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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릉(綏陵) - 문조(文祖) · 신정왕후(神貞王后)의 능
    국내 나들이/능, 원, 묘(陵 園 墓) 2019. 11. 8. 04:00

    문조(文祖) · 신정왕후(神貞王后)의 능, 수릉(綏陵)


    문조(1809~1830)는 제23대 왕인 순조(純祖)의 아들이며, 24대 헌종(憲宗)의 친아버지이다.

    문조는 세자가 된 후에 돌아가셔서 왕이 되지는 않았지만 후대에 추존 왕이 되었다.

    문조와 그 무덤을 지칭하는 이름이 많이 있는데 1830년 돌아가신 후에 이름을 효명세자(孝明世子)라고 올리고,

    무덤의 이름도 연경묘(延慶墓)로 불렀다.

    1834(헌종 즉위년) 아들인 헌종은 효명세자를 익종(翼宗)으로, 능 이름(陵號)도 수릉(綏陵)으로 높였다.

    그 후 대한제국이 선포(1897)되고 2년 뒤인 1899(광무 3)에 황제추존으로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로 높이게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문조의 비 신정왕후(1808~1890)12세에 효명세자의 세자빈(世子嬪)이 되었고,

    1834년 아들인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26대 왕 고종(高宗)이 왕위에 오를 때에도 생존하였다.

    신정왕후는 오랜 기간 조선 정계에 관여하고, 친정 인물을 다수 등용하여 19세기 세도정치(勢道政治)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문조 수릉은 1830년 연경묘로 조성되었을 때 서울시 성북구에 있는 경종 의릉 근교에 있었다.

    이후 1846(헌종 12) 풍수 문제로 현 용마산 아래로 옮겨지고,

    1855(철종 6)에 이곳으로 옮겨져 동구릉 중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조성되었다.

    현재의 수릉은 1890년 신정왕후가 문조와 함께 묻힌 합장릉(合葬陵) 형태로 조성되었다.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 (인창동) 구리 동구릉

     



    홍살문


    홍살문은 제향 공간의 입구에 세워진 문으로 화살 모양의 붉은 문이라는 뜻으로

    죽은 사람의 영역인 사당과 묘역 입구에 설치한다.




    참도(參道)


    참도는 왕릉에서 홍살문과 정자각 입구까지 깔아 놓은 이중의 박석(薄石)길이다.

    한 쪽은 높고 다른 한 쪽은 조금 낮게 조성되었다.

    높은 쪽인 왼 쪽 길은 능묘에 모셔진 혼령의 길로, 제향시 향과 축문을 들고 가는 길로 향로(香路) 또는 신도(神道)라 표현하기도 하며,

    낮게 만들어진 오른쪽 길은 선왕의 능묘에 제향을 드리러 온 왕이 걷는 길로 어로(御路) 또는 어도(御道)로 표현하기도 한다.






    정자각(丁字閣)


    정자각은 제향 공간의 중심 건물로 모양이 정()이라는 글자와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제향을 모시는 정전(正殿)과 수행한 향관들이 배열하는 배위청(拜位廳)으로 나뉜다.






    정자각의 신계(神階), 동계(東階)


    정자각에 오르는 오른편의 것을 신계(神階), 동계(東階)라 한다.

    난간이 둘러쳐진 신계는 혼령이 오르내리는 길이고, 난간이 없는 동계는 제향을 올리는 왕, 제관이 오르는 계단이다.













    조선국 익종대왕 수릉(朝鮮國 翼宗大王 綏陵) 신정왕후 부우(神貞王后 祔右)




    대한 문조익황제 수릉(大韓 文祖翼皇帝 綏陵) 신정익황후 부우(神貞翼皇后 祔右)




    산신석(山神石)


    예감(瘞坎)과 마주보는 동쪽에는 장방형의 판석이 놓여 있는데

    능침이 위치한 산신에게 제향을 올리는 곳으로 산신석(山神石)이라고도 하고,

    달리 환인(桓因), 환웅(桓雄), 환검((桓儉)의 삼신에게 제물을 올리는 곳이라는 뜻의 삼신석(三神石)이라고도 한다.




    예감(瘞坎)


    정자각 뒤 서쪽에 있는 사각형의 석함(石函)으로 제향(祭享)을 마친 뒤

    축문(祝文)이나 혼백(魂帛) 등을 태우고 이를 묻기 위해 판 구덩이





    수릉(綏陵) - 추존 문조와 신정왕후


    수릉은 황제로 추존된 문조(文祖, 1809~1830)와 신정왕후(神貞王后, 1808~1890) 조씨의 능이다.

    문조는 세자 시절 아버지 순조를 대신하여 정치를 하면서, 조선 후기의 예악(禮樂)을 다시 정비하였고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2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시호를 효명세자(孝明世子)라 하였다.

    아들 헌종(憲宗)이 왕위에 오르자 익종(翼宗)으로, 1899(광무 3)에 다시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로 추존되었다.

    신정왕후는 1819(순조 19) 왕세자빈(王世子嬪)이 되었고 아들 현종이 왕위에 오르자 대비가 되었다.

    철종이 세상을 떠나자 대왕대비의 자격으로 고종을 왕위에 올린 후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일반적으로 왕릉은 정자각에서 능을 봤을 때 왼쪽에 왕을, 오른쪽에 왕후를 모신다.

    이와는 달리 수릉은 오른쪽에 왕을 모셨는데,

    이는 세상을 떠났을 때 신분의 차이(왕세자와 대왕대비) 때문에 그렇게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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