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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흥도 익령군길(靈興島 翼靈君路) - 십리포 해변길
    국내 나들이/섬(島)으로 2020. 9. 5. 19:07

    영흥 익령군길(靈興 翼靈君路)

    십리포해변길(내1리)

     

     

    영흥도(靈興島) 이야기

     

    영흥도의 명칭은 고려가 망하자

    고려 왕족의 후예인 왕씨가 영흥도에 피신 정착하여 살고 있는 동안에

    영흥도에서 제일 높은 산인 국사봉에 올라와 나라를 생각하며 한양을 향하여

    고려국이 다시 흥할 것을 신령께 기원한 곳이라 하여 영흥도(靈興島)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십리포지명에 관한 유래

     

    십리포해수욕장은 '영흥도 선착장에서 10리 정도 떨어져 있다'고 해서

    십리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곳 십리포해변은 인천광역시에서 서남방으로 약 32㎞ 떨어진 영흥도의 북쪽에 위치한 해변으로써

    해변의 총길이가 1km, 폭 30m의 왕모래와 작은 자갈로 이루어진 특이한 지역으로

    해변 서쪽으로는 기암괴석이 길게 뻗어져 잇어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야간에는 수평선 너머로 인천광역시 및 인천국제공항의 찬란한 조명이 어우러져

    한폭의 그림처럼 보이는 곳이다.

    또한 해변의 후면에는 150년 이상된 300그루의 소사나무 군락지역으로 유명하며,

    전국적으로 유일한 괴수목 지역으로 1997년 인천광역시 보호수로 지정하여 이를 보호하고 있다.

    소사나무 숲은 겨울엔 방풍막이 되고, 여름엔 ‘십리포 에어컨’이 되기도 한다.

     

     

     

    영흥도 지명에 관한 유래

     

    고려말 왕족 익령군(翼靈君) 왕기(王埼)는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지는 것을 알고

    비운을 맞을까 두려워 성과 이름을 바꾸고 온 가족과 함께 집을 떠나

    사람이 살지 않는 섬으로 가서 숨어 살기로 했다.

    무작정 배를 띄웠지만 항로도 잘 모르는데다 파도가 심하여

    구사일생 끝에 이 섬, 영흥도에 닿았다고 한다.

    영흥도는 당시 왜구가 창궐하여 사람들이 살지 못하는 섬이었다.

    왕기는 왕족으로서 해보지 못했던 고된 일이지만

    버려진 땅을 일구고 짐승을 기르고 고기를 잡으면서 섬에 정착해갔다.

    그러면서도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매일 높은 산에 올라가서 개경을 바라보았는데,

    이산은 '국사봉(國思峰)'이라고 이름 지었다.

    섬으로 들어온지 3년 만에 고려가 망하고 대부분의 왕족들이 거제도에서 수장되어

    몰살당하는 비극을 겪지만 미리 피신했던 왕기 일가는 환난을 모면하고

    이곳에 터를 잡아 목동일을 하며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 섬의 이름이 익령군의 '영(靈)'자를 따서 영흥도가 되었으며,

    "영혼이 흥하는 섬"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런 이름 때문에 낭만적인 섬으로 각광받고 있으며,

    2001년 건설된 영흥대교를 통해 주말이면 많은 탐방객들을 반가이 맞이하고 있다.

     

     

    영흥도의 연혁

     

    인천 남서부 앞바다에 위치한 영흥면은 영흥도를 비롯하여

    선재도, 측도, 부도 등 4개의 유인도와 18개의 무인도가 있다.

    고구려가 475년경 남양만지역에 당성군(唐城郡)을 설치하면서 이에 속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가 중국과 통교한 진흥왕 14년(553)에도 이에 소속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성군은 고려 현종 9년(1018) 수주(水州, 현재의 수원지역)에 속하였다가

    그후 인주(仁州, 현 인천지역)에 각기 속하였다.

    명종 2년(1172) 감무(監務)가 설치되었으며, 충선왕 2년(1310)에는 남양부(南陽府)가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영흥면 지역은 남양도호부에 소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765년경에 편찬된 ‘여지도서‘에는 남양도호부는 14개 면으로 편제되었는데,

    영흥면 지역은 아마도 대부도면(大阜島面)에 소속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종 8년(1871) 5월 대부도(大阜島)에 진(鎭)이 설치되었는데,

    이에 따라 영흥면 지역도 고종 22년(1885)부터는 대부진(大阜鎭) 관할에 있다가,

    고종 31년(1894) 대부진이 폐지되자 다시 암양부에 속하였다.

    1914년 4월 1일 대대적인 지방행정구역의 개편과 군, 면의 통폐합으로

    영흥면 지역은 신설된 부천군(富川郡)에 편입되었다.

    1966년 영흥면 자울리(紫月里)에 자월출장소(紫月出張所)가 설치되어

    자월리와 대이작리, 소이작리를 관할하였다.

    이어 1973년 영흥면은 영종, 북도, 용유, 덕적, 대부면과 함께

    부천군에서 옹진군으로 편입되었다.

    영흥면의 자월출장소는 1983년 자월면으로 승격하여 영흥면에서 분리되었으며

    1995년 인천광역시로 통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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