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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산근린공원, 소악루, 서울 양천고성지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9. 3. 21. 04:30
궁산근린공원, 소악루, 서울 양천고성지
소악루(小岳樓)
소악루는 조선 영조(1724~1776 재위) 때 동복현감(同福縣監)을 지낸 이유(李楡, 1675~1757)가
양천 현아(陽川 懸衙) 뒷산 기슭 강변 악양루(岳陽樓) 터에 재건(再建)한 것이었다.
당시 이 누각(樓閣)에 오르면 안산(鞍山), 인왕산(仁王山), 남산(南山), 관악산(冠岳山) 등이 한 눈에 보이고
탑산(塔山), 선유봉(仙遊峯) 및 드높은 한강 줄기가 끝없이 이어지는 등 진경(珍景)이 펼쳐져
조관빈(趙觀彬), 윤봉구(尹鳳九), 이병연(李秉淵) 등 당대 명사(名士)들이 이곳을 찾았다 하며,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대가인 겸재 정선(謙濟 鄭敾)이 이곳 현령(縣令)으로 있을 적에 그린
산수화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서 당시의 경관(景觀)을 볼 수 있다.
소악루의 원 위치는 ‘여지도서(輿地圖書)’, ‘양천군읍지(陽川郡邑誌)’와 정선이 그린 소악루,
소악후월(小岳候月) 등의 그림으로 짐작해 볼 때
강서구 가양동 산 6-4(일명 세숫대바위) 근처로 추정되나 주변의 변화가 극심하여,
한강변 경관 조성 및 조망(眺望)을 고려하여 현 위치에 1994년 신축하였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28.35㎡)으로 화강석 8각 주초(柱礎)에 민흘림의 원주(圓柱)를 세우고
5량집 겹처마구조로 단층 팔작(八作)기와지붕으로 하고 주위에 난간(欄干)을 둘러 한강 경관을 조망토록 배치했다.
겸재 정선이 바라본 한강의 아름다운 풍광
안현석봉(鞍峴夕烽) - 안현의 저녁 봉화불
해질녘 양천현아가 있는 궁산에서 강 건너편 안현의 봉화불을 바라본 정경을 그린 것이다.
안현은 길마재, 안산, 모악산이라고도 불리는 산으로, 현재 이화여대 뒷산이다.
원경에 정상부에 붉은 점으로 봉화를 표현한 안현이 와우산, 정토산과 이어져 펼쳐지고 있고,
근경의 좌우에는 궁산자락의 울창한 수목사이에 자리잡은 소악루와 탑산, 공암이 있다.
외편에 합벽된 이병연의 시는 다음과 같다.
계절의 맛이 무르익은 때, 발을 걷어 올리니 산 빛이 저물었구나
웃음을 지으며 한 점 별같은 불꽃을 보고 양천 밥을 배불리 먹는다.
소악후월(小岳候月) - 소악루에서 달을 기다리다.
소악루는 이유(1675~1753)가 1737년경 창건한 누각으로 현재 가양동 궁산 동쪽 기슭에 있었다.
왼쪽 하단에 소악루가 있고, 그 너머로 이유의 본채로 보이는 기와지붕들이 있다.
화면 우측변에는 탑산, 두미암, 선유봉을 차례로 배치시켰고,
원경에는 목멱산을 위시한 금성산, 와우산이 보름달을 맞이하고 있으며,
그 아래 육중한 바위절벽인 잠두봉(절두산)이 있다.
이 그림을 본 이병연은 다음과 같은 제화시를 남겼다.
파릉에 밝은 달 뜨면 이 난간 머리먼저 비친다. 두
보 시에 제구 없는 것, 끝내 소악루 뿐이라 해야겠다.
궁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한강과 올림픽대로
관산 성황사(關山 城隍祠)
성황사(城隍祠)
이 사당(祠堂)은 성황사 신(神)의 위패(位牌)를 모신 묘당(廟堂)이다.
성황사의 신은 여신(女神)으로 이곳 마을 사람들은 예부터 도당(都堂)할머니로 모시고 있다.
일찍이 조선시대 중종(中宗) 25년(서기 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 이르기를
성황사 재성산(城隍祠 在城山)이라 하였다.
성황사 신께서는 산 아래에 거주하는 민초(民草)들의 번영(繁榮)과 행복을 이루도록 도와주시고
여러 악귀(惡鬼)를 몰아내시고 재앙(災殃)과 돌림병을 막아주시니 산아래 사는 민초들은
이에 보답(報答)하고자 매년 음력 10월 초하루 날 제물(祭物)을 차려 산신제(山神祭)를 올리고 굿을 한다.
황진(黃瞋) 시(詩)
古峰斗絶類天成(고봉두절류천성) 옛 산봉우리 매우 험한 것은 저절로 된 것이고
漢水通潮一帶穔(한수통조일대황) 한강물이 밀물을 맞아서 띠를 띠웠더라
殘堞不存神像古(잔첩부존신상고) 산 위에 남아있던 성의 담장도 다 없어졌는데
村民歲歲寬報祭(촌민세세관보제) 신령님을 숭배하는 마음으로 옛사람을 본 따서 마을 사람들이 해마다 굿을 하더라
양천고성(陽川古城)
궁산(宮山) 정상에 자리한 양천 고성은 한강을 중심으로 각축을 벌이던 삼국시대부터 육로와 수로를 확보하기 위한 중요 군사 거점이었다.
백제는 서해에서 한강을 거슬러 오는 침입을 경계하고 북방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 요충지로 삼았다.
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은 이곳 양천산성에 진을 치고 전쟁의 판세를 가늠했으며,
행주산성으로 군대를 이동시킨뒤 행주대첩이라는 빛나는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곳 궁산의 양천산성은 오랜세월동안 행주산성, 오두산성과 더불어 한강 하구를 침입하는 적을 관측하고 방어하는 요충지로 기능하였다
궁산에서 본 한강과 마곡대교(공항철도)
서울 양천고성지 발굴조사
서울 양천고성지(陽川古城址) - 사적 제372호
서울 양천고성지는 조선시대 양천현의 주산인 궁산(宮山)에 있는 테뫼식 산성 터이다.
궁산은 한강변에 있는 해발 74m의 나지막한 봉우리이다.
궁산의 북쪽에 안양천이 흘러 한강과 만나고, 한강 건너편 북쪽에는 행주산성이 있다.
양천 고성은 궁산의 정상부에 있는 둘레 200m 정도의 평지를 둘러 만든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따르면 성벽의 길이는 218m이다. 돌로 기초를 만들고 그위에 흙을 쌓은 토석 혼축성으로 추정된다.
몇 차례의 지표조사에서 통일신라의 토기 조각과 기와조각이 많이 나왔고
강 건너에 있는 행주산성이 통일신라에 지어진 것으로 볼때, 양천 고성도 통일신라 때에 지어진 것을 보인다.
이 성은 행주산성, 파주의 오두산성 등과 함께 한강 어귀를 지키던 중요한 성이었다.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이 행주산성에서 대승을 거두기 전에 이성에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궁산공원둘레길
궁산공원둘레길은 1.63km로 파산,성산,관산,진산 등 다양한 명칭이 있으며,
소악루, 양천고성지, 양천향교 등의 주요시설이 있고,
자연생태가 다양한 탐방코스를 걸으며 숲속의 식물, 곤충, 동물 등 자연놀이도 즐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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