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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의학의 신기원을 이룬 명의, 양평군 허준(陽平君 許浚)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9. 3. 20. 19:30

    한의학의 신기원을 이룬 명의, 양평군 허준(陽平君 許浚)


    출생과 성장

    허준(1539~1615)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에서

    아버지 허론(許碖)과 어머니 김씨(金氏)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양천허씨의 시조인 허선문(許宣文)20세손이다.

    할아버지 허곤(許)은 무관으로 경상우수사를 지냈고 아버지 허론(許) 역시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지냈다.

    허준은 어릴 때 경상도 산청으로 이사하여 이곳에서 성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허준은 이곳에서 어려서부터 의사수업을 시작했다.

    그는 서자(庶子)로 태어났기 때문에 신분제 사회에서 벼슬길로 나가지 못하고

    당시 중인이나 서얼(庶孼)들의 업으로 되어 있던 의학의 길을 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허준의 총명과 열성은 이미 20대에 그를 전국적으로 유명한 의사가 되게 했다.

    15696월 그의 나이 24세 되던 해 부제학 유희춘(柳希春)의 부인을 치료하기 위해 서울로 초치되었고

    이듬해에는 유희춘의 병까지 치료하게 되어 서울 장안에서 명성이 높았다.


    내의원 생활

    허준이 내의원 취재에 등과한 것은 1574(선조 7) 그의 나이 29세 때로 상당히 늦은 나이에 궁중의사로서의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내의원에 들어간 다음해부터 어의로 선임되어 안광익(安光翼)과 더불어

    임금의 병을 진찰하고 효험이 있자 임금으로부터 신망을 얻게 되었다.

    15789월 내의원 첨정으로 있을 때 당시에 새로 출판된

    '신간보주동인유혈침구도경(新刊補註銅人腧穴鍼灸圖經)'을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았다.

    1587년에는 임금의 건강이 회복되었기 때문에 내의원 책임자와 어의들이 모두 포상을 받았는데

    허준은 태의 양예수(楊禮壽안덕수(安德秀) 등과 더불어 녹피(鹿皮) 1()을 하사받았다.

    1590년에는 허준이 왕자를 살린 공으로 당상관(3품 통정대부 이상을 말함)의 가자(加資)를 받았다.

    러자 정원 사헌부 사간원에서 일제히 나서서 "왕자를 치료한 것은 의관으로서 의당 해야 할 일이고

    비록 공이 있다 해도 의관에게 당상의 가자를 내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므로 취소할 것"

    왕에게 여러 번 간청했으나 선조가 신하들의 거듭된 요구를 물리쳤다.

    1592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백성들이 살상되고 왕은 의주까지 피신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허준은 선조의 건강을 돌보았다. 이때의 공로로 허준은 뒷날 공신의 대열에 끼게 된다.

    1595년 왕이 별전편방에 나와 의관인 허준 등으로부터 침치료를 받는데 약방 도제조 김응남, 제조 홍진, 부제조 오억령 등이 입시했다.

    1596년 동궁인 광해군의 병을 고친 공로로 허준은 가자되고 김응탁(金應鐸정예남(鄭禮男)은 승직(陞職)되었다.

    이에 허준은 그 벼슬이 정헌대부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즉시 간원들이 나서서 의관들의 가자를 개정할 것을 청했으나 선조가 "공로가 있는 자들이다"라고 하여 듣지 않았다

    같은 해에 선조가 허준에게 완비된 우리나라 의서를 찬집하라고 일렀다.

    허준이 유의 정작(鄭碏)과 태의 양예수·김응택·이명원(李明源정예남 등과 편국을 설치하고

    책의 요점을 잡아가는 시점에 정유재란이 일어나 의관들이 흩어져 작업은 자연히 중지되었다.

    이에 선조가 허준을 다시 불러 허준 혼자 책임지고 새로운 의서를 만들라고 하면서 내장방서 500권을 내어주며 참고하도록 조치했다

    1600년 수의(내의원의 책임자) 양예수(지사2)가 사망함에 따라 허준이 수의가 되었다.

    1604년 임금이 호성공신(扈聖功臣)의 교서를 발급하여 의관으로서는

    허준과 이연록(李延祿) 두 사람을 3등에 책훈하고 허준은 양평군(陽平君)에 봉작되었다.

    1606년에는 임금의 병을 치료한 공로로 양평군 정1품 보국숭록 대부로 승급했다.

    이것은 벼슬로서는 최고의 품계인 만큼 신하들의 반대가 극심하여 수십 차례에 이르렀다.

    계속되는 신하들의 반대 때문에 선조도 결국 허준의 가자를 보류했다.

    1607년에는 임금의 병이 위중하고 잘 낫지 않았는데 이것은 허준이 약을 잘못 썼기 때문이라 하여

    연일 조정에서 수의 허준을 벌주는 일로 논의가 복잡했으나 선조가 벌을 주기보다 의술을 다하게 해야 한다고 막아섰다.

    1608년에 마침내 선조의 병세가 급박하다가 돌연히 사망했다.

    선조의 병은 이미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사헌부나 사간원에서 가만 있을 리 없었다.

    광해군 즉위초부터 연일 계속되는 계청에 허준을 보호하던 광해군도 마침내 견디지 못하여

    허준의 직책을 좌면하고 거처를 제한하는 벌을 내리도록 승인했다.

    그러나 그해가 가기 전에 허준에게 내린 벌을 해제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허준은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찬집에 노력하여 1610(광해군 2) 마침내 완성했다.

    이후 어의로 있다가 1615년 죽었다. 그의 사후 광해군은 생전에 보류되었던 보국승록대부를 추증했다.






    옛날 뛰어난 의원은 사람의 마음을 잘 다스려서 미리 병이 나지 않도록 하였는데

    지금의 의원은 사람의 병만 다스리고 사람의 마음은 다스릴 줄 모른다.

    이것은 근본을 버리고 끝을 좇으며 원천을 캐지 않고 지류만 찾는 것이니

    병 낫기를 구하는 것이 어리석지 않은가


    구암 허준선생 '동의보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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