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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창읍성(高敞邑城) - 사적 제145호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6. 9. 4. 05:00

    고창읍성(高敞邑城) - 사적 제145호









    공북루(拱北樓) - 北門 

     

    이 건물은 낮은 기단위에 전면에는 자연석 주춧돌을 사용하고 배면을 화강석 돌기둥위에 둥근기둥을 세워 만든 2층 문루이다. 

    고창읍성에는 정문인 공북루와 동양루,진서루 등 3개소의 성문이 있는데

    성문 앞에는 적으로부터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서 옹성을 둘러쌓고

    그 위에 어장을 쌓아 성안에서 밖을 살필 수 있는 현안(縣眼)과 총을 쏠 수 있는 총안(銃眼)을 만들어 놓았다. 

    공복루(拱北樓) 전후 사적기와 상량문(上樑文)에는 순치 3(인조 24, 1646) 병술 12년에 공복루를 소건하고

    그 후 3회에 걸쳐 중수(重修)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


    옥은 죄인을 가두는 곳으로 감옥(監獄) 또는 원옥(圓獄)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의 옥은 대개 관아(官衙)의 입구에 짓고 동쪽 칸과 서쪽칸에

    .여 옥을 나누어 만들고 높은 담을 둥글게 둘러쳤는데 그래서 생겨난 이름이 원옥(圓獄)이다.

    이 자리에는 조선시대의 옥이 있었으나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던것을

    1983년에 발굴조사하여 확인된 유규(遺構)와 각종자료를 참고하여 2000년에 원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등양루(登陽樓) - 東門


    이 건물은 낮은 기단위에 전면에는 자연석 주춧돌(礎石)을 사용하고,

    배면(背面)은 화강석 돌기둥(石柱)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워만든 2층 문루(門樓)이다.















    성황사(城隍祠)


    성황신(城隍神)은 고을의 평화와 풍년을 지켜주는 수호신(守護神)으로 섬겨왔으며

    지금도 매년 중양절(重陽節, 음력 99) 모양성제(牟陽城祭) 날에 이곳에서 제사를 올린다.

    성황신은 서낭신이라고도 하는데 고을을 지켜주는 지신(地神)으로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과 더불어

    민간신앙으로 발전되어 왔으며, 그 지역에서 산세가 수려하고 하늘과 가까운 가장 높은 곳에 모셔왔다.

    이 자리에는 조선시대의 성황사가 있었으나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91년에 발굴조사하여 확인된 유규(遺構)와 각종자료를 참고하여 원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성황당(城隍堂)


    성황당은 서낭당의 본딧말로 성읍(城邑)을 지키는 성황신(城隍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재실이나 단()을 가리킨다.

    본래는 성지신(城地神)으로 불리다가 육조(六朝) 때 성황(城隍)으로 바뀌었고,

    조선 초기까지는 사()로 통용되다가 18세기에 단()으로 나타난다.




    장대봉(將臺峰)의 사적(事蹟)


    고창읍의 주산(主山, 일명 남산, 108m)인 장대봉은 진산(鎭山)인 방등산의 기맥이

    취령산(鷲嶺山)에서 북쪽으로 절절히 이어내린 맨 끝 봉우리다.

    이 등성이를 에워싸고 고창읍성을 쌓았는데 그 정상에는 지휘 장수가 올라서서 명령하던, 돌로 높게 쌓은 대지(臺址)가 있었다.










    진서루(鎭西樓) - 西門


    이 건물은 낮은 기단위에 전면에는 자연석 주춧돌(礎石)을 사용하고,

    배면(背面)은 화강석 돌기둥(石柱)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워만든 2층 문루(門樓)이다.




    향청(鄕廳)


    조선시대에는 대개의 고을에 향청이라는 관사가 있었다.

    지방의 수령을 자문 보좌하던 자치기구로서 조선초기에는 유향소라고 하였는데 임진왜란 이후부터 향청이라 불리워졌다.

    향청의 설치 목적은 지방의 향리를 규찰하고 향풍을 바르게 하는 향촌교화를 담당하였다.

    이 자리에는 조선시대의 향청이 있었으나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83년 발굴조사하여 확인된 유구와 각종자료를 참고하여 1993년에 원 모습으로 재건하였다.





    척화비(斥和碑)


    이 비는 조선말기에 대원군(大院君)이 펼친 쇄국정책(鎖國政策)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병인년(1866)에 비문을 만들고 신미년(1871)에 세웠다.

    당시 서양(西洋)의 열강(列强)들이 무력을 앞세워 문호(門戶)의 개방을 요구하고 엄청난 힘으로 밀어 닥치자

    섭정(攝政)의 자리에 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이들의 위협에서 나라를 지키는 길은 쇄국정책을 펴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이 비를 세웠다고 한다.

    비문의 내용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和親)을 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임을 온 백성에 경계한다라는 뜻이다.

    이 비문을 지은 병인년에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도화선이 되어 병인양요(丙寅洋擾)가 발생하였고

    비를 만들어 세운 신미년에는 미국군함이 강화도를 침범한 신미양요(辛未洋擾)가 발생하였다.








    고창읍성 내의 샘물 길영천(吉靈泉)



    장청(將廳)


    조선시대에는 왕궁(王宮)과 병영(兵營) 및 진()을 지키는 중앙군인과 지방의 군() ,

    ()을 지키는 속오군(束伍軍) 제도가 있었는데,

    장청은 속오군 우두머리인 현감(縣監)과 병방(兵房) 군교(軍校)들이 군무를 보살피던 청사(廳舍)이다.










    고창내아(高敞內衙)


    동헌(東軒)은 외동헌(外東軒)과 내동헌(內東軒)으로 나뉘는데,

    외동헌은 사무처로 흔히 이를 동헌이라 불렀으며 내동헌은 수령이 기거하던 살림집이라 내아(內衙)라고 불렀다.

    이 자리에도 조선시대의 내아가 있었으나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던 것을

    1987년 발굴조사하여 확인된 유구(遺構)와 각종자료를 참고하여 1989년에 원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고창동헌(高敞東軒)


    조선시대의 목()과 도호부(都護府).(),() 등 각 행정단위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守令)이 정무(政務)를 보던 청사(廳舍)를 세웠는데 이를 동헌(東軒)이라 하였다.

    건물정면에는 백성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고을을 평안하게 잘 다스린다는 뜻의 평근당(平近堂)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이 자리에는 조선시대의 동헌이었으나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87년발굴조사하여 1988년에 현 위치에 복원하였다.






    작청(作廳)


    이 건물은 조선시대 지방관아의 작청 건물을 복원한 것이다.

    작청은 질청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방(吏房)과 아전(衙前)들이 소관업무를 처리하던 청사(廳舍)이다.

    이 자리에는 조선시대의 작청이 있었으나 고창읍성이 문화재로 지정되기 전에

    고창여자중학교를 건립하면서 작청을 다른 곳으로 이건(移建)하여 관리소로 사용하여 오다가

    1986년에 학교를 성밖으로 이전하고 1991년에 원래의 자리에 복원하였다.





    풍화루(豊和樓)

     

    이 건물은 고창읍성 연못(蓮池)옆에 세운 2층 누각으로

    문헌에는 성내에 빈풍루(豳風樓)와 풍화루(豊和樓)가 있었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건물과 연못은 모두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던 것을 1988년에 발굴조사하여

    확인된 유구(遺構)와 각종자료를 참고하여 풍화루(豊和樓)1989년에,

    연못은 1990년에 원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건물 정면에 있는 현판(縣板)은 풍년과 고을의 평화를 기원하는 뜻으로 풍화루라고 하였는데

    글씨는 석전 황욱(石田 黃旭)선생이 92세에 쓴 글이다.






    관청(官廳)


    관청은 관주(官廚)라고도 하였는데 지방관아의 주방(廚房)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던 곳이다.

    이곳에는 수령(守令)과 그 가족들의 식생활을 비롯한 빈객(賓客)의 접대와

    각종 잔치에 필요한 물품의 조달 및 회계사무를 관장(管掌)하였다.

    이 자리에는 조선시대의 관청이 있었으나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91년에 발굴조사하여 확인된 유구와 각종자료를 참고하여 1992년에 원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고창읍성 약사(高敞邑城 略史)


    이 성은 조선 단종(端宗) 원년(1453)에 왜침(倭侵)을 막기 위하여 전라도민들이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슬기로 축성한 자연석 성곽이다.

    일명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하는 이 성은 나주진관의 입암산성과 연계되어 호남 내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 만들어진 읍성이다.

    196541일 사적 제145호로 지정된 이 성의 둘레는 1,684m, 높이 4~6m, 면적은 165,858

    . . 북문과 3개소의 옹성(甕城) 6개소의 치성(雉城)을 비롯하여 성밖의 해자(垓子) 등 전략적 요충시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

    성내에는 동헌(東軒), 객사(客舍) 22동의 조선시대 관아(官衙) 건물이 있었으나

    병화(兵火) 등으로 소진(消盡)된 것을 1976년부터 복원해 오고 있다.

    윤달에는 돌을 머리에 이고 성곽을 3회 돌면 무병장수하고 극락승천 한다는 전설이 있어 지금도 부녀자들의 답성(踏城) 풍속이 남아있다.




    고창읍성(高敞邑城)


    고창읍성의 축성연대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고창읍성의 관아건물 보수시에 나타난

    상량문과 각종 문헌 및 성돌에 새겨진 글자들을 보면 이 성은 조선 세종 32년(1450)부터 단종 원년(1453)까지

    전라좌우도 19개 군·현에서 구간별로 분담하여 축성한 흔적이 성벽 구간마다 각자(刻字)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무장시면(茂長始面)·무장종(茂長綜)이라는 흔적이 있으며,

    동문옹성성벽에는 계유소축감동송지민(癸酉所築監董宋芝玟)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어서 이를 해석해 보면,

    고창읍성이 계유년에 축조되었으며 무장현이 축성에 참여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고창읍성에 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고창현성곽조(高敞縣城郭條)에 처음 나타나고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중종 25년(1530)에 간행했으나 단지 증보처에 신증 이라는 두 글자만 표시하였으므로

    성종때 왕명에 의하여 김종직 등이 동국여지승람의 제 2차 수정을 거쳐 탈고한

    성종 17년(1484)이전의 계유년으로 축성연대가 압축된다 할 수 있으며

    무장현은 태종 17년(1417)에 무송현과 장사현을 통합하여 무장현이 되었으므로

    계유소축의 계유년은 1417년 이후의 계유년이 되므로 고창읍성은 1453년의 계유년에 축성된 것이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밟으면 병이 없이 오래살고 저승길엔 극락문에 당도한다는 전설때문에 매년 답성행사가 계속되고 있다.

    성밟기는 저승문이 열리는 윤달에 밟아야 효험이 있다고 하며 같은 윤달이라도 3월 윤달이 제일 좋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엿샛날이 저승문이 열리는 날이라고 하여 초엿새, 열엿새, 스무엿새 날에 답성행렬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성을 한바퀴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바퀴돌면 무병장수하며 세바퀴돌면 극락승천한다고 한다.

    성을 돌때는 반드시 손바닥만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세번 돌아야 하고 일정한 지역에 그 돌을 쌓아두도록 하였다.

    특히 윤삼월의 효험을 강조하고 있음도 겨우내 부풀었던 성을밟아 굳게하기 위함이었을 것이고

    머리에 돌을 이게 함으로서 체중을 가중시켜 성을 더욱 다지게하는 의도에서 였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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