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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랏빛 향기 - 퍼플섬 반월도, 박지도
    국내 나들이/섬(島)으로 2021. 5. 6. 20:45

    보랏빛(Purple) 다리, 보랏빛(Purple) 섬이 있기까지

     

    한국은 물론 해외 여행자들의 큰 사랑을 받고있는 보랏빛다리(Purple교)는

    평생을 박지도에서 살아온 김매금 할머니의

    “두 발로 걸어서 육지로 나오고 싶다‘는 소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할머니의 소망을 접한 신안군은 2007년 안좌면 두리선착장과

    박지도, 박지도와 반월도를 연결하는 총 길이 1.46km의 목조교(木造橋)를 놓았습니다.

    2007년 목조교가 완공되면서 어떻게 하면

    특색있는 섬으로 갈 수 있을까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때 섬에는 왕도라지꽃, 꿀풀꽃 등 보랏빛 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습니다.

    섬주민들은 "우리섬을 보라색으로 특색있게 꾸며 보겠다."며

    신안군과 머리를 맞대고 힘을 모았습니다.

    보라색의 섬으로 특성화하겠다는 제안으로 2016년 전라남도의

    “가고싶은 섬" 사업에 응모하여 선정되었습니다.

    2018년부터 본격적으로 주민들은 섬마을지붕을 보라색으로 예쁘게 색칠한 것은 물론

    2019년부터는 보라색 꽃길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박지도와 반월도 두 섬 주민들은 서로 힘을 모아

    약 4천평의 대지에 4만주의 라벤더를 심어 "라벤더 정원"을 만들었습니다.

    반월도 주민들은 1.5km에 이르는 섬길에 보라 루드비키아 6만 주와

    접시꽃 6만 주를 심어 '보라꽃 섬'을 만들었습니다.

    박지도 주민들은 보라국화인 아스타 2만7천 주로 1.8km에 달하는 보랏빛 섬길을 만들었습니다.

    섬마을 사람들의 보랏빛 꿈이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나면서 많은 이들이 찾아왔습니다.

    2007년에 완성된 목조교가 10년이 넘어서 노후해져 2019년부터 2020년에 걸쳐

    반월도, 박지도를 상징하는 보라색으로 다리를 전면 교체하고 도색도 하였습니다.

    신안군은 여행자들이 반월도, 박지도 두 보랏빛 섬을

    보다 편리하게 여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2020년 두리마을의 단도와 반월도 간

    총 380m 부교(浮橋)인 ’문-브릿지(Moon-bridge)”를 새로 놓았습니다.

    이로써 두리마을 – 반월도 – 박지도 – 두리마을로 연결되는

    다리의 길이는 1,842m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이 보랏빛 섬과 다리를 ‘퍼플(Purple)섬’과

    ‘퍼플(Purple)교’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은 ‘보랏빛 섬’, ‘퍼플(Purple)섬’ 앞에 서 있습니다.

    ‘1004섬 신안군’ 주민들은 언제나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2020년 8월 12일

    1004섬 신안군수 박우량

     

     

    전라남도 신안군은 대부분 섬으로 이루어진 고장이다.

    우리나라 섬의 숫자는 해양수산부 발표 2015년 기준으로

    유인도 482개, 무인도 2,876개 등 총 3,358개다.

    그중에 전라남도는 무려 65%인 2,165개의 섬을 보유하고 있으며,

    특히 신안군에서는 전라남도 섬의 절반가량인 1,004개의 섬이 소속되어 있다.

    이처럼 신안군이 섬 마케팅으로 관광자원화에 집중하는 이유다.

    신안 ‘퍼플섬(Purple Island)’으로 알려진 반월도와 박지도는 해외에서 더 주목 받는다.

    미국 CNN, FOX NEWS에서 ‘사진작가들의 꿈의 섬’ 이라고 소개하기도 하고,

    독일 최대 위성TV 프로지벤(Prosieben)과

    홍콩의 유명 여행 잡지 <U magazine>에도 자세히 소개된 바 있다.

    또한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주관한 2021~2022년 ‘한국인은 물론,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이 꼭 가봐야 할 한국의 대표 관광지 100선’에 선정되었다.

     

     

    반월도(半月島)

     

    반월도는 섬의 형태가 어느 곳에서 보더라도 지형이 반달형이라 하여

    처음에는 반월이라 하였으며, 가장 큰 마을이라하여 큰몰, 대리라고도 부르고 있다.

    1670년대 인동장씨 장남이 이주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반월도의 최고봉인 어깨산(肩山, 202m)은 산의 지형이

    사람의 어깨처럼 생겼다하여 어깨산(견산)이라 한다.

    면적 2.54㎢, 해안선 길이 6.7㎞, 해안은 사빈해안(沙濱海岸)이 대부분이고

    동쪽 해안에는 간석지(干潟地)가 발달되어 있다.

     

     

    퍼플밥(보라색 밥)

     

     

    박지도(朴只島)

     

    박지도는 약 250여년 전 박씨(朴氏)가 처음 들어와 살았다고 하여

    박지도라 부르게 되었으며, 섬의 지형이 박(바가지)처럼 둥글게 생겼다는 뜻으로

    바기섬, 배기섬, 배기라 부르다가 이후 박지라 개칭하였다.

    산 정상 높이가 해발 130m인 작은 섬이다. 마을면적 1.19㎢, 해안선 길이 4.6㎞,

    구전(口傳)에 의하면 1700년께 김해김씨 김성택이 이주 정착해 마을이 형성됐다.

    마을 뒷산 정상에 당(堂)이 있었는데 매년 정월 대보름날이면

    이곳에서 마을의 안녕과 질병퇴치를 위해 흠없는 송아지 각을 떠서 당제를 지냈다.

    마을 사람들은 당(堂)이 있었다고 해서 이 산을 당산(堂山)이라 부르고 있다.

     

     

    중노두의 전설

     

    '노둣길'은 섬과 섬, 바다와 육지를 잇는 옛길로

    갯벌 위에 차근차근 디딤돌을 놓아서 만들었습니다.

    썰물이면 갯벌이 드러나고 밀물이면 물속으로 사라지는 돌로 만든 길입니다.

    박지도와 반월도는 호수 같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습니다.

    두 섬사이를 잇는(지금은 희미하게 흔적이 남아있는) 노둣길에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옛날, 박지도 산속에 조그마한 암자가 있었고,

    반월도 뒷산에도 아담한 암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지금도 암자터가 남아있고 우물이며 깨진 기왓장이 보입니다.

    박지도 암자에는 젊은 비구니 스님 한 분이,

    반월도 암자에는 비구 스님 한 분이 살았습니다.

    서로의 얼굴을 본적은 없지만 박지도 스님은 멀리 건너편 섬의

    암자에서 어른거리는 반월도 스님을 사모했습니다.

    반월도 비구 스님도 건너편 암자를 오가는 비구니 스님의 모습을 그리워하고 연모했습니다.

    바다 건너 무언의 연서가 달빛으로 오가고

    밀물과 썰물이 교대로 다녀가며 서로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움과 가득할 뿐, 들물이면 바닷물이 가로막고

    썰물이면 허벅지까지 빠지는 갯벌이 가로막아 가까이 다가갈 수도,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오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달 밝은 밤이면 휘영청 밝은 달빛을 타고 반월도 암자에서 불공드리는

    비구승의 목탁 소리가 갯벌 건너까지 어렴풋이 들려 왔습니다.

    희푸른 새벽 안개가 바다 위에 어리는 시간이면 박지도에서 울리는

    낭랑한 새벽 예불소리가 건너 반월도에 선명하게 와 닿았습니다.

    보이지 않아서 더욱 그리운 마음은 사모의 정으로 날마다 깊어졌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던 어느 날,

    반월도 비구 스님은 망태에 돌을 담아

    박지도 쪽을 향하여 부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건너편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비구니 스님도 산돌을 차곡차곡 주워모아

    갯벌 위에 디딤돌을 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섬과 섬을 잇는 돌무더기를 놓기를 1년, 2년이 지나고도 몇년이 더 지나갔습니다.

    반월도를 향하여, 박지도를 향하여, 양쪽에서 시작된 돌다리는

    사랑의 실핏줄처럼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한 망태기라도 내가 더 놓아야 저사람이 덜 힘들겠지,

    둘은 똑같은 마음으로 쉼 없이 돌무더기를 날랐습니다.

    젊은 스님은 어느덧 중년이 되고 꽃 같은 나이의 박지도 비구니도 어느덧 중년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겨울이 와서 찬 눈보라가 갯벌에 몰아칠 때도, 염천의 불볕더위가 작렬하는 눈부신 날에도,

    산벚꽃이 난분분 흩날리는 날에도, 낙엽이 암자 지붕을 덮는 가을날에도

    사랑의 돌무더기는 날마다 앞으로 그리운 사람을 향하여 놓여져 갔습니다.

     

    마침내 양쪽에서 시작된 노둣길이 갯벌 가운데서 연결되던 추운 겨울의 어느 날,

    두 사람은 이어진 노둣길 가운데에서 마주 섰습니다.

    마지막 한 무더기의 돌망태기를 남은 한 걸음에 쏟아붓고

    둘은 한참동안 장승처럼 굳어서 마주 바라보았습니다.

    어느새 늘어난 잔주름살 위로 굵은 눈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졌습니다.

    돌을 나르느라 거칠어진 서로의 손을 어루만지고, 갯바람에 터진 서로의 얼굴을 쓰다듬고,

    여기까지 오느라 참으로 애썼소, 고생 많았소, 서로의 고단한 어깨를 끌어안고

    쓰다듬으며 석양이 뉘엿하도록 둘은 그 자리에서 움직일줄 몰랐습니다.

    너무 먼 곳까지 들어온 것일까요, 바다는 들물때를 만나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찰랑찰랑 노둣돌을 어루만지던 바닷물은 급격한 속도로 불어나기 시작하여

    수위는 자꾸 높아져 갔습니다.

     

    어느새 발목을 넘는 바닷물을 너무 멀리 떠나와 버린

    섬을 돌아본 두 사람은 돌아갈 길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닷물은 멈추지 않고 불어난 갯벌을 덮기 시작했습니다.

    바닷물이 정강이까지 차고 허벅지를 휘감고 허리까지 차 올랐습니다.

    이제 두 사람은 망망한 바다 한 가운데 한 몸처럼 서 있게 되었습니다.

    박지도 사람들과 반월도 사람들은 바닷가에 모여 잠겨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다 양쪽에서 배를 띄우고 노를 저어 바다 가운데로 나왔지만

    이미 바닷물은 두 사람의 그림자마저 삼켜버리고 자잘한 파도만

    가쁜 숨결처럼 찰랑이고 있었습니다.

     

    다시 썰물이 되어서 바닷물이 빠져나간 갯벌에는

    돌무더기 길만 박지도에서 반월도까지, 반월도에서 박지도까지 이어져 있을 뿐

    두 스님의 모습은 끝내 찾을 길이 없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 노둣길의 흔적이 흐릿하게 갯벌 위에 남아 있습니다.

    그 갯벌에 돌무더기로 놓여진 길을 ‘중노둣길’이라고 부릅니다.

    전설인지 실화인지 구분이 애매한 이 이야기를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서로를 그리워하던 스님과 비구니는 썰물 때면 돌무더기를

    바다에 쌓아 징검다리를 만들면서 두 섬을 이으려 했다.

    수년이 지난 후 마침내 두 사람은 바다 한 가운데 돌무더기에서 서로 만나

    얼싸 안았지만 그만 밀물이 들어와 두 사람을 삼켜버리고 말았다.

    지금도 노둣길의 흔적은 갯벌 위에 남아있는데

    갯벌에 돌무더기로 놓여진 길을 ‘중노둣길’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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