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서산 해미읍성(瑞山 海美邑城) - 사적 제116호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1. 5. 31. 04:25

    진남문(鎭南門)

     

    해미읍성의 정문이자 남쪽문으로 화강암 홍예문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단층 문루이다.

     

     

    해미읍성의 서문 지성루(枳城樓)

     

    성밖으로는 해자(垓字)를 파고 탱자나무를 심어 적의 침입을 막았다고 하여

    탱자나무(枳)가 읍성(邑城)을 지켜준다는 뜻의 지성루라고 한다.

     

     

    해미읍성의 동문인 잠양루(岑陽樓).

     

     

    천주교 박해 성지인 충남 서산의 해미읍성은 전남 순천의 낙안읍성(樂安邑城),

    전북 고창의 고창읍성(高敞邑城, 牟陽城)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읍성으로 꼽힌다.

     

     

    진남문 안쪽 皇明弘治四年辛亥造(황명홍치사년신해조)

     

    진남문 문루 아래 받침돌에 '皇明弘治四年辛亥造'라고 글씨가 새겨져 있다.

    황명홍치는 명나라 효종의 연호인 홍치를 의미하는데

    1491년(성종 22)에 진남문이 중수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교황 방문기념(敎皇 訪問記念)

     

    서산 해미읍성(사적 제116호)은 조선시대 충청병마절도사영(忠淸兵馬節度使營)이자

    호서좌영(湖西左營)으로 내포(內浦) 지역 13개 군현을 관할하던 군사 중심지였다.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와 관련하여 회화나무, 옥사, 자릿개돌 등 관련 유적이 많이 남아 있으며,

    2014년 8월 15일 제266대 프란치스코 교황(Pope Francis)이 이곳 해미읍성을 방문하여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AYD : Asian Youth Day)에 참가한 23개국 6,000여명의

    아시아 젊은이들에게 평화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폐막 미사를 집전하였다.

    교황의 방한은 역대 세 번째로, 1989년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이후 25년 만의 방한이었다.

    방한 기간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位) 시복미사’를

    주례하기도 하였는데, 복자(福者)로 추대된 124위는 한국 천주교의 초기 순교자들로서

    해미에서 순교한 3위(인언민, 이보현, 김진후)가 함께 복자 품위에 올랐다.

     

     

     

    서산 해미읍성 회화나무(瑞山 海美邑城 槐木) - 충청남도 기념물 제172호

     

    해미읍성(사적 제116호) 내 위치하는 회화나무는 지역주민들에 의해

    충청도 사투리로 ‘호야나무’로 불리고 있는데,

    수령 약 3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이 나무는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와 관련이 있다.

    당시 해미읍성은 호서좌영으로서 겸영장이 토포사를 겸하여 국사범을 처단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어 내포지방의 천주교 신도들을 압송하여 처형하였는데,

    이 나무에 철사줄로 매달고 고문을 하여 많은 천주교인들이 처형을 당하였다.

     

    (안내문 내용)

    1790~1880년대에 이곳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끌어내어

    이 나무의 동쪽으로 뻗어있던 가지에 철사줄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하였으며

    철사줄이 박혀있던 흔적이 현재까지도 희미하게 남아 있고

    동쪽으로 뻗은 가지는 1940년대에, 가운데 줄기는 1969년 6월 26일에

    폭풍으로 부러져 외과수술을 시행하였으나 재차 부패되어

    2004년 4월에 외과수술 및 토양개량 등을 거쳐 보호관리 되고 있음

     

     

    해미읍성 옥사(海美邑城 獄舍)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의 천주교와 깊은 연관이 있는 곳이다.

    천주교도들을 투옥하고 문초하였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터만 남아있던 옥사를 발굴 작업 뒤 복원, 재현하였다.

    이 옥사는 1935년 간행된 "해미 순교자 약사(海美 殉敎者 略史)"의 기록을 토대로

    복원하였으며, 내옥과 외옥이 있고, 각각 정면 3칸 건물로 남녀의 옥사가 구분되어 있다.

    1970년부터 100여 년간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國事犯)으로 규정하여

    이곳에서 투옥 및 처형을 하였는데,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金震厚, 1738~1814)도

    이곳에서 옥고를 치르고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해미읍성은 조선 말기 고종 때인 1790년경부터 1886년까지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 병인박해(1866년) 등

    수천명에 이르는 신도들이 사학죄인(邪學罪人)으로 몰려

    온갖 고문 끝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곳이기도 하다.

     

     

    湖西左營(호서좌영)

     

    조선 초기 충청병마도절제사영(忠淸兵馬都節制使營)은 원래 덕산(德山)에 설치되었다가,

    왜구의 잦은 침략에 대한 방비와 서해안의 수호가 중요시되면서

    1417년(태종 17) 이후 해미로 이설되었다.

    해미로 옮겨진 이후, 충청병마절도사영으로 개칭되었고

    1652년(효종 3) 청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약 230여 년간 군사권을 행사하는 거점이 되었다.

    이후 호서좌영성으로 축소되면서 해미읍성으로 불리게 되었고,

    본래 이름은 해미내상성(內廂城)이다.

     

     

    동헌(東軒)

     

    동헌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비롯한 현감 겸 영장(縣監 兼 營將)의 집무실로서

    관할지역의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 등이 행해지던 건물이다.

    해미 현감 겸 영장은 인근 12개 군, 현의 병무행정과 토포사를 겸한 지위였다.

     

     

     

    해미읍성 객사(海美邑城 客舍)

     

    객사는 건물의 중앙 정청에 궐자가 새겨진 위패를 모시고

    삭망(朔望 : 매월 초하루, 보름)에 관아의 대소 관원(官員)들이 국왕에 대한 예를 올렸으며,

    양편 익실(翼室)은 조정이나 상부에서 파견된 관원 및 귀빈들의 숙소로도 사용했던 곳이다.

    해미읍성 객사는 발굴조사와 고증(考證)을 거쳐 1999년 7월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復原)하였다.

     

     

    史蹟 第116號 海美邑城(사적 제116호 해미읍성)

     

     

    서산 해미읍성(瑞山 海美邑城) - 사적 제116호

     

    이 성(城)은 고려 말부터 많은 피해를 준 왜구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하여

    덕산(德山)에 있던 충청병마절도사영(忠淸兵馬都節制使營)을 해미로 옮기기로 하면서

    1417년(태종 17년)부터 1421년(세종 3년)까지 축성, 충청도의 전군을 지휘하던 병마절도사영성이다.

    1652년 (효종3년)까지 230여 년간 병마절도사영의 기능을 하였으며,

    청주로 옮겨간 후 해미 현감이 이 성에 옮겨와 겸영장(兼營將)이 되면서 해미읍성이 되었다.

    호서좌영(湖西左營)으로 1895년 행정구역 개편 때까지

    243년간 내포지방 12개 군.현의 군권을 지휘했던 곳이다.

    낮은 산과 평지를 이용하여 쌓은 평산성(平山城)으로 성곽의 하단은 큰 돌로 쌓고

    위로 오를수록 작은 돌을 사용하였는데 안쪽은 흙으로 채웠다.

    성문은 동, 서, 남 세 곳에만 있고 북에는 암문이 있다.

    주 출입구인 진남문(鎭南門)은 다듬어진 돌로 된 아치형 홍예문(虹霓門)이다.

    성 밖에는 해자(垓字)가 둘러져 있는데, 발굴조사를 통해 북쪽 해자의 일부를 복원해 놓았으며,

    기록에는 성벽 위에 여장(女墻)과 옹성(甕城)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성곽 둘레는 1,800m, 높이는 5m로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성 주변에 탱자나무가 심어져 탱자의 한자음을 취한 지성(枳城)이라고도 한다.

    이 읍성에는 병마절도사와 겸영장이 집무하던 동헌(東軒)을 비롯한

    관아(官衙)와 객사(客舍) 등의 건물이 꽉 들어차 장관(壯觀)이었다고 한다.

    1578년(선조 11년)에 이순신 장군이 군관으로 10개월간 근무한 적이 있으며,

    조선시대 말기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40-1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