모 모양으로 다듬었다.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수동1가
보물 제1738호 서울 살곶이다리 표석
서울 살곶이다리 야외 석재 전시장
서울 살곶이다리 부재 설명도
귀틀석 해체 위치
살곶이다리 옛모습
서울 살곶이 지명의 유래
살곶이는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는 성수동지역에 형성된 평야를 부르는 이름인데, 뚝섬이라고도 한다.
뚝섬은 군대가 싸움터에 나갈 때 왕권을 상징하는 둑기(纛旗)를 세우고 승전을 기원하던 제사인
둑제(纛祭)를 지내던 섬이라는 뜻인데, 발음이 바뀌어 뚝섬이라 불린다.
서거정은 ‘서울의 십경을 노래하다’라는 뜻의 한도십영(漢都十詠) 이라는 시(詩) 가운데
여섯 번째인 전교심방에서 ‘살곶이는 꽃구경으로 유명하다.’고 했다.
야사에 전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태조 이성계가 왕자의 난 이후 고향 함흥으로 가 버리자, 함흥차사 박순과 무학대사가 간절히 설득하여 돌아오니
태종 이방원은 이곳에서 부왕인 이성계를 맞이했고, 이때 하륜은 태종에게 천막 기둥 뒤에서 부왕께 절을 하라고 조언했다.
조금 후 이성계가 갑자기 이방원에게 화살을 쏘았지만 화살은 기둥에 맞았다.
이에 이성계는 이방원이 왕이 된 것을 천명이라 여기고 용서했다고 한다.
이후 이곳은 ‘화살 꽂힌 벌판’, 줄여서 ‘살곶이 벌’ 또는 ‘살곶이’로 불렀다고 한다.
※둑기(纛旗) : 깃발 둑자의 원음은 ‘독’이지만 속음은 ‘둑’이다.
쇠꼬리로 장식한 큰 깃발을 뜻하는데, 임금의 수레나 군대의 왼쪽에 세워 임금의 권위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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