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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의 12사도 천사조각상(예수의 12使徒 天使彫刻像)
    국내 나들이/섬(島)으로 2021. 5. 4. 20:10

    예수의 12사도 천사조각상(예수의 12使徒 天使彫刻像) - 병풍도(屛風島)

     

    전라남도 신안군에서는 1004섬(천사의 섬) 신안군을 널리 알리고 관광활성화를 위해

    증도면 병풍도에 예수의 12사도 천사조각상을 맨드라미 공원에 설치됐다.

    천사조각상은 순례자들이 지나는 선착장과 병풍도가 한눈에 보이는 맨드라미 공원,

    작은 예배당으로 향하는 노두길 입구 등에 설치하여 병풍도를 지붕없는 미술관으로 만들었다.
    예수의 12사도 천사조각상은 세계적인 성상(聖像)조각가인 최바오로 선생이 제작 설치했다.

     

     

    베드로(Peter)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에서는 수제자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지금까지 계속되는 교황직을 최초로 받은 인물로 생각한다.
    어부였던 베드로는 예수 활동 초기에 제자로 부름받았고,

    뒤에 예수에게서 반석이라는 의미의 '게파'라는 이름을 받았다.

    같은 뜻의 라틴어 petra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알려진다.

    신약성경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는 매우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예수의 승천 후 그는 예수를 대신하여 교회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으며

    헤로데 아그리파세에게 붙들렸다가 도망하여 소아시아 및 안티오키아에서 전도하였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유다인들은 계속해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였고,

    베드로를 포함한 몇 몇 사도들은 붙잡혀 무서운 채찍질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 벌을 강한 인내로 참으면서 구세주를 위하여

    고통을 당하는 것을 값진 것으로 생각하고 기뻐하였다.

    헤로데 아그리빠는 야고보를 죽였을 때, 유다인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마저 죽이려고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밤에 주의 천사의 도우심으로 풀려나 계속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베드로는 많은 이적을 행하고 복음을 전한 후 로마로 갔다.

    그 때 바오로도 거기에 함께 있었다.

    그 당시의 로마의 황제는 네로였는데, 로마시에 큰 불이 나자 그 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리고 그들 가운데 수백 명을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도록 명하였다.

    이 때 로마에 시몬이라고 하는 마술사가 있었는데,

    그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자기는 할 수 있다고 떠벌였다.

    그가 약속한 날 그가 공중을 나는 것을 보려고 많은 무리가 모였는데

    그 가운데에 베드로와 바오로도 있었다.

    마술사 시몬은 처음에 실제로 어떤 놀라운 묘기를 보였고 사람들은 그 묘기에 감명을 받았다.

    그러나 그 때 베드로와 바오로가 무릎을 꿇고

    그 행위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자,

    시몬은 그 즉시로 땅에 떨어졌고 그의 양 다리는 부러졌다.

    네로 황제는 마술사 시몬을 대단히 좋아하였기 때문에 사도들에게 크게 노하였고,

    더구나 사도들이 자신의 가족 가운데 몇 사람을 기독교로 개종시키자

    더욱 분노하여 베드로와 바오로를 9개월 동안 감옥에 가두었다.

    이 기간 동안에 그들은 간수장들과 그 밖의 47명을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9개월의 복역을 끝내고 베드로는 밖으로 끌려 나와 채찍질을 당한 후

    머리를 거꾸로 하고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주님과 똑같은 방법으로 죽을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스스로 이처럼 고통스러운 자세를 취하였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안드레(Andrew, 안드레아)

     

    안드레아는 베드로의 동생이다. 그는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리스파트레 지방 총독은 안드레아가 자기가 예배하는 우상을 공격하는 설교를 하자

    그를 죽이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안드레아는 굽히지 않고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예수님과 복음에 대해서 설교하다가 붙잡혔다.

    길이가 꼭 같은 두 조각의 나무로 만들어진 높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선고를 받았으나

    그를 좀 더 천천히 죽이기 위하여 못을 박지 않고 줄로 꽁꽁 묶어 죽이기로 하였다.

    안드레아의 장엄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용기에 대해서 한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안드레아는 십자가가 준비된 것을 보았을 때

    그의 안색이나 용모가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전혀 괴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타는 사랑으로 가득 차 이렇게 외쳤다.

    “오, 십자가여! 나는 그대(십자가)를 몇 번이고 환영하며 쳐다본다.

    나는 그대에게 달렸던 분의 제자이다. 나는 기쁨과 소망에 찬 즐거운 마음으로,

    항상 그대(십자가)에게 달리신 나의 스승을 사랑하였고,

    그 십자가를 늘 포옹하고 싶은 갈망이 있었다. 오! 반가운 십자가여!”

    안드레아 삼일 내내 십자가에 달려서 무서운 고통을 당하였으나

    시종일관 자기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라고 말하였다.

    고통 중에도 변치 않는 그의 태도에 감화를 받은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기 시작하였고,

    총독에게 그를 십자가에서 내려놓자고 하였다.

    총독도 결국 거절할 수 없어 밧줄을 끊고 내리도록 하였으나

    마지막 줄이 떨어질 때 안드레아는 땅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너무나 높게 만들어진 십자가였기 때문이다.

     

     

     

    야고보(James the son of Zebedee, 큰야고보)

     

    야고보는 제베데오의 아들로서 갈릴리 사람이었고, 사도 요한의 형이다.

    야고보는 사도들 가운데 첫 번째로 순교 당한 사람이다.

    헤로데 아그리빠가 로마 황제 칼리쿨라에 의하여 유다 총독이 되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고 제일 처음으로 야고보를 복수의 표적으로 삼았다.

    야고보가 죽게 되어 끌려 나왔을 때 그에 대하여 거짓 증언을 한 사람이

    야고보와 함께 형 집행 장소까지 함께 걸어갔다.

    그 사람은 야고보가 두려움에 떨며 얼굴이 창백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야고보는 오히려 승리자처럼 기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크게 놀랐고, 죽으러 가는 야고보가 믿는 예수가 참된 하느님이심에 틀림없다고 깨달았다.

    그래서 그 사람 자신도 그리스도인이 되겠다고 자처하여 사도 야고보와 함께 죽었다.

    두 사람은 결과적으로 같은 날, 같은 칼로 목 베임을 당하였는데 AD 44년 경의 일이다.

     

     

     

    요한(John)

     

    예수께서 가장 사랑하시던 제자로 알려진 요한은 그리스에 많은 교회를 세웠다.

    그가 에페소에 있을 때, 도미시안 황제는 그를 로마에 보내어

    끓는 기름 가마 속에 던지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끓는 기름 가마 속에서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해를 입지 않고 기적적으로 살아나게 되었다.

    도미시안(Domitian)은 할 수 없이 그를 밧모섬으로 추방하였다.

    도미시안의 후계자인 네르바 황제가 요한을 재 송환하였으나

    다시 기적적으로 살아나게 되어 밧모섬으로 또 유배를 보냈다.

    요한은 거기서‘요한 묵시록’이라는 놀라운 계시의 책을 썼다.

    그는 나이가 많을 때까지 살다가 자연사 하였다고 한다.

    그는 사도들 중에 유일하게 참혹한 죽음을 면한 사람이다.

    ‘요한 묵시록’은 그래서 완성될 수 있었다.

     

     

     

    빌립(Philip, 필립보)

     

    필립보(Philippus) 또는 빌립보, 빌립은 갈릴래아 베싸이다 출신으로

    본래 세레자 요한의 제자였으나,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를 따라가 제자가 되어

    사도들의 명단에 등재되었고 나타나엘을 예수에게 인도하였다(요한 1장43~51절).

    베싸이다에서 예수가 오병이어의 기적, 즉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생선을 가지고

    5천 명이나 되는 무리를 배불리 먹이려고 할 때 자신을 따라온 수많은 군중들을 보고 필립보에게

    “이 사람들이 먹을 만한 빵과 물고기를 어디에서 사면 좋겠느냐?” 하고 시험하자

    그는 “2백 데나리온의 빵과 물고기를 사서 조금씩 나누어 준다 하더라도 도저히 당할 수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요한 6장5~7절).

    필립보는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하던 날에도 그를 만나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그리스인들을 예수에게 소개하였다(요한 12장20~23).

    또한 최후의 만찬에서 성체성사를 세운 예식이 있은 후 예수가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 분을 알게 되었다.

    아니, 이미 만났다” 라고 한 말에 대해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만족하겠습니다” 하고 간청하자, 예수는 필립보에게

    “내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었는데 아직도 나를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라고 대답하였다(요한 14장8~9).

    필립보는 복음을 전파하는 중요한 임무를 띠고 이방지역에 보내졌는데

    특히 아시아 지방에서 설교하며 복음을 전파하도록 파견되었다.

    필립보는 사도로서 열심히 일하였다. 프리기아 전도 여행 중일 때

    그가 히에라볼리에 이르자 그 지방 주민들이 큰 뱀을 예배하는 것을 보았다.

    필립보는 그 뱀을 파괴하는데 성공하고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다.

    그러자 지도급에 있는 자들, 특히 미신을 이용하여 많은 돈을 번 제사장들은

    화가 나서 그를 투옥시켰고, 수없이 채찍질을 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이 일은 서기 52년의 일이었다.

     

     

    바돌로매(Bartholomew, 바르톨로메오)

     

    바르톨로메오는 여러 나라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잔인하게 폭행당하였으며,

    포악한 우상 숭배자들에 의하여 십자가에서 처형당했다.

    바르톨로메오는 소아시아 프리기아를 거쳐 인도에서 선교 활동을 했고,

    그리스 말로 쓰여진 마태오 복음을 히브리 말로 옮겼다고 한다.

    에티오피아, 메소포타미아, 파르티아(지금의 이란), 리카오니아(지금의 터키),

    아르메니아에서 선교활동을 하였고,

    그는 마귀들린 아르메니아 폴리미오스왕의 공주를 치유한 후

    왕을 개종시켰다가 왕의 측근들과 이교 사제들에 의해 체포돼

    산체로 껍질이 벗겨지고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

    유해는 로마 테베르강가에 있는 성 바르톨로메오 성당 제대밑에 안치돼 있다.

    그의 순교 장면은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경당에 그린 벽화중 '최후의 심판' 에서 잘 드러난다.

    심판자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 옆에 성모마리아,

    그리고 그리스도의 발아래 있는 두사람의 성자 가운데,

    오른쪽 성자가 벗겨진 사람의 피부껍질을 들고 있는 이가 바로 사도 바르톨로메오 이다.

    예수님의 부활 후에 자신을 나타내 보인 사람 중의 하나이며,

    예수님은 그를 보고 '간사한 것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셨다.

    바르톨로메오는 '주님이 자기 마음을 미리 아시고,

    또 필립보와 만나기 전에 무화과 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며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과 이스라엘의 왕으로 믿었다.

     

     

     

    도마(Tomas,토마스)

     

    주님의 부활을 처음에는 의심하였으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제일 먼저 고백한 사람이다.

    그의 아람어 이름(Te⁾oma)과 그리스어 이름(Didymos)은'쌍둥이'를 뜻한다.

    〈요한의 복음서〉 11장 16절에는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시리아인들은 그를 유다 토마(즉 쌍둥이 유다)라고 부른다.

    토마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은요한의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있고,

    예수에 대한 그의 헌신적인 사랑은〈요한의 복음서〉11장5~16절에 잘 나타나 있다.

    예수가 유대 지방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제자들은

    예수에 대한 유대인들의 적개심("그들은 지금 선생님을 돌로 치려 하고 있습니다")을 지적했는데,

    이때 토마는"우리도 함께 가서 그와 생사를 같이합시다"라고 말했다.

    최후의 만찬(요한14:1~7)에서 예수가 "나는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가

    내가 있는 곳에 같이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라고 말했을 때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해 "우리가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라고 물었고,

    예수는 이 물음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대답했다.

    토마의 삶에서 가장 잘 알려진 사건은 '의심하는 토마'라는 말이 생겨나게 한 사건일 것이다.

    〈요한의 복음서〉20장 19~29절을 보면 예수가 부활해서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났을 때 토마는 없었다.

    부활한 예수를 만난 제자들이 그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자 토마는 예수가 부활한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손으로 만져 보아야만 믿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 특별히 토마에게 자신의 상처를 만져보도록 했을 때

    토마는'나의 주님,나의 하느님'이라는 진리를 깨닫고,

    예수의 신성을 명백하게 인정한 첫번째 사람이 되었다.

    토마에 대한 그뒤의 기록은 확실하지 않다.

    4세기 카이사레아의 주교 유세비우스가 쓴〈교회사Ecclesiastical History〉에 따르면

    토마는 파르티아(지금의 코라산)에서 복음을 전파했다고 한다.

    후대의 그리스도교 전승에 따르면 토마는 인도까지 가서 자신의 사도직을 수행했으며,

    그곳에서 시리아 말라바르 그리스도교(토마교)의 창시자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시리아에서 처음 씌어 외경〈토마행전Acts of Thomas〉에는

    토마가 마드라스(지금의 첸나이)의 밀라포레 왕의 재위중에 순교했다고 되어 있다.

    그곳에는 상토메 산과 전통적으로 토마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전해지는 상토메 대성당이 있다.

    그의 유물은 서방세계로 옮겨져 결국 이탈리아의 오르토나에 안치된 것으로 추측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토마는 인도-파르티아의 왕인 곤도페르네스를 방문했는데,

    이 왕은 그에게 왕궁을 건축하는 책임을 맡겼다고 한다(〈토마행전〉에 보면 토마는 목수였음).

    그러나 토마는 왕이 그에게 맡긴 돈을 자선비용에 썼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혔다.

    비록〈토마행전〉의 몇몇 부분은 있음직한 이야기지만 그 증거가 명백하지 않다.

    앞서 말한 외경 외에도 토마와 관련되거나 그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책으로는

    〈토마 복음서Gospel of Thomas〉(1945년 어퍼이집트에서 발견된 콥트 영지주의 사본 중에 들어 있음)·

    〈강건한 사람 토마의 책The Book of Thomas the Athlete〉·〈마리아의 죽음에 대한 요한의 메시지Evangelium Joannis de obitu Mariae〉등이 있다.

    그밖에1905년A. E.메들리콧의〈인도와 사도 토마India and the Apostle Thomas〉가 출판되었으며,

    1929년F. A.드크루즈의〈인도의 사도 토마St. Thomas the Apostle in India〉가 출판되었다.

     

     

     

    마태(Matthew, 마태오)

     

    마태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리스도교 전승에서는 일찍부터 그를 신약 성경에 첫 번째로 실려 있는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로 생각해 왔다.

    마태오는 생산품을 시장으로 운반하던 지역 상인들이나 농부들 또는

    그 지역 주요 도로를 지나는 장거리 이동 대상(隊商)들로부터

    통행세나 운송세를 받던 카파르나움 지역의 유다인 세리였다.

    그 당시 세리들은 자기 지역에서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따내기 위해

    로마 당국에 미리 계약 금액을 지불해야만 했다.

    따라서 얼마만큼의 자기 수입을 올리기 위해서는 두말할 필요 없이

    로마에 내야 했던 책정 금액 이상을 벌어들여야만 했다.
    그래서 유다인들 사이에서 세리들은 압제자 로마에 협력하여 동족들을 착취함으로써

    자기 배를 채우는 데 급급한 반역자들로서 멸시의 대상이었다.

    그 당시 세리라는 말은 부정직함의 대명사처럼 인식되었다.

    다시 말해서 세리들은 살인자나 강도, 매춘부들 그리고 이방인이나 죄인들과 같이

    율법적으로 부정한 부류에 속한 자들로 취급되어 소외당했다.

    세리였던 마태오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분의 제자가 되었다.

    마르코 복음 2장 13-17절과 루카 복음 5장 27-32절에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의 이름을 레위라고 칭함으로써

    마태오 복음 9장 9-13절의 내용과는 약간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사실상 마태오와 레위는 동일 인물인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레위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 때 마태오라는 이름을 받아 다른 제자들인

    시몬 베드로나 디디모스(쌍둥이) 토마스처럼 두 개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마태오의 아버지는 알패오였는데 아버지의 이름이 역시 알패오인

    예수님의 또 다른 제자 야고보와 형제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마태오의 태도에서는 깊은 영적인 신념과 단호함,

    그리고 순종과 자기희생의 모습이 보인다.

    마태오의 회개는 이제까지와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 마태오가 회개한 후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세리들과 죄인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을 함께 초대한 것을 보면, 그는 영적으로 목말라 있던 사람이었고

    또한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아마도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이 자기처럼 그리스도를 맞아들이기를 바랐을 것이다.

    마태오가 마련한 잔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의 사명의 한 특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죄인으로 취급받고 소외당하던 마태오가 회개하여 예수님의 열두 사도 중 하나가 된 것은

    교회 안에서는 모든 이가 회개와 믿음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초대에

    응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뚜렷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신약 성경에서 마태오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마지막 내용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모여 마태오가 다른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던 )모습이다.

    그 이후의 마태오의 행적에 대해서는 몇 년간 팔레스티나에서 지낸 후

    에티오피아와 다른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전승만이 전해질 뿐이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작은 야고보(James the son of Alphaeus)

     

    사도 요한의 형 야고보와 구별하기 위하여 ‘작은 야고보’라 불린다.

    예수님의 승천 후 예루살렘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모든 기독교인들과 개종자들을 위하여 ‘야고보서’를 써서

    오류를 막는데 최선을 다하고 복음을 전파하였다.

    개종자들이 많아지자 예루살렘에 있던 유다인들은 기독교인들에게 크게 분개하여

    야고보에게 복수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들은 대중을 선동하여 그를 습격하여 넘어뜨리고 쳐서 상처를 내고 돌로 쳐 죽였다.

     

     

    다대오(Thaddaeus, 타대오)

     

    유다 타대오(?~62년)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다대오’로,

    누가복음(6:16)과 사도행전(1:13)에는 유다로 기록돼 있다.

    유다는 ‘존경받는’ 또는 ‘찬미하리’라는 뜻이며, 타대오는 ‘마음이 크고 넓다’는 뜻이다.

    소(小) 야고보와는 형제 관계이며, 이스카리옷 유다와는 다른 사람이다.

    그리스도교의 성인으로서 축일은 10월 28일이다. 상징물은 책과 곤봉·배이다.

    회화에서는 같이 순교한 시몬과 함께 있는 모습으로 종종 표현된다.

    누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는 그를 유다라고 부르고 있지만(누가 6,16; 사도 1,13),

    마태오 복음서와 요한 복음서에서는 그를 타대오라고 부른다.

    신약성서에서는 그에 관한 언급은 유일하게 사도들의 이름을 나열할 때 뿐인데,

    총 4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최후의 만찬 당시 유다 타대오는 예수를 향해

    “주님, 주님께서 왜 세상에는 나타내 보이지 않으시고

    저희에게만 나타내 보이시려고 하십니까?” 라고 물어보기도 하였다.(요한 14,22)

    전승에 의하면, 성령강림 이후 유다 타대오는 시몬과 함께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 복음을 전파하였고, 페르시아 제국지역으로 가서 포교 활동을 벌였는데,

    예수에 대해 설교한 뒤 그곳의 신상을 파괴하였다.

    그러자 그 속에서 악마가 튀어나왔다.

    자신들이 여태껏 섬겨왔던 신상이 부서지자 분노한 현지인들은

    그들에게 달려들어 포박한 후 죽였는데,

    순교의 모습은 십자가형에 처해졌다고도 하고 활에 맞아 순교했다고도 한다.

    현지인들은 다대오와 시몬이 3500여 명의 기독교인들과 함께 매장됐다고 전해진다.

    18세기 말부터 로마 가톨릭교도들 사이에서 어려움에 닥쳤을 때 그에게 대도를 많이 하게 되었다.

     

     

     

    시몬(Simon)

     

    열혈당원이었다. 열혈당원은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키려는 독립운동가들이다.

    마우리타니아와 아시아의 여러 지방에서 전도를 했으며 멀리 영국에까지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을 개종시킨 후74년에 이방인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성서에 나오는 사마리아의 한 마을 깃타 출신으로 보인다.

    〈신약성서〉 〈사도행전〉 8장 9~24절에 따르면, 시몬은 그리스도교도가 된 후에

    사도 베드로와 요한에게서 성령을 전달하는 초능력을 사려고 했는데,

    여기서 신성한 물건이나 교회의 직책을 사고판다는 뜻의 성직매매(simony)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후에 초기 그리스도교의 몇몇 저서에서는 시몬이 그리스도교 탄생 이후의

    영지주의를창시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교 교회의 전형적인 이단으로 언급되었는데,

    이 영지주의는 비밀스러운 지식을 얻음으로써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이원론 종교의 한 분파이다.

    팔레스타인 북부 사람들에게 대단한 초자연적 능력을 지닌 인물로 숭앙받던 시몬 마구스는

    그리스도교 복음전도의 권능에 대하여 찬사를 표시했다.

    성서의 기록에 따르면,이때 그는 필립보에게 세례를 요청했다.

    성서에는 그가 사도 베드로에게 책망을 받은 후 회개하고

    분명히 그리스도교에 귀의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2세기의 신학자이며 순교자인 유스티노는 시몬이 클라우디우스 황제(41~54재위)때 로마를 방문했는데,

    거기서 그의 놀라운 기적에 매료된 추종자들에게 신으로 추앙받았다고 전했다.

    그러나 시몬의 신격화를 확증한 것으로 여겨졌던 고고학적 발굴물들은 진본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3세기의 다른 그리스도교 문서는 거짓 메시아 노릇을 하던 시몬 마구스가

    로마에서 성 베드로와 또 한번 만났다고 전한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네로 황제(54~68재위) 앞에서 사도 베드로에게 도전하여

    하늘을 날 수 있는 자신의 신비한 능력을 보여주려고

    로마 광장 꼭대기에서 날려고 하다가 떨어져 죽었다.

    다른 자료에 따르면 그는 스토아 철학과 영지주의를 절충하여 융합했는데,

    이는'대선언'(The Great Pronouncement)으로 알려져 있다.

    시몬의 유사 삼위일체론적인 영지주의 교설은 클레멘스 문서라고 알려져 있는

    초기 그리스도교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이 교설에서 '하느님의 위대한 권능'이라는 직함을 가진 시몬은

    유대인들에게 중재하고 고난받는 '성자'로서, 사마리아인들에게는 '성부'로서,

    다른 이방세계에 대해서는 '성령'으로 등장한다.

    이 문서들은 신화 양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성서에 나오는 시몬 마구스와

    후대의 외경 자료들에 나오는 시몬이 같은 인물인지 의심스럽다.

    2세기에 시몬 마구스를 제1위의 하느님인 성부로 보는 시몬파가 생겼으며,

    그는 그리스의 신 제우스의 화신으로 숭배되기도 했다.

    그의 추종자들은 시몬의 배우자 헬렌을 여신 아테나의 지상현신(地上現神)으로 보았다.

    시몬파의 창조신화에 따르면 최초의 에노이아(관념)가 천사들을 창조하기 위해

    성부의 마음에서 산출되었고, 그후 이 천사들이 보이는 우주를 창조했다.

    그러나 이 천사들은 질투심 때문에 최초의 에노이아가

    성부에게 되돌아갈 수 없도록 인간의 몸에 가두어놓았다.

    그리하여 이 최초의 에노이아는 이 몸에서 저 몸으로 옮겨다니는 운명에 처했는데,

    이 에노이아가 마지막으로 헬렌의 몸 안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최초의 에노이아를 구원하기 위하여 시몬이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왔으며,

    자신을 제1위의 하느님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을 구원해주었다.

    시몬파의 구원교리는 영지주의 집단의 구원교리와 달랐다.

    시몬파에서는 세속 질서 속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을 약속한 데 반해,

    영지주의 집단들은 지상의 감옥에서 벗어남으로써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맛디아(Matthias, 마티아)

     

    마티아는 유다 이스카리옷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새로 임명된 사도이다.

    그래서 다른 대부분의 제자들보다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마티아의 뜻은 히브리어 마티티아(Mattithiah)에서 유래되었으며 ‘하느님의 선물’이란 뜻이다.

    사도행전에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로 올라가고서 예수를 배반한 이스카리웃 유다(가롯 유다)를 제외한

    사도 11명과 교우 약 120명이 한 방에 모여 기도했는데,

    베드로가 "유다가 자신의 사도직을 배반한 지금 우리는 '다른 사람이 그자의 직무를 맡게 하라.'는

    성서의 말씀을 좇아야 하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오시는 동안,

    즉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예수께서 우리 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날까지

    줄곧 우리와 같이 있던 사람 중에서 하나를 뽑아 우리와 더불어

    주 예수의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해야 하겠다(사도행전 1장 23~26절)"라면서

    공석이 된 남은 사도직을 보충하자고 제안해서 사도는 그 후보자로서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칭이 있는 요셉과 마티아를 천거했고 기도하고서 제비를 뽑은 결과

    마티아가 당첨되어 그자가 마지막 사도직을 맡았다.

    마티아는 사도로 뽑히고서 곧바로 예루살렘을 떠나

    기독교 이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사는 여러 나라를 순회하면서 열심히 선교하였다.

    전승에 의하면 악술에서 큰 도끼에 찍혀 죽었다고 한다.

    로마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세의 모후인 성녀 헬레나는 성지 순례 중에

    우연히 마티아의 유골을 발견하고 독일의 트리어 지방으로 옮겼고 후일 1127년

    그 유골이 다시 발견되어 베네딕토회 성 마티아 수도원 성당에 다시 안치하였다.

     

     

    병풍도(屛風島)

     

    병풍도는 전라남도 신안군 증도면에 속한 섬으로

    유네스코 생물권보존지역이면서 람사르습지로 지정된 ‘순수한 섬’이다.

    병풍도는 깎아 지른 듯한 기암절벽 등 자연의 신비함이 숨겨져 있고,

    청정한 푸른 바다가 펼쳐진 아름다운 섬이다.

    서쪽에 증도가 있으며, 주위에는 대기점도·소기점도·

    소악도·매화도·대섬·화도 등의 작은 섬들이 산재한다.

    특히 신추도와는 방조제로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썰물 때 대기점도·소기점도·소악도와 간석지로 연결되기도 한다.

    섬의 이름은 북쪽 해안에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다 하여 병암이라 부르다가

    이후 병풍도라 불렀다고 전한다.

    74m의 구릉지를 제외하면 대부분 평지이다.

    해안에는 간석지가 넓게 발달했으며, 일부지역은 방조제를 쌓아 농경지와 염전으로 변모하였다.

    기후는 대체로 온화하다. 취락은 섬의 남쪽 해안에 있는 병풍도 마을에 집중되어 있다.
    병풍도에서 노두길(바다에 돌멩이를 놓아 걸어가는 길)로 연결된

    기점・소악도는 2017년 ‘가고 싶은 섬’으로 지정되었고,

    한국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여성 순교자인 문준경 전도사의 발자취를 따라

    세계 어디에도 없는 ‘작은 예배당’ 12개를 설치했다.

    12개의 예배당을 연결한 ‘12사도 순례길’은 마치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 같다 하여

    ‘섬티아고’라고 불리며, 기독교인의 성지순례뿐 아니라

    삶에 지친 이들의 쉼터와 치유의 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압해도 송공항에서 출발하는 여객선이 운항된다.

    면적 4.59㎢, 해안선길이 12.9km. 인구 약 300여명.

    1688년에 해주 오씨가 이주해 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행정구역상 병풍리는 병풍, 기점, 소기점, 소악도를 합하여 병풍리라 부른다.

     

    전라남도 신안군 증도면 병풍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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