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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수서원(紹修書院) - 사적 제55호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9. 8. 2. 04:30

    소수서원(紹修書院) - 세계문화유산(유네스코 ID 1498-001)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이다.

    조선 중종 37(1542)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이 지역 출신 고려시대 유학자인 회헌(晦軒) 안향(安珦)

    위패를 모신 사묘(祠廟)를 세우고, 이듬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웠다.

    후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명종임금께 건의하여

    서적, 토지, 노비 등과 함께 소수서원이라는 친필 현판을 하사(사액)받았다.

    소수서원은 신라시대 때 창건된 숙수사(宿水寺)라는 절터에 세워졌다.

    이에 대해서는 불교에서 유교로 넘어와 선비정신을 이어가는 유불(儒彿) 문화의 융합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나

    숭유억불 사상의 영향이라는 견해도 있다.

    서원 입구에 학자수(學者樹)라 불리는 의젓한 적송군락을 따라가면 맑고 맑은 죽계수(竹溪水)를 만난다.

    시냇가에는 시원한 물빛에 취해 시와 풍류를 즐긴다는 취한대(翠寒臺)와 경자바위가 있다.

    경렴정(景濂亭)과 지도문(志道門을 지나 만나는 서원 경내는 학문을 연구하는 강학공간과 제사를 지내는 제향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보통은 전당후묘(前堂後廟), 즉 앞에는 공부하는 공간, 뒤에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배치가 일반적인데,

    소수서원이 동쪽이 강학공간, 서쪽이 제향공간이다. 동학서묘(東學西廟)의 독특한 배치로 지어졌다.

    서쪽을 중시하는 우리 전통사상을 따른 것이다.

    소수서원은 강학공간과 제사를 지내는 제향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강학공간에는 강학당을 중심으로 지락재(至樂齋), 학구재(學求齋), 일신재(日新齋), 직방재(直方齋) 등의 건물이 있고

    제향공간에는 문성공묘(文成公廟), 전사청(典祀廳), 영정각(影幀閣) 등이 있다.

    소수서원은 숙수사라는 절터에 세워졌는데, 서원 안팎으로 당간지주 등 숙수사 유적이 남아 있어 이곳이 절터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201976일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 9곳을 세계유산에 등재하였다.

    포함된 서원 9곳은 소수서원(경북 영주)을 비롯하여 남계서원(경남 함양), 옥산서원(경북 경주), 도산서원(경북 안동),

    필암서원(전남 장성), 도동서원(대구 달성), 병산서원(경북 안동), 무성서원(전북 정읍), 돈암서원(충남 논산)이다.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 2740 (내죽리) 소수서원 내  







    학자수(學者樹)


    소나무에게서 선비의 충절을 배운다는 뜻으로 학자수라 불리기도 한다.






    죽계천(竹溪川)


    소백산에서 발원하여 소수서원 동쪽으로 흐르는 죽계천(竹溪川).

    고려말 유학자 안축(安軸.12871348)이 지은 죽계별곡(竹溪別曲)’의 배경이 되는 하천이다.





    진입영역(進入領域)


    서원 왼편에 봉긋하게 솟아있는 둔덕은 거북이가 알을 품은 모습처럼 보여 영귀봉(靈龜峰)이라 한다.

    영귀봉 주변으로 수백년 된 적송이 장관인데, 소나무에게서 선비의 충절을 배운다는 뜻으로 학자수(學者樹)라 불리기도 한다.

    보기에도 멋진 소나무 숲은 서원의 품격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영귀봉 위에는 작별의 정을 나누던 소혼대(消魂臺)가 있다.

    서원 정문인 지도문(志道門) 앞 잔디 제단은 생성단(省牲壇)이다.

    매년 봄, 가을에 안향(安珦) 선생의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할 가축의 흠결을 살피고 잡던 제단터이다.

    지도문 오른쪽 경령정은 죽계수를 따라 펼쳐지는 멋진 경관을 바라보며 학문을 이야기 하던 곳으로 1543년 주세붕이 세웠다.

    경렴정(景濂亭)에는 스승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앞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썼다고 전해지는

    초서의 대가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의 현판이 남아 있다 




    보호수(은행나무)




    백운동 경자 바위(白雲洞 敬字岩)


    죽계천에있는 백운동 경자바위는 바위에 새겨있는 "백운동(白雲洞)""()"자는

    신재 주세붕 선생이 직접 써서 새긴 것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경은 구차함의 반대이니 잠깐이라도 구차하면 이는 곳 불경이라"라고 하여 이는 회옹 주자의 뜻과 부합하고

    1천년 후에라도 마멸되지 않도록 보존되기를 바란다는 뜻에서 새겼다고 한다.




    취한대(翠寒臺)


    취한대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이 대()를 세웠으나 오랜 세월로 허물어져 그 자리에 다시 터를 닦아 정자를 지었다.

    "취한"이란 뜻은 "푸른 연화산의 산기운과 맑은 죽계의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에서

    옛 시 송취한계(松翠寒溪)”에서 비취 취()자와 차가울 한()자를 따와서 지었다.






    성생단(省牲壇)


    매년 음력 3월, 9월(초정일, 初丁日) 제향 때, 희생(犧牲)을 간품(看品)하여 사당에 드리던 제단(祭壇) 터이다.



    경렴정(景濂亭)


    소수서원으로 들어서기 바로 전에 있는 정자로 유생(儒生)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며 마음의 여유를 찾던 공간이다.

    1543(중종 38) 풍기군수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이 백운동 서원(白雲洞 書院)을 건립하면서

    이 정자를 지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 중 하나이다.

    경렴정이란 이름은 중국 북송의 철학자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頥)를 경모하는 뜻에서

    그의 호 첫 글자인 ''자를 취했고 회험(晦軒) 안향(安珦, 1243~1306) 선생을 높인다는 뜻에서 '()'자를 취해서 붙인 것이다.

     현판을 들여다보면 경림서와 초서로 된 두편액이 있는데,

    해서는 퇴계(退溪) 선생의 글씨이고,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 1521~1575)의 글씨이다.

    서원 유생들의 휴식을 위한 공간으로 시와 학문을 토론하던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각집으로 합각지붕을 하고 있다.

    호박 주추에 두리기둥이 아름답게 된 마루바닥에 계각 난간을 돌렸다.

    서원 경내와 외부 자연풍경을 이어주는 사방이 시원하게 트인 경렴정은 원생이나 유림이 모여

    시연을 열며 풍류를 즐기고 심신을 고양할 수 있는 중요한 공간이었다.

    정자 내부에는 주세붕, 퇴계 선생 등 당대 여러 묵객들의 자연을 노래한 시판이 걸려 있다.

    유유히 흘러가는 죽계수를 끼고 수령 500년의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드리워진 정자는

    시공을 뛰어넘어 호연지기를 기르던 유생들의 풍취가 묻어난다.





    강학영역(講學領域)


    서원은 크게 강학영역과 제향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강학영역은 학문을 닦고 배우던 공간이다.

    앞의 제일 큰 건물이 강학당(講學堂, 보물 1403)이고,

    오른쪽 뒤편으로 돌아가면서 지락재(至樂齋)와 학구재(學求齋), 일신재(日新齋)와 직방재(直方齋)가 위치한다.

    강학당 왼쪽으로 장서각(藏書閣)이 있다. 건물배치는 하학상달(下學上達), 즉 학문의 차례와 단계를 뜻한다.

    독서를 통한 학문의 즐거움을 의미하는 지락재를 시작으로, 성현의 길을 따라 학문을 구하는 학구재,

    날마다 새롭게 한다는 일신재, 그리고 깨어있어 마음을 곧게 한다는 직방재, 이 직방재에 이르면 학문을 크게 이루게 되므로

    비로소 명륜당(明倫堂)이라 불리는 강학당에 들어 세상의 이치를 밝히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배출된 인재가 4,000여명에 달한다.

    1543년에 건립된 강학당 내부에는 명종임금이 내려준 친필 편액이 걸려있으며, 원본은 소수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장서각은 책과 목판을 보관하던 곳이다.   




    소수서원 강학당(紹修書院 講學堂) -보물 제1403


    강학당은 학문을 강론하던 장소로, 소수서원을 세운 주세붕(周世鵬)1543(중종 38) 군학사(郡學舍)를 옮겨온 것이다.

    전체적으로 큰 대청을 형성하고 방은 한쪽에만 있다.

    대청 북편에는 명종의 친필인 紹修書院(소수서원)’ 편액이 걸려 있다.

    장대석의 높은 기단을 쌓아 그 위에 자연석을 다듬은 초석을 놓았으며,

    규모는 정면 4,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겹처마로서 웅장하면서도 고색이 잘 간직되어 있다.

    사방 둘레에 너비 1m 정도의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툇마루 가장자리는 높이 6.5, 높이 8.5의 턱을 두었고, 기단 네 모서리에 추녀를 받는 활주를 설치하였다.

    정면 4칸 중 좌측 3칸은 마루이며, 우측 1칸에는 방 2개를 설치하였다.

    기단 3(정면, 우측, 좌측)에 계단을 설치하였으며, 굴뚝은 마루 밑에 조그마한 구멍을 뚫어 처리하였다.

    기둥 윗몸에서 앙서 하나를 내어 기둥 위에 놓인 주두와 결구시킨 초익공 구조를 이루고 있다.

    가구는 5량으로 대들보를 앞뒤의 평주 위에 걸고, 이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를 받치고,

    종보 위에 파련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건물은 남북으로 길게 동향하여 있으며, 서원 입구에서 바로 강학당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남쪽 기단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정문을 면하여 백운동(白雲洞)’ 현판이 있다.

    강학당 북쪽에 있는 일신재(日新齋)와 직방재(直方齋)는 원장, 교수 및 유사(有司)의 집무실 겸 숙소인데,

    ·서재가 독립되어 있지 않고 양재(兩齋)가 한 동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건물이다.











    일신재(日新齋)와 직방재(直方齎) - 원장 및 교수들의 집무실 겸 숙소


    강학당의 북쪽에는 동재인 일신재와 서재인 직방재가 정면 6, 측면 1칸 반으로,

    중앙에 정2, 측면 1칸 반의 대청을 두고, 그 좌우에는 전면에 반칸폭의 툇마루를 설치한

    정면 2측면 1칸 반의 온돌방을 두어 동재와 서재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건물 구조는 일반적으로 서원의 동재와 서재가

     강학당의 좌우에 서로 마주보며 들어선 것과 비교해 매우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일신재(日新齋)나날이 새로워지라는 뜻으로 대학에서 딴 것이다. 이곳은 당시 교사들의 집무실 겸 숙소였다.

    직방재(直方齋)는 안과 밖을 곧고 바르게 하라는 뜻의 주역(周易)에서 따온 말로 원장의 집무실 겸 숙소였다.

    강학당인 명륜당이 동서로 길게 앉아 있는 데 비해 이 집은 남북으로 앉아 있다.

    이 건물은 좁은 툇마루를 앞에 두고 칸칸이 나뉜 한 칸짜리 온돌방들이 매우 아담하다.

    집중하여 공부하기에 큰 방이 필요치 않다고 여겼던 옛사람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장서각(藏書閣)


    소수서원의 장서각에는 목판과 나라에서 내려준 책을 포함하여 3,000여권의 서적을 보관하고 있었다고 한다.





    제향영역(祭享領域)


    제향영역은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문성공묘(文成公廟, 보물 제1402)와 전사청(典祀廳), 영정각(影幀閣) 등의 건물이 있다.

    문성공묘는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불리는 문성공 회헌(晦軒) 안향(安珦)의 위패를 모신 사묘(祠廟)1542년 주세붕(周世鵬)이 세웠다.

    문성공묘를 사()라 하지 않고 묘()로 격을 높여 부른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매년 봄, 가을로 두 번의 제(향사)를 지낸다. 문성공묘 뒤편에 있는 전사청은 제기를 보관하고 제물을 준비하던 곳이다.

    일반적으로 전당후묘(前堂後廟)라 하여 강학공간 뒤에 제향공간을 두는데

    서쪽방향을 중시하는 우리 전통사상에 따라 강학공간 측면 서쪽에 제향공간을 배치한 독특한 사례이다.

    서원에 영정각이 있는 것도 특이한 일로 안향초상(국보 제111)과 주세붕초상(보물 제717)

    보물급 영정을 많이 소장하고 있어 1975년에 특별히 지어진 건물이다.

    현재 원본은 소수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정료대(庭燎臺)


    밤에 서원을 밝히던 조명시설로 윗부분 석재 위에 관솔(송진이 많이 엉긴 소나무의 가지나 옹이)을 피워 정원을 밝혔다.




    관세대(盥洗臺)


    사당을 참배할 때 손을 씻을 수 있도록 대야를 올려놓는 받침돌이다.





    일영대(日影臺)


    일영대는 해시계로 알려져 있다.

    맑은 날 윗부분 돌에 꽂은 막대기의 그림자가 아랫돌에 드리워지는 것을 보고 시간을 알았다고 한다.

    자연석 주춧돌 위에 문지도리석을 올려놓은 것으로 숙수사의 유적이라는 설도 있다.





    소수서원 관리사무소와 충효교육관




    소수서원 중수기적비(紹修書院 重修紀蹟碑)



    고직사(庫直舍)


    민가형식의 건축물로 서원의 살림살이를 맡아보던 관리인이 머물던 곳이다.

    원래는 서원관리가 편리하도록 경내에 있었으나, 1970년대에 서원을 정비하면서 서원 밖으로 옮겨 지었다.







    학구재(學求齋)와 지락재(至樂齋) - 유생들의 기숙사

     

    자 형으로 배치되어 있는 학구재와 지락재는 유생들이 머물며 공부하던 기숙사이다.

    앞면 3, 옆면 1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앞면 중앙에 설치된 마루의 앞과 뒤는 벽이 없이 모두 개방해 놓았다.

    학구재는 학문을 구하는 집이란 뜻이며, ‘어리석은 어린 아이가 스승에게 가르침을 구한다는 뜻으로 동몽재(童蒙齋)라고도 한다.

    또한 지락재는 더할 수 없는 즐거움의 공간이란 뜻을 지닌 건물로 일명 높은 곳을 우러러 보는 공간이라 하여 앙고재(仰高齋)라고도 한다.

    지락재는 개울을 마주한 담장에 연해 있으니, 많은 유생들이 이곳에서 자연의 기운을 만끽하며 호연지기를 기르고 학문 연마에 심취했으리라.

    이 소수서원의 작은 방과 마루를 모두 4여 명의 유생들이 거쳐 갔다고 한다.










    최초 사액서원 탁월한 보편적 가치세계가 인정

    소수서원 세계문화유산 등재 확정




    사적 제 55호 소수서원(史蹟 第五五號 紹修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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