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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낙성대 안국사(落星垈 安國祠)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9. 9. 23. 04:28

    낙성대 안국사(落星垈 安國祠)





    안국문(安國門)



    落星垈(낙성대)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揮毫), '落星垈(낙성대)'


    박정희대통령께서는 고려의 명장 강감찬장군의 나라를 위한 슬기와 용맹을 이 나라 안보의 의표로 삼게 하시고자

    장군이 출생하신 이곳 관악산 기슭에 새로 유적지를 조성토록 분부하고 '落星垈(낙성대)'라는 휘호를 하사 하시었다.

    서울특별시에서는 그 뜻을 받들어 1974610일 이곳에 안국사, 안국문, 사적비 등을 건립하고

    박대통령께서 하사하신 휘호를 이 자연석에 각자하여 오늘의 낙성대를 조성하였다.





    낙성대공원 안국사(安國祠)


    정면에는 외삼문(外三門)인 안국문(安國門)을 세웠으며, 안국문을 지나면 내삼문(內三門)을 만나게 된다.

    안국문과 내삼문 사이에는 낙성대유허지의 삼층석탑을 옮겨와 안치해 놓았으며, 그 맞은편에 강감찬장군 사적비를 세웠다.

    그리고 제일 안쪽으로 안국사(安國祠)를 마련하여 강감찬장군의 영정을 모셨으며, 사괴석(四塊石)으로 담장을 쌓았다.





    낙성대 삼층석탑(落星垈 三層石塔)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


    이 탑은 고려시대의 명장 인헌공(仁憲公) 강감찬 장군(姜邯贊 將軍, 948~1031)을 기리기 위해 그의 생가 터에 세워졌던 것이다.

    원래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강감찬 생가 터(낙성대)에 있었는데,

    1974년 강감찬 장군을 위한 사당을 지어 안국사(安國祠)라 이름하고 주변을 정비하면서 이곳으로 이전되었다.

    낙성대(落星垈)라는 이름은 강감찬 장군이 태어 났을 때 큰 별이 떨어져 그 집으로 들어갔다는 일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석탑의 조성연대는 고려시대(13세기경)로 추정하고 있으며자재는 화강암이고, 탑의 높이는 4.48m이

    이 석탑은 1964년에 파손된 부분을 보수한 바 있다.

    석탑은 일반형으로 넓직하고 두툼한 지대석 위에 기단을 받고 그 위에 탑신부를 형성하였다.

    기단부는 단층으로서 각 면에 1매씩의 판석을 세워 도합 4매로 조립하였는데,

    각 면에 탱주는 없으나 양쪽 귀퉁이의 우주(隅柱)는 정연하게 마련되어 있다.

    기단갑석은 두툼한데 하면에 낮은 부연(附椽)이 있고 상면에는 높직한 괴임대를 마련하여 탑신부를 받고 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屋蓋石)을 각기 1석으로 조성하여 중적(重積)하였는데 각층의 탑신석에는 양쪽 우주가 정연하다.

    옥개석은 하면에 큼직한 받침을 2단씩 마련하였으며 상면에는 낮은 괴임을 1단씩 각출하였다.

    낙수면은 다소 급경사이고 추녀에 약간의 반곡(反曲)이 있어 보이나

    전체적으로 직선에 가까우며 네 귀퉁이의 전각(轉角)에는 반전(反轉)이 현저하다.

    상륜부는 노반석(露盤石)부터 전체가 결실되었다.

    이 석탑의 초층 탑신 전면에 강감찬 낙성대(姜邯贊 落星垈)라는 명문(銘文)이 해서(楷書)로 각자되어 있어

    탑명을 강감찬탑혹은 강감찬 낙성대탑이라 칭하고 있다.

    이 석탑은 기단부가 단층으로 구성된 점이나 특히 탑신부에서의 둔중한 느낌은

    고려시대 석탑에서도 후기에 속하는 건립으로 추정케 하는 것이다.







    고려 강감찬장군 사적비



    고려 강감찬장군 사적비 비문 


    한국 민족의 역사상 수많은 영웅들 중에서도 고려 일대를 통하여 가장 뛰어난 이는 실로 강감찬 장군이시다.

    그는 일찍 고려 정종3년 서기 948년에 금주 지금 봉천동에서 건국공신 궁진의 아들로 태어나니

    해는 바야흐로 중원대륙 동 몽고지대에서 사나운 유목민들인 거란이 일어나 고려와 맞선 어려운 시대이었다.

    거란군이 성종12년 서기 993년에 처음 침구 해 왔을 때에는 재상 서희의 능란한 외교로써 물리쳤었고

    그로부터 17년 뒤 현종1년 서기 1010년 겨울에 그들이 4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침입함으로

    고려에서도 강조장군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나가 싸웠으나 패전하자 조정에서는 항복할 것을 의논했을 때

    오직 예부시랑 강감찬이 왕을 피난케 하고 항전할 것을 역설하여 적을 물리치니 이때 그의 나이 64세였다.

    그는 본시 문과출신으로 학문과 지략이 탁월한 위에 문무를 겸비한 이라 왕의 특별한 신임을 받아오다가

    현종 9년 서기 1018년 그의 나이 71세 되던 해 재상을 겸한 채 서경 유수가 되어 평안도로 내려가니

    압록강 동쪽 의주, 선천, 용천, 철산, 곽산, 귀성 등 여러 고을의 성을 지키며 거란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거란 장수 소배압이 10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오므로 강감찬이 상원수 강민첨이 부원수가 되어

    안주로부터 의주까지에 20만 명을 풀어 진을 치고 또 기병 12천명을 뽑아 산골짜기에 매복을 시킨 다음

    굵은 밧줄로 소가죽을 꿰어 동쪽 냇물을 가로막았다가 적이 오자 물을 터서 적군을 패했더니

    이듬해 정월 적들은 또다시 다른 길로 송경 가까이 쳐들어 왔다가 쫓겨가며 귀성고을을 지나가게 되었다.

    때는 삼월 곳은 귀성의 동쪽 들판 그날 따라 풍우는 남쪽에서 몰아오고 깃발은 바람결에 북쪽을 향하는 지라.

    장군은 기세를 타고 적군을 여지없이 무찌르니 석천을 건너 반령에 이르는 사이 적들의 시체는 들을 덮었고

    말과 낙타와 갑주와 온갖 병기들조차 수없이 노획하니 그야말로 고려 일대를 통해 가장 이름난 승첩이었다.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우봉 영파역에 이르자 왕은 비단장막을 치고 풍악을 잡히며 개선장군을 환영하면서

    72세 노장군의 백발에 금꽃 여덟 가지를 꽂아주며 왼손으로 손목을 잡고 바른손으로는 술잔을 권했으며

    함께 도성으로 들어오자 국민의 환호성은 천지를 진동했었고 왕은 그에게 영광스러운 공신 호를 내려 주었다.

    73세에 조정에서 물러나 성밖 동쪽 마을에 조용히 여의니 84세요 인헌이라 시호(諡號)하고 현종 묘정에 배향했었다.

    그로부터 구백년이 지나는 동안 역사는 흘러갔건만 민족의 영웅이 끼친 큰 공적이야 잊을 길이 없으므로

    여기 장군의 유적지에 사적비를 세워 자손만대에 전하여 우리 민족의 영광과 긍지를 삼으려 한다.


    1974610,

    노산 이 은 상 짓고, 일중 김 충 현 쓰고   





    꽃무릇(석산, Red spider lily)

     

    꽃무릇(=석산)은 수선화과 Lycoris속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알뿌리식물로 우리가 흔히 아는 상사화랑 한 집안 식물이다.

    그래서 통상 상사화라고도 부르지만 그것은 속을 대표하는 명칭이기 때문에 굳이 전체를 통칭하여 부른다면 상사화류 라고 불러야 맞다. 

    인도 사람들은 석산을 천상계의 꽃 만수사화라 부르는데,

    지상의 마지막 잎까지 말라 없어진 곳에서 화려한 영광의 꽃을 피운다 하여 피안화(彼岸花)라고도 한다.

    원산지는 중국이며 석산(石蒜), 이별초(離別草), 환금화(換金花)라 하고,

    홀로 살아야 하는 스님들의 신세라 하여 중무릇, 또는 중꽃이라고도 한다.

    주로 절에서 재배하는데 비늘줄기의 녹말로 불교 경전을 제본하고, 탱화를 표구하며, 고승들의 진영(眞影)을 붙이는 데에 사용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일본에서 들어 온 귀화식물이며 사찰에 흔히 심고 산기슭이나 풀밭에서도 무리지어 자란다.

    다른 이름으로는 가을가재무릇, 꽃무릇, 지옥꽃이라고도 부르며, 피처럼 붉은 빛깔의 꽃과 알뿌리의 독성 탓에 죽음의 꽃으로 여겨져 왔다.

    그래서 꽃말도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슬픈 추억'이다.

    석산(石蒜)은 한자를 직역하면 돌마늘이라는 뜻이다.

    꽃이 필 때 마늘대처럼 이파리가 하나도 없이 밋밋하고 뿌리 모양이 마늘을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꽃무릇은 잎이 무릇과 비슷한데 꽃이 화려해서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잎이 지고 난 후에 꽃이 피므로 상사화의 일종이기도 하다. 꽃과 잎이 피는 시기가 다르다.

    꽃은 9~10월에 진홍색 꽃 5~10송이가 줄기 끝에 우산모양의 꽃차례로 달리는데, 꽃잎이 심하게 뒤로 젖혀진다.

    꽃잎은 너비가 좁고 그 길이가 꽃술에 비해 매우 짧은데, 꽃술의 길이가 꽃잎의 길이에 비해서 거의 두 배에 달한다.

    꽃 밖으로 길게 나온 꽃술 모습이 특이하고 아름다우며

    수술은 6, 암술은 1개이고 열매를 맺지 못하므로 비늘줄기를 쪼개어 심어서 번식한다.

    비늘줄기는 넓은 타원 모양이고 겉껍질은 검은 색이다.

    키는 30~50이다. 비늘줄기는 넓은 타원형으로 겉껍질이 검은색이고 인경(鱗莖, 비늘줄기)을 석산(石蒜)이라 하며 약용하는데,

    비늘줄기는 알카로이드의 독성이 있어 토하게 하거나(진해 거담제) 창에 찔린 데 약으로 쓰인다.







    안국사(安國祠)


    안국사(安國祠)는 고려시대 목조 건축양식의 대표적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제18호)을 본따 세웠으며,

    정면 5, 측면 2간의 팔각 청기와 지붕이 올려져있어 매우 웅장한 느낌을 준다.




    강감찬장군 영정(姜邯贊將軍 影幀)과 태사문하시중인헌공(太師門下侍中仁憲公) 위패(位牌)








    안국사(安國祠) - 낙성대공원에 있는 강감찬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


    고려시대 명장 강감찬(姜邯贊, 948~1031)의 사당으로 강감찬 장군이 거란군을 물리치고 받은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이라는 호를 따 안국사라고 이름을 지었다.

    1974년 강감찬 장군의 출생 지역인 낙성대(落星垈)에 건립하였고, 사당 주변을 공원화하여 낙성대공원을 조성하였다.

    '큰 별이 떨어진 곳'이라는 의미의 낙성대는 장군이 출생하던 날 출생지에 별이 떨어졌다는 전설에 따라 지은 이름이며,

    1972525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된 낙성대 3층석탑이 경내에 있다.

    안국사는 낙성대공원의 연못 뒤쪽에 있으며 길이 409m의 사괴석(四塊石)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입구에 기념 휘호석과 관리사무실이 있으며 안국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외삼문을 통과하면

    잔디와 수목으로 깔끔하게 조경한 넓은 정원이 펼쳐진다.

    정원 좌우측에는 고려 강감찬장군사적비와 '강감찬 낙성대'라는 명문이 새겨진 삼층석탑이 있으며,

    정원 안쪽의 낮은 계단을 올라 내삼문을 지나면 사당(안국사)이 나온다.

    강감찬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사당은 면적 237.9의 정면 5, 측면 2칸 팔작지붕 건물로

    고려시대 목조건축물인 경상북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浮石寺 無量壽殿)을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 기념식수(은행나무)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낙성대 개원을 기념하기 위하여 1974년 6월 10일 이 은행나무를 하사하시었다.





    강감찬 전시관




    강감찬 카페



    2019 관악 강감찬축제(2019.10.17~19, 낙성대공원 일원) 홍보 플래카드






    낙성대공원과 인접한 서울인헌초등학교




    서울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낙성대역 구내에 설치되어 있는 시(詩) 항아리





    강감찬 장군(姜邯贊 將軍)의 출생(出生)


    고려 구국의 영웅 강감찬(姜邯贊)은 서기 948년 금주(衿州, 현 관악구 봉천동 218-9)에서 탄생 하였다.

    초명은 은천(殷川)이고 뒤에 이름을 고쳐 감찬(邯贊)이다. ()는 전하지 않으나 호()는 울정(蔚亭)이고, 시호는 인헌(仁憲)이다.

    부친은 강궁진(姜弓珍)이며,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운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다.

    강감찬의 탄생 일화는 다음과 같다. 어떤 사신(使臣)이 한밤중에 시흥군으로 들어오다가

    큰 별이 어떤 집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사람을 보내어 찾아보게 하니, 마침 그 집 부인이 사내를 낳았다.

    이 말을 듣고 사신이 마음속으로 신기하게 여겨 그 아이를 데려다 길렀는데, 그가 바로 고려의 재상 강감찬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일화로는 그가 재상이 된 후에 송나라 사신이 그를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가서 절하며 말하기를

    문곡성(文曲星)이 오래 보이지 않더니 여기 와서 있도다!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강감찬이 과거에 장원급제한 문인(文人)이면서도 거란을 물리친 무인(武人)으로 더 알려진 이유로

    문인과 무인의 의미인 문곡성(文曲星 : 文運을 주재하는 별), 염정성(廉貞星 : 刑殺을 주재하는 별) 두 별로 상징되고 있다.

    98336세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되었고 1026년까지 43년간을 관직에 있었다.

    문인으로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분야에 많은 업적을 남기었고, 1030년에는 문하시중(門下侍中, 현재의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101971세라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귀주대첩에 대승을 거두었고, 1031년에 8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을 때는

    조정에서는 3일간 조회를 폐하고, 인헌이라 시호를 내리고 모든 관리에게 명령하여 장례에 참여하게 하였다.

    탄생하던 날 밤 별이 떨어진 데가 이곳이라 뒷사람이 여기를 일러 낙성대라 이름 했으며,

    장군이 탄생한 터를 후세에 전하여 잊어버리지 않게 하려고 3층 석탑을 세웠다.

    그의 시호와 전승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대한민국 무공훈장 중에 인헌무공훈장이 있고 구축함에 강감찬호가 있다.




    강감찬 장군(姜邯贊 將軍)의 약사(略史)


    948년 금천(衿川)에서 출생(서울 관악구 봉천동 218-9) 초명 은천(殷川), 뒤에 이름을 고쳐 감찬(邯贊)이다.

    98336세에 문과에 장원급제

    101063세에 예부시랑(禮部侍郎, 현 차관급)에 오름, 거란 40만 격퇴,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으로 침입하자 조신(朝臣)들은 항복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이를 반대하고

               하공진(河拱辰)으로 하여금 적을 설득하여 물러가게 하였다.

               그 뒤 한림학사·승지·중추원사(中樞院使)·이부상서·서경유수·내사시랑평장사를 역임하였다.

    101164세에 중추사(中樞使) 이부상서(吏部尙書, 현 내무장관)

    101871세에 거란 소배압(蕭排押) 10만 대군 격파, 안국공신(安國功臣) 호 제수

               거란의 소베압이 10만 대군으로 침입해 오자 이듬해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군사 208,300명을 이끌고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무찔렀다.

               그 뒤에 쫓겨가는 적을 귀주에서 크게 격파하고 개선할 때 영파역(迎波驛)에서 왕의 영접을 받았으며,

               검교태위(檢校太尉)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 천수현개국남(天水縣開國男)

               식읍(食邑) 3백호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102073세에 벼슬에서 물러 남, 성남(城南, 성의 남쪽) 별장에 한거하며 저술에 전념

    103083세에 문하시중(門下侍中)

               왕에게 청하여 성을 쌓고 문하시중이 되었으며, 이듬해 특진검교태사시중 천수군개국후(天水郡開國侯)에 봉해졌다.

               저서에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 구선집(求善集) 등이 있다.

    103184세에 별세, 인헌(仁憲)의 시호가 내려졌으며, 현종 묘정(廟庭)에 배향됨.



    귀주대첩(龜州大捷)이란?


    귀주대첩은 우리나라 역사의 자랑인 3대 대첩(살수대첩, 귀주대첩, 한산도대첩) 중 하나이다.

    거란(契丹)3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하였는데 1차는 소손녕(蕭遜寧)8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였으나

    서희(徐熙)의 담판으로 물러갔으며, 2차는 거란의 성종(聖宗)40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침략하였다.

    이때 고려는 강조(康兆) 장군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나가 싸웠으나 크게 패전하여

    왕궁은 불타고 고려왕 현종(顯宗)은 나주로 대피하였으며 수많은 인질이 끌려갔다.

    이후 현종으로 부터 친조(親朝)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거란은 회군했다.

    그러나 1018년 성종은 고려 현종이 친조를 지키지 않고 강동 6반환 요구에도 응하지 않자

    고려에 선전포고를 하고 1, 2차 때의 약점을 보완한 황제의 친위군 10만으로 3차로 침략하여 속전속결을 시도한다.

    현종은 이때 71세의 강감찬 장군을 상원수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대장군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내사사인 박종검(朴從儉)과 병부낭중 유참(柳參)을 판관으로 임명하여,

    그 동안 거란의 내침에 대비해 길러온 208,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막게 했다.

    강감찬은 160cm 정도의 왜소한 체형이지만 적을 감제(瞰制 : 내려다보며 제어함)하는 전략과

    적의 행동을 간파하는 용병술로 거란족 역사에 최대 참패를 안겨주었다.

    강감찬이 군사를 이끌고 북상하여 영주(寧州, 평남 안주)에 주력군을 주둔시켜 흥화진(오늘날의 의주)까지 이르게 하고,

    기병 12,000명을 선발하여 산중에 매복시켰다.

    그리고 굵은 밧줄로 소가죽을 꿰어 강의 물을 막아 담수하였다가 적이 강물을 건너기 시작하자 물을 터 수공(水攻)을 하였다.

    적군이 기습적인 수공에 놀라 당황하여 큰 혼란에  빠진 틈을 놓치지 않고

    김종현(金宗鉉)의 기마병 12,000명이 이들을 덮쳐 큰 손실을 입혔다.

    그러자 소배압(蕭排押)은 흥화진(興化鎭)을 우회하여 개경으로 바로 남진했다.

    강감찬 장군은 개경 수성을 돕기 위해 김종현의 기마부대를 개경으로 급파하는 한편,

    부원수 강민첨으로 하여금 거란군을 추격케 하고 도처에서 적을 무찔러 무수한 사상자를 냈다.

    그러나 소배압의 주력군은 이듬해인 1019년 정월 (음력 22)

    이미 개경에서 100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오늘의 황해도 신계까지 남하하고 있었다.

    거란군이 개경 가까이 쳐들어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현종은 도성 밖의 백성들을 모두 성안으로 불러들이고,

    들판의 농작물은 하나도 남김없이 거두어들이며, 성 밖의 집들까지 모두 부수게 했다.

    그와 동시에 고려 조정에 비밀리에 기병 300여명을 이끌고 금교역(金郊驛, 황해 금천)으로 보내

    어둠을 틈타 적군을 기습하여 큰 타격을 가했다.

    사상자가 늘어나고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소배압은 마침내 퇴각하기 시작했지만,

    강감찬은 퇴각하는 적군을 추격하여 곳곳에서 적군을  무찔렀다.

    강감찬 장군은 차제에 화근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들을 귀주벌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남은 적군이 귀주에 집결하자 마침내 두 장수 모두 피할 수 없는 결전이 귀주 벌판에서 벌어졌다.

    양군의 주력이 맞붙게 된 것이다. 처음의 접전은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다가

    김종현이 이끈 고려군 1만 명이 북상하여 합세하자 전황이 급변했다.

    게다가 때마침 남풍이 비바람과 함께 거란군의 정면으로 들이치자 거란군에 동요가 일어났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강감찬의 호령 일하에 고려군은 총공격을 개시했다.

    이싸움에서 거란의 10만 대군은 몰살하다시피 하고 "살아서 압록강을 넘어 돌아간 자는 겨우 수천 명이었다."라고 고려사에 기록되었다.

    귀주대첩 이후 거란은 다시는 고려를 침범하지 못했다.

    백발 백수가 성성한 72세의 노장군 강감찬이 삼군을 거느리고 개선하여 수많은 포로와 노획물자를 바치니

    현종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도성 밖 우봉 영파역까지 마중을 나와 비단장막을 치고 연희를 베풀며 극진히 환영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는 당시의 모습을 이렇게 전한다.

     임금이 금으로 만든 여덟 가지의 꽃(金花八枝)을 손수 강감찬의 머리에 꽂아준 뒤,

    왼손으로는 강감찬의 손을 잡고 오른손으로 축배를 권하였다.

    국민들의 환호성은 진동하였고, 강감찬은 고맙고 감사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라에서 개선을 기념하여 역의 이름을 홍의로 고치고 역리들에게 특별히 주와 현의 아전들이 쓰는 것과 같은 갓과 띠를 주었다.








    낙성대(落星垈)


    낙성대는 고려시대의 명장 인헌공(仁憲公) 강감찬(姜邯贊)이 태어난 장소이다.

    장군이 태어날 때 이곳에서 별이 떨어졌다고 하여 낙성대라는 이름을 얻었다.

    장군은 거란의 침략을 막나낸 것을 비롯하여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고려 백성은 장군의 이러한 공적을 찬양하여 장군이 태어난 집터에 삼층석탑을 세웠는데

    이 석탑을 서울특별시에서 1964년 파손된 부분을 보수하였으며

    박정희대통령이 강감찬장군의 나라를 위한 슬기와 용맹을 대한민국안보의 의표를 삼기위해

    낙성대공원 조성을 지시 19746월 이곳에 기념공원을 조성하고

    공원 내에 사당을 건립해 영정을 모시면서 봉천동 218번지에 있던 탑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강감찬장군의 설화는 어느 날 밥 중국의 사신이 길을 가다가 큰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별이 떨어진 집을 찾아갔더니 그 집의 부인이 아기를 낳았다.

    그 아기가 강감찬이며 뒤에 송나라 사신이 와서 만나보고 문곡성이 화신임을 확인했다고 한다.

    또한 장군이 소년원님으로 부임 하였을 때 그가 너무 어리다고 얕보는 관속들에게

    뜰에 세워둔 수숫대를 소매 속에 다 집어넣어 보라고 하였다.

    그들이 불가능하다고 하자 그는 "겨우 1년 자란 수숫대도 소매에 다 집어넣지 못하면서 20년이나 자란 원님을

    아전이 소매 속에 집어넣으려고 하느냐!" 하고 호통을 처서 기를 꺾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리고 어느 고을에서 여름날 개구리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관속에서 부적을 써주고 연못에 던지게 했더니,

    그곳의 개구리가 다시는 울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여러 지역에서 전승된다.

    또 그가 남산(또는 삼각산)에 사는 수백 년 된 호랑이가 중으로 변신하여 길을 지나는 사람을

    수없이 해친다는 민원(民怨)을 듣고, 편지로 호랑이를 불러와 크게 꾸짖어

    앞으로 새끼도 평생에 한번만 낳고, 몇몇 산에서만 살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228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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