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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대통령 묘역(金泳三 大統領 墓域)국내 나들이/능, 원, 묘(陵 園 墓) 2022. 5. 10. 22:12
대통령 김영삼의 묘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28년 음력 12월 4일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외포리 대계마을에서 태어나셨다.
장목소학교, 경남중학교를 거쳐 1951년에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 재학 중인 1950년 6.25 전쟁 시에는 학도의용군으로 입대하여국방부 대북방송담당요원으로 복무하였다.
1951년 평생의 반려자인 손명순 여사와 결혼을 하여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다.
같은 해 장택상 비서관으로 정치에 입문하였다.
1954년 치러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만 25세로 당선되어
현재까지 헌정 사상 최연소 국회의원이다.
또한 1960년 제5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후 제6, 7, 8, 9, 10대와 제13대, 14대까지총 9차례 당선되어 최다선 국회의원이기도 하다.
1969년에는 40대 기수론을 펼쳐 대한민국 정치사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었다.
5번의 야당 총무를 거쳐서 1974년 만 45세로 신민당 총재에 선출되었다.
이후 의원직 제명과 두 차례에 걸친 가택연금을 당하는 등 고초도 겪었다.
1981년 민주산학회를 결성하고 1983년에는 23일간의 목숨을 건 단식투쟁으로민주화운동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민추협 결성과 통일민주당 창당 등 멈추지 않는 행보는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져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루어냈다.
1987년 대선 이후 대한민국 정치인으로는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하는 등
활발한 의정외교활동을 하였다.
1990년 민주자유당을 창당하고 1992년 12월 18일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93년 2월 25일 취임하여 32년 만에 문민정부가 출범하였다.
이후 하나회 해체를 필두로 선거관련 법안과 정치자금법을 개정하고 지방자치를 전면 실시하여이 땅의 민주주의를 공고하게 하는 혁신적인 정치개혁을 단행했다.
문민개혁의 꽃이라 불리는 금융실명제를 비롯하여 부동산실명제와 공직자 재산공개로투명한 경제운용과 부패 척결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또한 임시정부 선열 유해 봉안과 조선총독부 건물 해체로민족정기와 독립운동 정신을 계승 발전시켰다.
4.19묘지에 국립묘지 선정과 5.18 민주화운동 재평가
그리고 5.18 특별법 제정 등 역사 바로세우기를 추진하였다.
한편으로는 2002년 한일 월드컵 유치와 OECD 가입 등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을 드높이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동시에 세계화에 국정목표를 제시하여 노동, 금융, 교육 등 각 분야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1998년 대통령에서 퇴임 후에도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세계 각국을 방문하여국격을 높이는 전직 국가수반 외교활동에 이바지해 왔다.
2011년에는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등 전직 대통령으로서 모범을 보였다.
고인이 이룬 한국 정치 발전의 업적은 세계에서도 주목을 받아마틴 루터 킹 비폭력인권평화상, 해리먼 민주주의상 등을 수상하였다.
또한 국가원수로서는 최초로 소르몬 대학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는 등
국내외 10여 개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40대 기수론, 우리가 기댈 언덕은 없다, 민주화 구국의 길, 나와 내 조국의 진실,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등 10여 권이 있다.
가족(유족)으로는 부인 손명순 여사와 아들 은철, 현철. 딸 혜영, 혜경, 혜숙 씨가 있다.김영삼 민주주의 기념비
민주화 투쟁의 과정에서 나는 항상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 싸웠다.
나는 또한 부끄러운 타협을 한 적이 없다.
민주주의를 반드시 실현해 내고자 하는 내 신념을 한 번도 꺾어 본 적이 없었다.
이 김영삼이가 목숨이 끊어지지 않는 한 바른 길 정의에 입각한 일, 진리를 위한 길,
자유를 위하는 일이면 싸우렵니다. 싸우다가 쓰러지지언정 싸우렵니다.
1969. 6. 21. 초산테러 국회 신상발언
이제 민주주의는 개막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새벽이 돌아왔습니다.
아무리 새벽을 알리는 닭의 목을 비틀지라도 민주주의의 새벽은 오고 있습니다.
1979. 5. 30. 신민당 총재 수락 연설
어떠한 탄압이 있다 하더라도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신념과 소신은 바꿀 수 없습니다.
나는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지 않고 잠시 죽는 것 같지만
영원히 살길을 선택할 것입니다.
1979. 10. 4. 국회의원 제명 규탄 성명
나의 대한 어떠한 소식이 들리더라도 그것에 연연하거나 슬퍼하지 말고
오히려 민주화에 대한 우리 국민의 뜨거운 열정과 확고한 결의를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나의 호소요 당부입니다.
1983. 5. 18. 단식돌입 성명
오늘 우리는 그렇게도 애타게 바라던 문민 민주주의 시대를 열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오늘을 맞이하기 위하여 30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마침내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를 이 땅에 세웠습니다.
1993. 2. 25. 대통령 취임사
드디어 우리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합니다.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루어집니다.
금융실명제는 개혁 중의 개혁이요 우리 시대의 개혁의 중추이자 핵심입니다.
1993. 8. 12. 금융실명제 특별담화
후면
김영삼 대통령은 야당 시절 국민의 자유와 기본적 인권 그리고 이 나라 민주주의를 지켜주는 방패요
산성이었으며,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서는 30여 년에 걸친 군사정치 문화를 청산하고
문민 민주주의에로의 위대한 전환을 이룩한 한국 민주주의의 자랑스러운 지도자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군에 대한 문민통제를 확립해 한국의 민주주의를 반석 위에 올려 놓았으며
정치개혁과 지방자치의 전면 실시를 통해 한국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완결했다.
재산공개와 정치자금 근절 등 위로부터의 개혁을 솔선수범하고 금융실명제와 역사바로세우기,
세계화, 정보화 등 각종 개혁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를 사회 전 부문으로 확산시켰다.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 민주화와 변화와 개혁은 세계 민주주의의 발전에 커다란 본보기가 되었으며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한류가 온 세계로 뻗쳐 흐르는 전기가 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걸어 온 대도무문의 길과 한국 민주주의에의 업적을 기리고
한국 민주주의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는 전 국민의 뜻을 담아 여기에 이 비를 세운다.
2016년 5월 26일
글 김정남, 글씨 신두영
김영삼 대통령 묘역(金泳三 大統領 墓域)
김영삼 대통령은 1928년 12월 4일(음) 경남 거제에서 출생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래 9선을 기록한 대한민국 민주 헌정사의 상징이자,
30여 년에 걸쳐 국민과 함께 독재 권력에 항거하는 민주화 투쟁의 선봉에 선 지도자였다.
1993년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으로 취임함으로써 32년 만에 역사적인 문민시대를 열었다.
신한국 창조를 국정목표로 군의 정치개입을 차단하고, 금융실명제를 단행했으며, 지방자치 전면 실시,
역사 바로 세우기, 세계화, 정보화 정책 등 과감하고 획기적인 변화와 개혁을 추진했다.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실현해 내고자 하는 신념 하나로 일생을 오직 대도무문의 삶을 살다가
2015년 11월 22일 서거하여 11월 26일 국가장(國家葬)으로 국립 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동작동) 국립 서울현충원(국립묘지) 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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