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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수정(樂水亭) - 거창 수승대(居昌 搜勝臺)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7. 12. 18. 05:23
요수정(樂水亭) - 거창 수승대(居昌 搜勝臺)
요수정은 요수 신권(樂水 愼權, 1501~1573) 선생이 풍류를 즐기며 제자를 가르치던 곳으로
1542년 구연재와 남쪽 척수대 사이에 건립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그 뒤 다시 수해를 입어 1805년 후손들이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요수 선생은 조선시대 유학자로 학문에 뜻이 깊어 널리 성현을 찾아 배웠으며
벼슬을 멀리하고 안빈낙도(安貧樂道)에 힘썼다.
돌아가신 뒤에는 구연서원에서 배향(配享)하고 있다.
요수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자연암반을 그대로 초석으로 이용하였다.
정자의 마루는 우물마루 형식이고 사방에 계자난간을 둘렀다.
종보가 있는 5량 가구로 가구의 짜임이 견실하고, 네 곳의 추녀에는 정연한 부채살 형태의 서까래를 배치하여
세부장식에서 격조 높은 정자건물의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고,
특히 추운 산간지역 기후를 고려하여 정자 내부에 방을 놓는 등
지역적 특성이 잘 반영된 거창 지역의 대표적 건축문화재이다.(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3호)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문화재를 지킨 요수기념비
2012년 9월 17일 초강력 태풍 '산바'가 200년생 소나무를 뿌리채 뽑아 요수정을 덮쳤으나
요수의 제자와 후손들이 선생을 기리며 세운 기념비가 소나무를 받쳐 요수정의 피해를 막았다.
이는 요수의 제자와 후손들의 정성이 재앙을 예방하였다.요수 신선생을 기리는 비
요수 신(愼) 선생은 이조 명종대왕 때 분이셨다. 존함은 권(權), 자는 언중(彦中), 호는 요수(樂水)라 하셨다.
선생은 구연동 수승대(龜淵洞 搜勝臺)에 터를 잡으셨다. 벼슬을 멀리 하시고 오로지 덕을 쌓기에 힘쓰셨다.
바위에 앉아 이치를 생각하시고 물을 보며 즐기셨다.
솔바람 소리를 벗 삼아 시를 읊으셨고 제자를 모아 가르침을 하늘이 주신 업으로 삼으셨다.
선생의 밝은 덕을 우러러 제자들이 모여드니 그 가르치심이 나라에 퍼졌다.
세상은 변했지만 물소리는 한결같다.
수승대 바람결에 선생을 느끼고 골짜기에 울리는 물소리에 선생의 음성이 살아나신다.
이에 선생의 높으신 덕을 기리어 선생이 노니시던 이곳에 한 덩이 돌을 세운다.
글 박목월
一出人間萬種愁(일출인간만종수) 인간 세상에 한번 나서 오만 근심 심었는데
先亭來㘴更無愁(선정내좌갱무수) 선조 정자에 와 앉으니 다시 근심 없어진다.
從知知足成眞樂(종지지족성진낙) 앎을 쫒되 만족할 줄 알면 참 즐거움 이루어지니
可笑浮生分外愁(가소부생분외수) 헛된 인생이 분수 밖을 근심하니 우습구나.
檜堂 愼奭宰(회당 신석재)
昔年猿鶴誓(석년원학서) 옛날에 원 학이 맹세하기를
地勝趣尤佳(지승취우가) 지형이 뛰어나 아취가 아름답다 했지
石狀龜如曝(석상구여폭) 돌 형상은 거북이가 볕을 쪼이는 듯 하고
潭心鏡不埋(담심경불매) 못 중심은 묻히지 않는 거울이로다
悠雲堪撫跡(유운감무적) 먼 구름 하늘에서 자취를 더듬고
茂草謾嬰懐(무초만영회) 무성한 풀 부질없이 회포를 더하네
仁智諒非貳(인지양비이) 인자와 지자는 둘이 아님을 믿나니
繞灣紫翠崖(요만자취애) 물굽이가 붉고 푸른 벼랑을 둘러간다
후손 용직鏞直 삼가 차운함 _ 요수정 판상시문
人生何限百年愁(인생하한백년수) 인생이 어찌 백년 기한이라 하는가?
纔送一愁又一愁(재송일수우일수) 겨우 한 근심을 보내면 또 한 근심이니
安得占居此臺上(안득점거차대상) 어찌하여 이곳에 지어서 대에 올랐던가?
送愁日日更無愁(송수일일경무수) 나날이 근심 보내면 다시 근심이 없어지기 때문이지.
乙亥 臘月 日 靑松 沈宜純 小休題
(을해년 남월 일 청송 심의순 잠깐 쉬며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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