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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 태종무열왕릉비(慶州 太宗武烈王陵碑) - 국보 제25호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6. 7. 26. 23:00

    경주 태종무열왕릉비(慶州 太宗武烈王陵碑) - 국보 제25

     

    받침돌 길이 330cm, 너비 249cm, 높이 88cm, 머릿돌 높이 110cm

     

    이 비석은 신라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 재위 654~661)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무열왕릉 좌측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비의 몸돌은 없어지고 거북 모양의 받침돌과 용을 새긴 머릿돌만 남았다.

    받침돌에 조각된 돌 거북은 목을 높이 쳐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으며,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으로 신라인의 진취적인 기상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머릿돌 좌우에는 여섯 마리의 용이 서로 세 마리씩 뒤엉켜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을 조각하였다.

    앞면 중앙에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金仁問)이 쓴

    태종무열대왕지비라는 글이 돋을 새김되어 있어 비의 주인공을 밝혀 주고 있다.

    이 비는 표현이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있어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동양권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작품이다.

     

    =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844-1 태종무열왕릉 =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603~661, 재위 654~661)

     

    이름은 김춘추(金春秋). 할아버지는 진지왕이고, 아버지는 이찬(伊飡) 용춘(龍春또는 龍樹)이며,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다.

    비는 문명부인(文明夫人)으로 각찬(角飡) 김서현(金舒玄)의 딸이자 김유신(金庾信)의 동생이다.

    6세기 이래 비약적인 팽창을 이룬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중국의 통일왕조인 수(()과의 연결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김춘추는 주로 외교분야에서 활동했다.

    642(선덕여왕 11) 백제의 의자왕이 대야성(大耶城지금의 합천)을 함락하고

    그의 딸과 사위인 성주 김품석(金品釋)을 죽이자 백제에 보복하기 위해 적대관계에 있던 고구려에 지원을 요청하러 갔다.

    그러나 고구려가 죽령 이북의 땅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여 교섭은 실패로 돌아가고 그는 고구려에 억류되었다.

    이에 꾀를 내어, 귀국하면 고구려의 요구를 들어주도록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하는 한편,

    압량주군주(押梁州軍主)로 있던 김유신의 군사적 후원을 받아 풀려났다.

    선덕여왕 말년에는 일본을 회유하고 동정을 살피기 위해 일본에 다녀오기도 했다.

    고구려와의 동맹관계 수립에 실패한 후 당나라와의 관계강화를 위해

    648(진덕왕 2) 아들 문왕(文王)과 함께 당나라에 건너갔다.

    당 태종은 신하를 보내 교외(郊外)에서 그들을 맞게 했으며,

    자신이 지은 온탕비(溫湯碑진사비(晉祠碑)와 신찬(新撰)진서 晉書를 주는 등 후대했다.

    김춘추는 백제 공격을 위한 군사 원조를 약속받고 특진(特進)을 제수받았으며,

    아들로 하여금 당나라에 머물러 숙위(宿衛)하게 하고 귀국했다.

    654년 진덕여왕이 자식 없이 죽자, 상대등 알천(閼川) 등의 추대로 왕위에 올라 신라 최초의 진골 출신 왕이 되었다.

    그가 다른 진골 출신들을 제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데에는

    정치적·외교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그 자신의 역량뿐만 아니라,

    전쟁수행을 통해 군사적으로 강력하게 성장한 가야왕족 출신의 신흥 진골세력인 김유신의 긴밀한 지지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즉위 후 이방부령(理方府令) 양수(良首) 등에게 명해 율령을 상정(詳定)하게 하여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 조를 제정했으며, 직계친족과 측근세력에 의한

    지배체제를 구축하여 구귀족세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한편 당나라와 계속 친교하여 깊은 신뢰를 얻고 개부의동삼사 신라왕(開府儀同三司新羅王)에 책봉되었다.

    이러한 국내외적 안정을 바탕으로 고구려·백제에 대한 전쟁에 나섰다.

    659년 백제가 자주 국경을 침범하자 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당나라에 원병을 청했다.

    6603월 당 고종이 소정방(蘇定方)이 이끄는 13만 명의 군사를 파견하자 그해 5월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했다.

    남천정(南川停지금의 이천)에 이르러 태자 법민(法敏뒤의 문무왕)을 소정방이 머물고 있는

    덕물도(德物島지금의 덕적도)로 보내 작전계획을 짜게 한 후,

    스스로 금돌성(今突城지금의 상주 백화산)까지 나가 진두지휘하며 김유신·품일(品日흠춘(欽春) 등으로 하여금

    정병(精兵) 5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당군과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하도록 했다.

    7월에 김유신은 백제의 계백(階伯)이 이끄는 5,000명의 결사대를 황산(黃山)에서 물리치고 당군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로써 태종무열왕은 숙원이던 백제합병을 실현했으며 문무왕대에 이룩된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후 각지에서 백제부흥군이 봉기했으나 661년 백제부흥군을 격파하고, 백제의 관민 일부에게 관직을 주어 이들을 회유했다.

    고구려가 말갈과 연합하여 북한산성을 공격하자 고구려 정벌의 군사를 일으켰으며,

    백제의 유민(遺民)을 위무하던 중 59세의 나이로 죽었다.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지냈다. 시호는 무열(武烈)이며, 묘호는 태종(太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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