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덕혜옹주 묘(德惠翁主 墓)
    국내 나들이/능, 원, 묘(陵 園 墓) 2016. 12. 30. 04:23

    덕혜옹주 묘(德惠翁主 墓)


    고종황제와 귀인양씨의 고명딸인 덕혜옹주(德惠翁主, 1912-1989)의 묘이다.

    고종은 덕혜옹주의 교육을 위해 덕수궁(경운궁)에 처음으로 유치원을 세웠을 정도로 덕혜옹주를 아꼈다.

    덕혜옹주는 9세가 될때까지 복녕당 아가씨로 불리다가 1921년 덕혜옹주에 봉해졌고

    1925년에 일제가 유학이라는 명분을 세워 일본으로 데려갔다

    일본에서는 영친왕의 숙소에 기거하면서 학습원과 중등과정을 수료하였다.

    19세에 소 다케유키(宗武志, 종무지, 1908~1985)와 정략결혼을 하여 딸 하나를 낳았다.

    1962년에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여 창덕궁 낙선재에서 기거하다가 1989년에 세상을 떠났다.





    대한 덕혜옹주지묘(大韓 德惠翁主之墓)



    백일사진(1912년)



    돌기념 사진(193년)



    유치원 입학(앞줄 가운데가 덕혜옹주) - 덕수궁 준명당 1916년



    영친왕 일시귀국 기념 대한제국 황실가족 사진 (9116년)



    당의를 입은 어린시절 사진 (1924년)



    경성일출심상소학교 송별회 (1925년)



    일본 유학 송별기념 (1925년)



    일본 출국이전 (교장, 담임과 1925년)



    경성역에서 일본으로 유학길 ( 1925년)



    경성일출심상소학교 덕혜옹주 작품 (1925년)



    경성일출심상소학교 덕혜옹주 수예품 (1925년)



    양장차림 덕혜옹주 (1925년)



    일본 유학생활 (1926년)



    모친 영면 1주기행사 참여 귀국 (1930년



    결혼식 (1931년)



    부부사진 (1931년)



    딸 마사에 (1934년)



    38년만에 환국 (1962년)




    덕혜옹주의 탄생과 유년시절


    덕혜옹주는 1912년 5월 25일 덕수궁(德壽宮)에서 태어났다.

    고종의 환갑이 되던해에 궁인 양씨에게서 얻은 딸이었으며, 양씨는 덕혜옹주를 낳은 이후 "복녕(福寧)"이라는 당호를 얻고

    종1품 귀인(貴人)에 봉해져 이후 "복녕당 귀인 양씨"로 불리었다.

    고종에게는 모두 9남 5녀가 있었으나 많은 자녀가 어린 시절에 사망하여 어른으로 성장한 후손은 

    순종, 영친왕, 의친왕, 그리고 덕혜옹주 3남 1녀뿐이었다.

    이중에서도 덕혜옹주는 늦은 나이에 얻은 고명딸로 고종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고종은 태어난 지 2개월된 덕혜옹주를 복녕당에서 자신의 처소인 함녕전으로 옮기게 할 정도로 새로 얻은 딸을 사랑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부왕과 그 자녀가 같은 처소에서 기거할 수 없음이 왕실의 법도였음을 고려한다면

    고종이 덕혜옹주를 얼마나 아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고종은 옹주가 5살이 되던 해인 1916년 덕수궁 안에 유치원을 설립하였다.

    옹주의 교육은 교구치 사다코(京口貞子)와 장옥식(張玉植)이 맡았으며,

    옹주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귀족 자제와 시종을 포함하여 10여명을 원생으로 맞았다.

    그러나 대한제국 황실 자손의 수를 늘리지 않으려는 조선총독부의 정책 때문에

    옹주는 여섯 살이 되어서야 고종의 자녀임을 인정받고 정식 왕공족(王公族)으로 등록되었다.

    옹주는 10세가 될 때까지 이름 없이 처소에 따라 "복녕당아기(福寧堂阿只)". "집희전아기씨(緝熙殿阿只氏)" 등으로 불리다가,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1921년 5월 4일 드디어 "덕혜(德惠)"라는 호를 받았다.

    덕혜옹주는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어머니 복녕당 귀인 양씨와 함께 창덕궁(昌德宮) 관물헌(觀物軒)으로 처소를 옮겼다.

    황실의 보물이었던 덕혜옹주에 대한 관심은 고종 승하 후 더욱 지대해져 조선일보 등의 국내언론에 자주 보도되었다.

    덕혜옹주는 10세에 일본인 귀족 자제들을 위한 초등교육기관인 "일출심상소학교(日出尋常小學校)"에 입학하여

    일본식 의상을 입고 일본식 교육을 받아야만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일상까지 자세하게 보도되었으며,

    이는 나라 잃은 백성들의 큰 위안거리가 되었다.





    덕혜옹주의 강제 일본 유학


    일제강점기 대한제국의 황손들은 정책적으로 일본 유학이 추진되었다.
    조선총독부는 황실의 왕자들을 모두 일본으로 보낸데 이어

    덕혜옹주마저 일출심상소학교 5학년 때인 1925년 일본으로 보낼 것을 결정하였다. 

    1925년 3월 27일 옹주는 이왕직장관 한창수(李王職長官 韓昌洙), 이왕비전하부촉탁 스미나가 히데코,

    그리고 나인 2명과 함께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 도착 후에는 영친왕(英親王) 부부의 처소에서 머물렀다.

    덕혜옹주는 1925년 4월에 학습원 여자 중등과에 입학하였다.

    학습원은 황족이나 귀족 자녀의 교육을 위해 세워진 교육기관으로

    덕혜옹주 외에도 영친왕과 영친왕비, 이우의 부인 박찬주도 학습원 출신이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할 나이였던 옹주는 독살당하지 않기 위해 보온병에 물을 넣어 다니는 등 타국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생활하였다.

    일본으로 떠난 뒤 1년만인 1926년 4월 25일 아버지처럼 따르던 순종(純宗)이 서거하였다.

    옹주는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침식(寢食)도 잊을 때가 많았다.

    설상가상으로 3년 뒤인 1929년 5월 30일에는 어머니 양귀인마저 돌아가셨다.

    덕혜옹주는 일제가 규정한 "왕공가궤범(王公家軌範)"에 따라 상복도 입지 못한 채 장례를 치러야 했다.

    어머니의 장례 이후 도쿄로 돌아 온 덕혜옹주는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병세는 날로 나빠져 조발성 치매를 진단 받기에 이르렀다.




    덕혜옹주의 결혼과 생활


    한일 강제병합 후 대한제국 황실을 왕공족으로서 일본의 황실에 포함시킨 일본은

    영친왕에 이어 덕혜옹주 역시 일본인과의 혼인을 추진했다.

    덕혜옹주의 배우자로서는 쓰시마도주(對馬島主)의 후예인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 1908~1985)가 선택되었다.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가 혼인하게 된 배경에는 쓰시마(對馬島)가 오랫동안 조선과 일본의 외교창구 역할을 해 왔다는

    상징적인 의미 외에도 대한제국 황실의 유일한 여성 미혼자로서 상당한 경제력을 보유한 덕혜옹주를

    소(宗) 가문에 맺어주고자 하는 일본의 의도가 있었다. 

    1929년부터 혼담이 오고 간 끝에 1931년 5월 8일 마침내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덕혜옹주 부부는 도쿄의 자택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비록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정략결혼이었으나

     신혼생활 초반 덕혜옹주 부부의 사이는 순탄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결혼 이듬해 딸 마사에(正惠)가 태어난 후 덕혜옹주의 정신질환이 악화되면서 부부의 결혼생활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게다가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후 왕공족 제도의 폐지로 소 다케유키는 백작 지위를 잃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다케유키는 덕혜옹주를 도쿄 도립 미츠자와 정신병원에 입원시켰으며, 결국 1955년 일방적으로 이혼을 선언하고 일본 여성과 재혼하였다.

    딸 마사에는 그 다음 해에 자살을 암시하는 글을 남기고 실종되었다.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가 한국으로 돌아간 10여년 뒤,

    덕혜옹주가 머물고 있는 창덕궁의 낙선재를 방문하였으나 만남을 거절당하고 돌아갔다고 전한다.





    조국으로 돌아온 덕혜옹주


    덕혜옹주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남편은 일방적으로 이혼을 선언하고 일본 여자와 재혼하였으며,

    딸 마사에(正惠)는 편지를 남기고 실종되었다.

    덕혜옹주의 쓸쓸하고 안타까운 입원생활 동안 한반도는 한국전쟁을 겪으며 격변의 세월을 지나고 있었다.

    덕혜옹주를 찾아내 환국을 추진한 것은 언론인 김을한(金乙漢, 1906~1992)이었다.

    김을한은 서울신문 도쿄 특파원을 지내고 영친왕 부부와도 가깝게 지냈는데,

    1950년 처음 덕혜옹주의 소식을 접하고 옹주의 환국을 추진했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유로 대한제국 황손들의 귀국을 반대했던 이승만 대통령에게 거절당했다.

    이후 대한민국과 일본 양측에서 모두 잊혀가던 덕혜옹주의 존재는 정권이 교체된 이후,

    김을한의 노력으로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에게 알려져 1961년 드디어 환국이 승인되었다.

    덕혜옹주는 1962년 1월 26일 51세의 나이로 조국을 떠난 지 38년 만에 돌아왔다.

    그러나 정신질환이 더욱 악화된 덕헤옹주는 주변 인물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토록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온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꽃다운 소녀의 모습으로 조국을 떠났던 덕혜옹주는 정신질환을 앓는 중년 여성이 되어 돌아와 많은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덕혜옹주는 귀국 후 바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하여 약 6여년간 요양하였고,

    1967년에 퇴원하여 창덕궁 낙선재의 수강재에서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 어린 시절의 유모 변복동 여사와 함께 지냈다.

    낙선재에서는 2주에 한번씩 정신과 치료를 받았으나 병환에 별다른 차도는 없었다.

    다만 정신이 맑은 날에는 주변인들의 도움을 받아 낙선재 주변을 나들이하거나 TV를 보거나 아리랑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딸 마사에의 이름을 쓰고 부르면서 옛일을 이야기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덕혜옹주는 1989년 4월 21일 78세 나이에 수강재에서 영면하였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