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
-
성군이 다스리는 태평성대를 향한 기원(祈願), 기린기(麒麟旗)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2. 8. 22. 04:06
성군이 다스리는 태평성대를 향한 기원(祈願), 기린기(麒麟旗) 조선시대 왕세자, 왕세손이 행차할 때 의장군이 들었던 깃발이다. 기린은 예로부터 성품이 온화하고 어질어서 살아있는 벌레를 밟지 않으며 돋아나는 풀을 꺾지 않는 등 성군(聖君)을 상징하는 동물로 여겼다. 왕실에서는 기린을 왕위 계승자인 세자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했다. 기린 도상은 말, 사슴, 용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한 기린기의 기린 도상은 조선시대 왕실 유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형태이다. 노루 몸통에 용의 얼굴과 비늘을 가졌고, 소의 꼬리와 유사하지만 말발굽이 있으며, 뿔과 갈기가 있다. 이러한 모습은 1892년 고종을 위한 잔치를 기록한 『진찬의궤(進饌儀軌)』 기린기 도설..
-
사적, 울주 언양읍성 (蔚州 彦陽邑城)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2. 8. 20. 04:03
언양읍성의 남문 영화루(映花樓) 언양읍지(彦陽邑誌)에 의하면 언양읍성의 정문에 해당하는 남문은 1800년대 초반 진남루(鎭南樓)에서 영화루(映花樓)로 이름이 바뀐 것을 알 수 있으며, 1900년대 초반 최종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영화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2층 구조이며 성벽에 의지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서 있는 개거식(開据式)이었음을 알 수 있다. 초석은 자연석 위에 둥글게 다듬은 높은 주초를 세웠고, 기둥머리 부분에는 날개 모양의 익공(翼工) 2개를 포개놓은 이익공을 두었으며, 지붕은 겹처마의 팔작지붕이다. 영화루 앞에는 효과적으로 방어하려고 성문을 둥글게 감싸 안은 반원형의 옹성(甕城)을 두었다. 사적, 울주 언양읍성(蔚州 彦陽邑城) 예부터 경주·울산·밀양·양산과의 교통 중심지로 전략적으로 ..
-
액(厄)을 막아주는 아름다운 장식, 잡상(雜像)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2. 8. 18. 04:04
액(厄)을 막아주는 아름다운 장식, 잡상(雜像) 궁과 능에 가보면 중요한 건물의 지붕선을 따라 다양한 장식기와가 올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중 전각 지붕 추녀마루 위에 나열된 장식기와를 잡상(雜像)이라고 한다. 잡상의 수는 건물 규모나 용도에 따라 각각 다르다. 목조 건물의 화재를 예방하고 액을 막아주는 의미가 담겼다고 전해지는데 건물의 위엄 있는 분위기를 담당하기도 한다. 유몽인(柳夢寅)이 저술한 한국 최초의 야담집 『어우야담(於于野譚)』에는 잡상이 서유기의 등장인물인 대당사부(삼장법사), 손행자(손오공), 저팔계, 사화상(사오정)을 따서 만들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또한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는 용에게 ‘구룡’이라는 아홉 자식이 있다는 이야기에서 따와 잡상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존재한..
-
원추리(Hemerocallis fulva)자연과 함께/꽃(花) 2022. 8. 16. 04:08
원추리(Hemerocallis fulva) 백합목 원추리과 원추리속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로 학명은 ‘Hemerocallis fulva (L.) L.’이다. 원추리는 한국에서 오랜 옛날부터 사랑받아 왔으며, 조선시대 사전인 에는 ‘원쵸리’라 하고 에는 ‘원츌리’라 했는데 중국명인 ‘훤초(萱草)’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훤초(萱草)’는 ‘근심을 잊게 한다’는 뜻의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도 원추리를 나물로 무쳐 먹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식용으로 사용되었다. 넘나물, 겹첩넘나물, 의남초(宜男草), 익남초(益男草), 등황옥잠(燈黃玉簪), 누두과(漏斗果), 황색채근(黃色菜根), 큰겹원추리, 홑왕원추리 등으로 불린다.
-
청도읍성(淸道邑城) - 경상북도 기념물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2. 8. 15. 04:08
청도 선정비군(淸道 善政碑群) 북문 공북루(拱北樓) 서문 무회루(撫懷樓) 청도읍성(淸道邑城) - 경상북도 기념물 읍성 면적 : 6,570㎡ 청도읍의 중심에 축조된 읍성으로 평면이 사각형 형태이다. 규모를 살피기에는 너무 훼손되어 있어 잘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의 문헌에 의하면 성벽은 길이 1,570보(약 1.9㎞), 높이 5척 5촌(약 1.65m)이었다고 한다. 화강석을 깨뜨려 기초부는 큰 돌로 깔고 그 위에 작은 돌을 섞어 가면서 흩어쌓기식으로 쌓았으며 협축법(夾築法)을 사용하였다. 지금 원형을 짐작할 수 있는 성벽은 동문지(東門址) 부근으로 성벽의 기초부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데 높이는 대략 1m 정도이고 길이는 10m 정도이다. 성곽의 축조연대는 1590년(선조 23)에 공사를 시작하여 2년 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