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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청궁(乾淸宮)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2. 4. 2. 21:07

    초양문(初陽門)

     

    건청궁 장안당(長安堂) 동쪽에 있는 초양문(初陽門)의 현판으로

    담계(覃溪) 옹방강(翁方綱, 1733~1818)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든 것이다.

    옹방강은 중국 청나라의 저명한 서예가이자 고증학자이다.

    그의 서법은 당시 천하제일이라 사람들이 다투어 그의 글씨를 구하였고,

    궁궐에도 그의 글자를 집자하여 만든 현판이 남아있다.

    현판에는 옹방강의 서재를 뜻하는 복초재(復初齋)’,

    그의 호 담계(覃溪)’라는 인장이 새겨져 있다.

    초양문은 양기(陽氣)가 처음으로 생기는 문이라는 뜻으로 양기가 처음 생긴다는 것은

    입춘(立春)이나 초춘(初春)을 뜻하기도 하며, 태평성세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함광문(含光門)

     

    곤녕합으로 들어가는 남쪽 문이다.

    ‘함광(含光)’은 ‘함만물이화광(含萬物而化光)’에서 온 말로,

    ‘만물을 포용하여 공화(功化)가 빛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주역』「문언전」에서 곤도(坤道)의 특성을 설명하며,

    “곤괘는 지극히 유순하되 움직임이 강(剛)하고, 지극히 고요하되 덕(德)이 반듯하다.

    뒤에 따르면 얻어서 이로움을 내세우며 떳떳함이 있다.

    만물을 포용하여 공화(功化, 감화시킴)가 빛난다.

    곤도는 순하도다! 하늘을 만들어 때에 맞게 행하도다.”라고 한데서, 그 출처를 찾을 수 있다.

    한편 ‘함광(含光)’은 ‘빛을 머금고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뜻으로도 쓰였다.

    미덕을 몸에 지니고서도 드러내지 않는 상태,

    곧 지극한 덕을 지니고 있음을 비유할 때의 표현이다.

    한나라 채옹이 지은「진태구 비문(陳太丘碑文)」에,

    “빛나도다, 진군이여! 이 세상에 태어나 순덕(醇德)을 머금어[含光]

    선비들의 모범이 되었다.”라는 표현이 그 용례이다.

    이곳이 곤녕합으로 들어가는 문임을 상기하면 이와 같이 이름 지은 의미를 알 수 있다.

     
     
     
     

    곤녕합(坤寧閤)

     

    곤녕합은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일상생활공간으로 사용하던 건물로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가 일본인 자객에 의해 시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7년간 왕실 의사로서 왕비를 모신 미국인 앨러스 벙커(Annie Ellers Bunker) 여사는

    명성황후에 대해 성품이 부드럽고 친절하며 조선 여성의 미를 갖춘 미인이라고 회상하였다.

    1895년 2월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만주까지 침략하자

    조선 왕실은 러시아와 손을 잡고 일본을 국내에서 철수시키려 하였다.

    이에 일본 군부는 왕실을 압박하는 비상사태를 만들기 위해 10월 8일 새벽에 민간인 복장을 한

    일본 장교들이 건달들을 끌고 건청궁에 난입하여 왕비를 시해하였다.

    폭도들은 왕비의 시신을 건청궁 동쪽 언덕 녹산 자락에서 태우고 남은 뼈를 그 자리에 묻었다.

    이후 왕실에서 이를 거두어 경운궁(현 덕수궁)에 시신을 안치하고 국장을 지냈다.

     
     
     
     

    옥호루(玉壺樓)

     

    곤녕합에 부속된 건물로서 장안당의 추수부용루와 같은 누각의 이름이다.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궁중에 난입한 일본 낭인들에게 비참하게 살해된 장소로 알려져 있다.

    일제는 한국 근대사의 비극을 간직한 옥호루를 1909년 경복궁 안에 있던

    수많은 건물을 파괴할 때 헐어버렸다.

    2006년 건청궁 일대를 복원하면서 함께 복원되었다.

    ‘옥호(玉壺)’는‘옥으로 만든 호리병’이라는 뜻이지만

    이는 ‘옥호빙(玉壺氷)’의 준말로 ‘옥병 안의 얼음’이라는 뜻을 갖는다.

    ‘깨끗한 마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현재의 현판은 복원하면서 새로 단 것이다. 원래의 현판이 사진으로 전한다.

    글씨는 초서체(草書體)이다.

     

    天門日射黃金榜(천문일사황금방)

    황궁(皇宮)문엔 햇빛이 황금 편액을 비추고,

    春殿晴曛赤羽旗(춘전청훈적우기)

    봄 전각엔 저녁 해가 적우기를 비추네.

     
     
     
     

    사시향루(四時香樓)

     

    곤녕합 남루(南樓)의 동쪽에 있다. 장안당에 추수부용루가 있는 것과 비교된다.

    ‘사시향(四時香)’은 ‘네 계절 끊어지지 않고 꽃향기가 풍긴다’는 의미이다.

    여성적 분위기가 느껴지는 표현이다.

     

    陌上堯樽傾北斗(맥상요준경북두)

    밭두둑의 요 임금 술잔은 북두(北斗)를 기울게 하고,

    樓前舜樂動南薰(누전순악동남훈)

    누각 앞의 순 임금 음악은 남쪽 훈풍 불어오게 하네.

     
     
     
     

    녹금당(綠琴堂)

     

    복수당 서행각에 있는 건물이다.

    ‘녹금(綠琴)’이란 ‘녹색의 거문고’라는 뜻이다.

    푸른 숲이 내는 아름다운 소리를 거문고 소리에 비유한 것이다.

     
     
     
     

    정시합(正始閤)

     

    곤녕합의 동북쪽에 붙어 있는 침방(寢房)이다.

    ‘정시(正始)’는 ‘처음을 바르게 하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처음을 바로 잡는다’는 것은 인륜의 시작을 부부관계로 파악하고

    그 관계를 바로 잡음을 가리킨다.

    「모시서」에서는“「주남」과「소남(召南)」은 처음을 바르게 하는[正始] 도이며,

    왕화(王化)의 기틀이다.”라고 하였다.

    곧『시경』의「주남」 편과「소남」 편이 부부관계의 도리를 바르게 드러내는 시편이라고 본 것이다.

    주희는 이에 덧붙여 “임금의 도는 집안에서 시작하고 천하에서 마무리되는데,

    「주남」과「소남」은 집안을 바로잡는 일을 담고 있다.

    임금의 교화는 반드시 법도가 창성하고 예악이 갖추어지며

    아름답게 칭송하는 노랫소리가 만들어진 뒤에야 완성되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처음이 없으면 무엇으로 이를 세울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집안을 바로잡는 것이 무엇보다 앞섬을 강조하였다.

     
     
     
     

    장안당(長安堂)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거나 외직으로 나가는 신하 등을 만나는 일이

    이곳에서 있었던 것으로 보아 한때 임금의 편전으로 쓰이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편전은 국왕이 일상 정무를 보는 곳이다.

    1873년(고종 10년) 건청궁을 지을 당시에 처음 만든 것으로 보이며,

    지금의 건물은 2006년 복원할 때 새로 만든 것이다.

    ‘장안(長安)’이란 ‘오랫동안 평안하게 지내다’라는 뜻이다.

    ‘장(長)’은 ‘오랜 시간’, ‘안(安)’은 ‘평안함’을 의미한다.

    규장각이 소장한『어필 현판첩(御筆懸板帖)』(奎10293)에

    고종 친필의 장안당 탁본이 수록되어 있어,

    장안당 현판 글씨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다.

    『어필현판첩』은 1885년경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현판은 이 현판첩에서 모사하여 새긴 것으로 보인다.

    현판 오른쪽 상단에 임금의 글씨를 뜻하는 ‘御筆(어필)’이 전서로 새겨져 있고

    좌측 하단에는 ‘주연지보(珠淵之寶)’, ‘만기지가(萬機之暇)’라는 낙관이 새겨져 있다.

    ‘주연지보’는 고종의 낙관이다.

    장안당은 건청궁의 중심 건물이다. 사대부 집이라면 사랑채에 해당한다.

    전체 27칸, 세 벌 장대석 위에 올린 장안당 단면은 3칸 7량 집이며 이익공포작이다.

    지붕에는 용두를 얹고 처마는 막새로 마감했다.

    ㅏ자 형태로 설계한 평면은 앞면 6칸, 옆면 1칸이며 앞뒤로 툇간을 두었다.

    가운데 3칸은 대청이고 서쪽 2칸, 동쪽 1칸은 방이다.

    대청 앞에 붙은 장안당 편액은 고종의 어필이다.

    ㅏ자 형태의 북서쪽에는 田자 모양의 앞, 옆 2칸의 침방이 정화당,

    그 남쪽은 5칸의 추수부용루(秋水芙蓉樓)라는 누마루다.

    정화당은 9칸으로 짜인 위(囲)자 형태의 강녕전 침소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추수부용루 5칸 중 남쪽으로 돌출한 2칸은 단을 높였다.

    장안당 동쪽은 복도각을 통해 곤녕합 서행각과 만난다.

    복도각은 본채보다 단을 낮췄으며 지붕은 본채 처마 아래 놓였다.

    장안당 구역은 건청궁 궁역의 4분의 3을 차지한다.

    이 공간의 동쪽은 짧은 샛담과 연결된 다양한 행각으로 막혔고,

    나머지 세 면은 담이 ㄷ형태로 에워쌌다.

    남쪽 담과 만나는 서쪽 담에는 필성문이 있다.

    향원정 서북쪽의 열상 진원에서 전기 발상지로 이르는 계단을 올라서면 맨 처음 눈에 띄는 문이다.

    건청궁 남행각의 소슬문을 거치지 않고 장안당으로 진입하려면 필성문으로 들어가면 된다.

    필성문은 교태전 건순각 뒤편의 연휘문과 비슷한 월문이다.

    서쪽 담을 따라 북쪽으로 가면 일각문인 관명문과 취규문이 16m 정도 간격으로 열려 있다.

    취규문 안은 장안당 북행각이다.

    북쪽 담장을 뒤로하고 나란히 펼쳐진 북행각은 22칸의 5량집이다.

    방과 마루, 창고로 구성된 북행각은 건청궁을 밝혔던 수력발전기가 있었던 곳이라고도 한다.

    북행각과 장안당 사이의 넓은 마당에는 고종 내외의 외교활동 거점이자

    연회 공간이었던 관문각이 있었다.

    관문각은 도면이나 유구가 없어 이번에 복원하지 못하고 그 자리를 비워두었다.

    북행각 서북쪽에는 북쪽 궁성의 암문인 계무문이 있다.

    계무문은 후원에서 문과 시험을 치를 때 행사 관련 관리들이 이용했던 문이다.

     

     
     
     

    필성문(弼成門)

     
     
     
     

    인유문(麟遊門)

     

    건청궁(乾淸宮) 동쪽에 있는 동산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인유(麟遊)’란 ‘기린이 노닐다’는 뜻으로 상서로운 조짐이 드러남을 뜻한다.

     
     
     
     

    건청궁 처마 밑의 오지창

     

    궁궐의 회랑이나 궐담 등 그물(부시)을 치기가 어려운 곳에는

    오지창(또는 삼지창) 등을 꽂아 새들이 둥지를 틀거나 앉는 것을 방지했다.

     

     

     
     

    건청궁(乾淸宮)

     

    경복궁 중건 사업이 끝난 이듬해인 1873년, 고종은 경복궁 북쪽 동산 정원인

    녹산(鹿山)과 향원정(香遠亭) 사이에 건청궁을 건립케 하고 명성황후와 기거하였다.

    건청궁의 건축양식은 궁궐의 침전 양식과는 달리 양반가옥 살림집을 응용하여

    사랑채(장안당), 안채(곤녕합), 부속건물(복수당), 행각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규모는 양반가옥 상한선인 99칸의 2.5배 되는 250칸이다.

    건청궁이 건립된 지 3년이 지난 1876년, 경복궁에 큰 불이 나자

    고종은 창덕궁으로 생활공간을 옮겼으며, 1885년에 다시 건청궁으로 돌아와

    1896년 아관파천 때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할 때까지 10여 년간 줄곧 이곳에서 지냈다.

    한편 건청궁은 1887년 미국의 에디슨 전기회사에서 발전기를 설치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전등이 가설된 곳이며,

    1895년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곤녕합에서 일본인 자객에게 시해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경복궁의 건물들이 차례로 파괴되면서

    건청궁은 1909년 철거되어 이 자리에 조선총독부 미술관이 지어졌으며,

    한동안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다가 1998년에 철거되었다.

    문화재청은 건청궁을 원래 모습대로 복원하여 2007년 10월부터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 경복궁 건청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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