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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릉(元陵) - 조선 제21대 영조대왕과 계비 정순왕후의 능
    국내 나들이/능, 원, 묘(陵 園 墓) 2019. 11. 7. 05:38

    원릉(元陵) - 조선 제21대 영조와 두 번째 부인 정순왕후의 능


    조선 제21대 왕인 영조(英祖, 1694~1776, 재위 1724~1776)는 조선시대 역대 왕 가운데 가장 긴 52년간 임금의 자리에 있었다.

    1724년 제20대 왕 경종(景宗)이 대를 이을 자식이 없이 일찍 돌아가시자

    숙빈 최씨(淑嬪 崔氏)의 아들인 영조[연잉군 延礽君]가 왕위에 올랐다.

    영조는 임금의 자리에 있는 동안에 여러 방면에서 치적을 남기는데 정치적으로는 탕평책(蕩平策)을 실시하여

    노론과 소론이 융합하도록 노력하였고,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려고 균역법(均役法)을 실시하였다.

    영조의 비는 정성왕후(貞聖王后)와 정순왕후(貞純王后) 두 분이 있다.

    정성왕후는 1704(숙종 30)에 당시 연잉군이었던 영조와 혼인하였으며,

    1757(영조 33)에 돌아가셔서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에 있는 홍릉(弘陵)에 안장되었다.

    본래 영조는 정성왕후 홍릉 옆을 비워두어 자신이 안장될 터로 여겼으나 두 번째 비인 정순왕후와 현재 지역에 안장되었다.

    정순왕후(1745~1805)15세에 당시 66세인 영조와 가례를 올렸으며,

    1800년에 정조가 돌아가시고 어린 순조가 임금  자리에 오르자 왕을 대신하여 3년간 나랏일을 돌보았다.

    영조와 정순왕후 원릉은 1758(영조 34)에 완성된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의 내용을 충실히 구현하였으며,

    원릉 비각에는 영조의 손자인 정조(正祖)가 직접 쓴 표석이 남아 있다.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 (인창동) 구리 동구릉

     



    홍살문


    홍살문은 제향 공간의 입구에 세워진 문으로 화살 모양의 붉은 문이라는 뜻으로 죽은 사람의 영역인 사당과 묘역 입구에 설치한다.




    참도(參道)


    참도는 왕릉에서 홍살문과 정자각 입구까지 깔아 놓은 이중의 박석(薄石)길이다.

    한 쪽은 높고 다른 한 쪽은 조금 낮게 조성되었다.

    높은 쪽인 왼 쪽 길은 능묘에 모셔진 혼령의 길로, 제향시 향과 축문을 들고 가는 길로 향로(香路) 또는 신도(神道)라 표현하기도 하며,

    낮게 만들어진 오른쪽 길은 선왕의 능묘에 제향을 드리러 온 왕이 걷는 길로 어로(御路) 또는 어도(御道)로 표현하기도 한다.





    수라간(水剌間)


    수라간은 정자각의 서쪽, 수복방 건너편에 있으며 제향 음식을 준비하는 부엌 역할을 하는 곳이다.



    수복방(守僕房)


    수복방은 정자각의 동쪽에 위치하고 능을 지키는 수복(守僕)이 머무는 공간이다.






    정자각(丁字閣)


    정자각은 제향 공간의 중심 건물로 모양이 정()이라는 글자와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제향을 모시는 정전(正殿)과 수행한 향관들이 배열하는 배위청(拜位廳)으로 나뉜다






    정자각 계단석(丁字閣 階段石)


    제향을 지내러 정자각으로 올라갈 때 사용하는데, 왼쪽의 난간이 둘러쳐진 계단은 돌아가신 분이 이용하고,

    오른쪽 난간이 없는 계단은 살아있는 사람(제향을 올리는 임금)이 이용하는 계단이다.




    제수진설도(祭需陳設圖)

    원릉 제향일(元陵 祭享日) - 매년 422





    예감(瘞坎)


    정자각 뒤 서쪽에 있는 사각형의 석함(石函)으로

    제향(祭享)을 마친 뒤 축문(祝文)이나 혼백(魂帛) 등을 태우고 이를 묻기 위해 판 구덩이







    원릉(元陵)의 능비(陵碑)


    영조(英祖)의 능비는 2개이다. 하나는 정조 때 세운 영종 능비이고, 다른 하나는 고종 때 세운 영조 능비이다.


    조선국 영종대왕 원릉 (朝鮮國 英宗大王元陵)

    조선국 영조대왕 원릉 (朝鮮國 英祖大王元陵)


    처음에는 영종(英宗)이었던 능호가 고종 때 영조(英祖)로 바뀌었다.

    영조는 숙종(肅宗)의 후궁 숙빈(淑嬪) 최씨 소생이었으나 선왕이자 형인 경종(景宗)이 후사가 없어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사후에 '영종(英宗)'이란 묘호로 불렸지만 나중에 '영조(英祖)'라고 고쳐졌다.

    0(), 0()으로 부르는 왕의 능호 또는 호칭에 대해서는 많은 이설이 있다.




    조선국 정순왕후부좌(朝鮮國貞純王后祔左)




    금천교(禁川橋)


    금천교는 능 입구에 놓여 있는 다리로, 속세에서 신성한 공간으로 건너는 상징물로서 궁궐에도 입구에 금천교가 놓여 있다





    석물 부재(石物 部材)






    숲속의 연못





    가을의 정취를 느끼는 단풍





    영조 어진(英祖 御眞) - 보물 제932


    조선시대 임금인 영조(재위 17241776)의 초상화이다.

    이 그림은 51세 때 모습을 그린 것으로, 가로 68, 세로 110크기의 비단에 채색하여 그렸다.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인데, 머리에는 임금이 쓰는 익선관을 쓰고, 양어깨와 가슴에는 용을 수놓은 붉은색의 곤룡포를 입고 있다.

    얼굴에는 붉은 기운이 돌고 있고 두 눈은 치켜 올라갔으며 높은 콧등과 코 가장자리, 입의 양끝은 조각처럼 직선적으로 표현되었다.

    가슴에 있는 각대 역시 위로 올라가 있고, 옷의 외곽선을 따로 긋지 않는 등 조선 후기의 초상화 양식이 보인다.

    이 초상화는 영조 20(1744)에 장경주, 김두량이 그린 그림을 1900년에 당대 일류급 초상화가들이 원본을 보고 그린 것이다.

    비록 원본은 한국전쟁으로 불타 없어졌으나 원본을 충실하게 그린 것으로 현존하는 왕의 영정 가운데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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