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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병범 장군 순의비(安秉範 將軍 殉義碑)
    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22. 5. 24. 19:10

    안병범 장군(安秉範 將軍)

     

    안병범(일본식 이름:亀村貞信, 1890~1950)은 일제 강점 시와 대한민국의 군인이다.

    안종인(安鍾寅)이라는 다른 이름이 있다.

    한성부(서울) 출신이며 대한제국 말기에 무관 생도로 일본에 유학했다.

    육군중앙유년학교를 거쳐 1912년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로 근무했다.

    영친왕 시종무관과 일본군 보병 대좌를 지냈으며, 아들 안광수도 일본 육사에 진학시켰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 대한민국 군군이 창설되었고, 안병범은 군사 경력자 기용 방침에 따라

    1948년 다시 육군사관학교에서 1주일 동안 훈련을 받은 뒤 제8기 졸업생이 되었다.

    안광수와 함께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계급도 같은 육군 대령이 되었다.

    국방부 수도방위대 자문위원과 육군 제103여단장 등을 역임하다가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개전 초기에 서울이 조선인민군에게 점령되자 인왕산에서 칼로 자결했다.

    안병범의 동생 두 명도 한국 전쟁 중 전사했다.

    1955년에 안병범장군순의비가 제막되었으며,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에 묻혀 있다.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內

     

     
     
     

    妻 張嘉庭(처 장가정)

    長男 光鎬 陸軍 准將(장남 광호 육군 준장)

    次男 光銖 陸軍 大領(차남 광수 육군 대령)

    三男 光錫 故 陸軍 少尉 六.二五事變 時 戰死(산남 광석 고 육군 소위 6.25사변 시 전사)

     
     
     
     

    안병범 장군 순의비(安秉範 將軍 殉義碑)

     

    생을 탐하여 뜻을 굽히는 무리들은 모래알 같이 많지마는 뜻을 위하여 주검을 취하는

    이는 금옥 같이 귀한 것이지 여기 정의를 지켜 생명을 버리신 이가 계심을

    어찌 사랑스러이 여기지 않을까 보냐.

    그는 실로 대한민국 국군 선구자 중의 한 분이신 안병범 장군이니

    단기 4223년(1890년) 8월 17일 서울에서 나시어 일찍 한국 육군 유년학교에 입학하여

    무사의 길을 택하였으나, 나라의 대세는 기울어져 마침내 국치민욕의 날을 맞나니 때에 21세라,

    비분한 생각을 참지 못한 채 그대로 일본으로 건너가 무사의 부울 바 닦을 바를 모조리 치른 뒤에

    몸은 비록 그들 속에 들어 있어도 매양 나라 없는 설움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그윽이 새날 오기를

    기다리더니 드디어 민족해방의 기쁜 날이 오매, 때에 이미 56세라.

    몸은 비록 늙었으나 쓰이기를 기다린지라 분연히 육군 대령에 임명된 이래

    경남.북지구 사령관, 수도 방위군 고문관 등으로서 국군 장병들의 의범이 되셨더니

    불행하게도 6.25동란에 공산군이 남침하여 서울을 점령하자 시국의 그릇됨을 통탄함과

    아울러 뜻을 참아 굽힐 길 없어 마침내 7월 31일 인왕산으로 올라가

    국토통일을 하늘에 빌고 깨끗이 자기 목숨을 끊으시었다.

     

    어허 일생은 비록 61년을 누리었으나 그 의지는 산하와 더불어 길이 전할 것이니 뒤에 남은

    동지들은 울며 여기 비를 세우고 정의에 순절한 그의 행적을 영원히 기념코자 하는 것이다.

     

    단기 4288년(1955년) 9월 28일

    국군 동지 일동

     

    이문근 지음

    송암 김현봉 씀

    대위 최용덕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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