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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창빈안씨 묘역(昌嬪安氏 墓域)
    국내 나들이/능, 원, 묘(陵 園 墓) 2022. 5. 15. 19:10

    묘역에는 곡장을 둘렀고 묘에는 호석을 둘렀다.

    망주석, 상석, 향로석, 장명등, 문인석 등의 석물이 두었고 묘표를 세웠다.

     
     
     
     

    昌嬪安山安氏之墓(창빈안산안씨지묘)

     
     
     
     

    昌嬪安氏 神道碑(창빈안씨 신도비)

     

    묘소는 1551년(명종 6)에 조성했지만 신도비는 1683(숙종 9)년에 세웠다.

    비신은 화강암이며, 신도비의 총높이는 312cm, 비신의 높이는 204cm, 폭은 64.5cm,

    받침돌의 높이는 38cm, 지붕돌의 높이는 70cm로 당시 몇 안 되는 정사각형 기둥 모양을 하고 있다.

    방형 대석은 지대석과 좌대석이 한 돌로 되어 있어 장중하다.

    옥개형 지붕돌은 유난히 크며, 꼭대기의 연단을 좌측으로 돌아가면서 새긴

    약 18~19cm 크기의 전액(篆額)은 오위도총부 도총관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이

    창빈안씨신도비명(昌嬪安氏神道碑銘)이라고 썼다.

    비문(碑文)은 숙종 때 예조판서(禮曹判書) 및 한성부(漢城府) 판윤(判尹)을 지낸

    신정(申晸)이 지었으며, 글씨는 지돈녕부사(知敦寧府使)를 역임한 이정영(李正英)이 썼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창빈안씨 묘역(昌嬪安氏 墓域)

     

    시대 : 16세기 후반~17세기 후반.

    이곳은 조선 제11대 왕 중종의 후궁이자 선조의 할머니인

    창빈안씨(昌嬪安氏, 1499~1549)의 묘역이다.

    원래는 1550년(명종 5) 3월 경기도 양주 장흥리에 묘소를 만들었는데,

    이듬해 자리가 좋지 않다고 하여 이곳으로 옮겼다.

    묘역의 봉분에는 호석을 둘렀고 봉분 뒤에는 곡장을 설치하였다.

    신도비를 비롯하여 묘표, 혼유석, 상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 장명등 등의 석물을 세웠다.

    창빈안씨는 1507년(중종 2)에 아홉 살의 나이로 궁녀가 되었다.

    중종의 총애를 입어 22세에 상궁이 되었고 31세에 숙원(淑媛), 이어 숙용(淑容)까지 품계가 올랐다.

    그녀는 2남 1녀를 낳았는데 둘째 아들이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이다.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河城君)이 후손이 없는 명종(明宗)을 이어

    제14대 임금(宣祖, 선조)으로 등극하자 1577년(선조 10)에 창빈(昌嬪)으로 추존되었다.

    묘역 입구에 있는 신도비는 1683년(숙종 9)에 세운 것이다.

    그녀의 자손이 왕위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후궁으로는 드물게 묘역에 신도비를 세웠다.

    이곳은 조선시대 후궁의 묘역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귀중한 문화재이다.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동작동) 국립 서울현충원 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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