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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덕수궁(德壽宮)의 즉조당(卽阼堂)과 준명당(浚眀堂)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4. 1. 14. 04:37

    덕수궁(德壽宮)의 즉조당(卽阼堂)과 준명당(浚眀堂)

     

    덕수궁(德壽宮)은 원래 궁궐이 아니었다.

    성종(成宗)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집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왕궁이 모두 불타고 남아 있는 건물 중에서

    가장 쓸만한 건물이었던 건물을 임시로 왕궁으로 쓰면서 역사에 등장했다.

    준명당(俊眀堂)은 처음에는 '준명전(浚眀展)'이었다가 어느 땐가 준명당으로 바뀌었다.

    고종이 외국 사신들을 영접하거나 대신들과 만나서 국정을 논의하던 건물로

    1904년 대화재 당시는 고종과 순종의 초상화가 봉안되었다.

    즉 준명당은 경운궁의 편전으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동쪽에 자리잡은 즉조당과 같은 기능의 건물로 양식도 유사하다.

    즉조당의 퇴간(退間)이 동쪽으로 치우쳐 있는데 비해 준명당의 근간은 서쪽으로 치우쳐져 있다.

    준명당의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조선 고종 광무 원년(1897)에 중건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곳은 한 때 고종황제가 거처하면서 외국사절을 접견하기도 한 곳으로,

    후에는 고종과 순종의 초상화를 봉안하기도 하였다.

    준명당은 정면 6, 측면 4칸의 방형평면을 뒤쪽으로 달아내어, 전체적으로 L자형 평면을 이룬다.

    뒤쪽으로는 처마밑으로 개흘레(집의 벽 밖으로 새로 물리어 조그맣게 달아 낸 칸 살)가 첨가되고

    쪽마루 끝에 난간을 둘러 실용성있게 하였다.

    월랑으로 즉조당과 연결되어 있다.건축양식은 기둥 위에 주두를 놓아

    보머리(보뺄목:기둥을 뚫고 나온 보의 끝머리)를 받치고 있는데,

    보머리는 둥글게 다듬고, 초각된 부개를 받치고 있는 몰익공식을 이루고 있다.

     

    즉조당(卽阼堂)1897년 아관파천(俄館播遷)에서 경운궁으로 환어한 뒤

    1902년에 중화전으로 건립하기 전까지 정전으로 사용된 곳이다.

    애초에 즉조당 지역은 월산대군의 사저였고 광해군시절 창덕궁, 창경궁이 복원되면서 오랜기간 방치되어 있었다.

    경운궁이 갑자기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계기는 1895년의 을미사변이다.

    을미사변후 고종은 항상 살해의 위협에 시달렸는데 더 이상 궁궐수비대를 믿을 수 없었던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2년을 숨어지냈고 그 후에도 경복궁은 물론, 창덕궁이나 경희궁으로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임금이 언제까지나 남의나라 공사관에 머물수는 없기에 선택한 곳이 이 경운궁이다.

    이유는 경운궁이 있는 정동에 각국의 공사관이 모여있어서 유사시 타국의 공사관으로 피신할 것을 기대한 것이다.

    여차하면 다시 대피할 목적으로 러시아 공사관과는 지하 비밀통로로 연결까지 되어 있을 정도이다.

    즉조당에서는 광해군(光海君)과 인조(仁祖)가 임금으로 즉위를 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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