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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국내 나들이/기념관(記念館) 2017. 10. 31. 04:30

    제암리 3.1운동 순국 기념관 -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191931일 우리 민족은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배에 일제히 항거하여 3.1운동을 전개하였다.

    민족의 독립을 간절히 갈망하던 화성지역 민중들은 면사무소와 주재소 등을 파괴하고

    일본인 순사 2명을 처단하는 등 일제의 식민지배에 맞서 격렬한 무력항쟁을 전개하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는 제암,고주리 학살사건을 비롯하여

    화성전역에 걸쳐 방화와 학살을 일삼고 마구잡이식 체포와 구금, 갖은 고문을 자행하였다.

    1919415제암,고주리 학살사건

    화성지역 3.1운동에 대한 일제 탄압의 실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제암.고주리는 우리민족의 항일 저항정신이 깃든 역사적인 장소로써

    이곳에 제암리 3.1운동 순국 기념관을 세워 순국선열의 얼을 기리고

    화성지역 3.1운동의 독립정신을 계승발전시키고자 한다.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길 50 (제암리)

     

     

     

     

     

     

     

    제암리의 참살 (박목월,朴木月)


    무슨 소리를 해 보았자
    그들이 지른 제암리의 불은
    이제 와서 끌 수 없고
    교회 안에 모였던
    스물여덟 명의 형제를
    살려낼 수 없다.

    왜병 중위가 이끄는
    악마의 한 떼거리가 어진 백성을
    교회당 안에 몰아넣고
    난사했다. 살해했다
    이유도 간단했다.


    우리나라를 우리가 사랑하기 때문에
    제 나라를 사랑하기 때문에
    죽음을 당한 형제가 제암리의 그분들뿐이랴마는
    나는 죽지만 이 어린 것만은 살려달라고
    죽음의 창틈으로 내미는


    천진한 어린 아기의
    무심한 눈을 겨냥하며
    방아쇠를 당기는 놈들의 손
    모성애의 마지막 애원조차
    귀에 들리지 않는 귀머거리의


    미친 악마 귀머거리의 악마
    무슨 소리를 해 보았자
    죄과는 죄과
    상처는 상처
    씻을 수 없다.

    왜족이 어떻다는 것을
    그들의 불거진 이마와
    튀어나온 관골(觀骨)
    미간(眉間)에다 붙은
    새까맣게 반들거리는 눈이
    어떻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제암리를 태운 불이
    제암리만 태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마 지금
    우리는 의젓한
    자주국의 백성으로서
    환하게 웃는 얼굴로 그들을
    대할 수 있음은
    협량하지 않기를 다짐하는
    아량과 냉대와
    내일의 찬란한 앞날이
    우리를 밝게 하기 때문이다.

    무슨 소리를 해보았자
    그들이 지른 제암리에 불은
    이제 와서 그들이
    끌 수 없으며
    죽음 당한 우리의 형제가
    살아날 수 없다.
    뉘우치는 것은 그들의 덕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자주국의 백성으로서
    환하게 웃는 얼굴로 그들을
    대할 수 있음은
    지난날보다 오는 날이 소중하고
    어제보다 내일이 귀하고
    과거를 되새기기보다
    내일의 꿈에 부풀고
    조국의 산하에
    철철 넘쳐 흐르는
    오늘의 햇빛이 밝기 때문이다.

     

     

     

     

     

     

     

     

     

     

     

     

    구 기념전시관에 붙어있던 석판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누가복음 23:24

     

    이 교회는 19193.1운동 때 제암교회 소타사건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일본인들의 요청에 따라

    우리가 같이 화해함을 기념하기 위하여 물질과 정성을 다하여 건축하였다.

     

    알포아에가 건축연구소가 설계하였고 코리아건설주식회사가 시공하였다.

     

    1970825일 기독교대한감리회

     

     

    고요한 마을 제암리

     

    속칭 두렁바위로 불리는 조선 후기 전형적인 씨족중심의 순흥안씨의 집성촌인 제암리마을.

    제암교회가 보인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What must we always keep in our memories)

     

    인류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고유한 존엄성과 평등하고 양여(讓與)할 수 없는

    권리를 가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세계의 자유, 정의,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기초이다.

    세계인권선언전문에 제시된 바와 같이 모든 인간은

    이념, 종교, 인종, 민족, 국적 등 어떠한 이유로도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20세기만 하더라도 이러한 인간의 존엄성이 완전히 무시된 채

    자행된 참혹하고 무자비한 학살사건이 전 세계 곳곳에서 발견된다.

    학살의 대상은 대부분 무기를 들지 않은 민간인,

    어제까지 우리와 같이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한 순간에 학살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수십 명에서 수백만 명에 달하는 무고한 사람들을 허망한 죽음에 이르게 한 주범은 무엇이었을까?

    이 전시를 통해 제노사이드라는 비극적 역사에서 우리가 진정 기억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같은 아픔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민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제암리 학살사건

     

    3·1 운동은 기독교가 한국 민족주의 운동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19193·1 운동 직전 제암리에서 형성된 기독교와 천도교는

    수원, 화성 지역의 민족운동 세력과 제휴하여 만세 시위를 모의했고

    학생과 상인, 농민, 노동자 등 일반 시민들은 이 지역의 3·1 독립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를 알게 된 일제는 화성 지역의 적극적인 항쟁에 더욱더 폭력적이고 조직적인 보복을 가했다.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야만적인 토벌 작전을 폈던 것이다.

    화성 지역의 많은 마을들이 참담하게 초토화 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많은 인명이 잔혹한 방법으로 처참하게 죽어간 제암리 사건

    화성 지역 만세운동 진압 작전의 대미를 이루는 학살 사건이었다.

    1919316, 수원에서 독립 시위가 일어났으며 이는 곧바로 화성군의 각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시위는 4월에도 계속 이어져 수촌리와 화수리, 발안에서 격렬해졌는데

    특히 수촌리와 화수리 시위에서는 군중이 주재소를 습격하고 일본인 순사를 타살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확산되자 일제는 군대를 동원하여 보다 적극적이고 폭력적인 진압 작전에 나섰다.

    두 차례에 걸친 작전으로 대부분 시위 주동자들은 체포됐으나

    발안 장터 시위를 주도한 제암리 주동자들이 체포되지 않자 일본군은 제암리를 토벌하기로 작정하고

    415, 30명의 헌병대원을 이끌고 제암리로 들어섰다.

    마을에 도착한 그들은 15세 이상의 모든 성인 남자들을 제암리교회에 모아놓고

    문을 폐쇄한 뒤 일제사격을 가하고 불을 질렀다.

    이 학살극에서 제암리의 기독교 지도자인 홍원식과 안종후 등 마을 남자들이 대부분 숨지고,

    이를 보며 달려나온 부녀자까지 사살됐다.

    23명의 주민이 목숨을 잃고 마을 전체가 불에 탄 끔찍한 학살극이었다.

     

     

     

    제암교회

     

    제암교회는 190585일 제암리 이장이었던 안종후씨의 주도로 창립됐다.

    지역 주민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애국정신을 심어주는 등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던 제암교회는

    191945일 발안주재소 앞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일제는 415일 오후 2시경 일경과 헌병 30여 명을 동원하여, 23명의 성도들을 초가 예배당에 모이게 한 뒤

    모든 문을 폐쇄하여 가둔 채 불을 지르고 총을 쏴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희생자들의 시신은 캐나다 선교사인 스코필드 박사에 의해 수습돼 발안공동묘지에 묻혔다.

    제암교회는 1919712일 다시 문을 열었다. 일본 기독교인과 사회단체들이

    1970년 사죄의 뜻을 담은 성금을 보내와 새 예배당과 유족회관을 건립하기도 했다.

    유해는 1982년 발굴됐다. 현재의 제암교회와 기념관은 200131일 건립된 것이다.

     

     

    순국기념관에는 당시 사건을 목격한 증언자의 기록이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1. 415일 정오가 지나 마을로 들어온 왜군 중위가 훈계할 것이 있다며 주민들을 교회당으로 불러들였다.

    2. 사망자는 모두 23명인데 11명은 기독교인이고 나머지는 천도교인이었다.

    3. 불타는 중에 탈출한 기독교인 한 사람이 살육 현장을 증언했다.

    4. 왜군 중위가 기독교의 교지(敎旨)에 대해 묻자 이라는 지도급 교인이 성서는 이웃 간에 친교할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길 것과 최후에 행한 대로 갚아준다는 것을 가르쳤다고 했다.

    왜군 중위는 기독교인들의 행위가 그 가르침에 벗어났다고 하며 밖으로 나갔다.

    5. 왜군 중위의 날카로운 구령이 세 번 있자 군인들이 사격을 시작했다.

    6. ‘씨는 도망치다 발각되어 사살되고 다른 탈출자는 설교단 뒤에 나 있던 창문을 열고 달아나 살았다.

    7. 교회 안에서 죽은 이란 청년의 부인은 불타는 집에서 이불을 꺼내다가 일본군에게 참수당했다.

    8. ‘씨 부인도 마을로 오던 중 총 두 발을 맞고 그 날 밤 죽었다.

    9. 일본군은 그날 건너편 마을 기독교인 6명도 집 안에 모아놓고 사살했다.

    10. 군인들은 제암리 서쪽 20리 떨어진 마을로 가서 부인 한 명을 사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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