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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수서원 사료관(紹修書院 史料館)
    국내 나들이/사료관(史料館) 2019. 8. 10. 04:30

    소수서원 사료관(紹修書院 史料館)


    소수서원 사료관은 소수서원에 대한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고자 관련 자료를 정리하여 전시해 놓은 곳으로

    수서원의 역사와 전통 및 주요 배출인물, 그리고 강학과 제향을 주제로 다양한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서원은 강학과 제향기능을 가진 점에서는 관학(官學)과 차이가 없지만 제향의 대상이 공자와 그의 제자인 성현(聖賢)이 아닌

    우리나라 선현(先賢)이라는 점과 중앙정부가 아닌 유림이 그 설립주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지방의 향교, 중앙의 사부학당, 성균관으로 관학 중심이던 조선초기의 교육제도는

    중기를 지나면서 세조의 왕위 찬탈반대에 참여한 집현전 폐지와 연산군에 의한 성균관의 황폐화 등으로

    국가지원의 부족으로 관학은 점차 교육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처럼 관학이 교육기능을 상실하게 되면서 학덕을 겸비한 유학자들은

    개인적으로 서재(書齋), 정사(精舍) 등의 사학(私學)을 설립하여 학문을 보급하고 학문을 계승하였다.

    중종반정 후 중종은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정치를 표방하면서 성균관을 중수하는 등

    관학 중심으로 한 교학진흥책을 추진하였으나 효과를 얻지 못했고,

    이에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신진 사림세력이 의리명분을 바탕으로 하고 민심수습과 내적 인격도야를 추구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의 학문풍토를 추구하며 도학(道學)정치에 기초한 교학진흥책을 제시하였다.

    그 교학진흥책 중 하나가 바로 문묘종사(文廟從祀)운동이었다.

    이는 유림의 학문적 우월성과 정치적 입장을 강화해주는 측면과 함께 향촌민의 교화라는 명분으로 서원 발생의 토대를 제공하였다.

    이후 선조 때에 이르러 유림이 정치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서원은 본격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이와 같이 서원은 도학을 이상으로 삼던 사대부 사림세력들의 정신세계가 반영된 조선시대 유교사회의 대표적 산물이다.

     









    심원록(㝷院錄)


    소수서원을 방문한 인사들이 남긴 방명록



    소수서원 서책목록(紹修書院 書冊目錄)


    소수서원에 소장되어 있는 도서의 목록




    소수서원 임사록(紹修書院 任事錄)


    원장을 비롯한 원임들의 연대별 직임을 수록한 명부로

    1548년(선조 17)에 박승륜이 오래되어 낡은 기존 임사록을 다시 베껴 쓴 것이다.




    사마방목(司馬榜目)


    조선시대 과거급제자 명부로 소과에 합격한 진사, 생원의 이름, 나이, 본관, 주소 등이 기록되어 있다.




    거재절목(居齋節目)


    거재 시 유생들이 지켜야 할 규칙을 정한 것으로 입학자격이나 정원, 독서과목 등 구체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정읍례홀기(庭揖禮笏記)


    정읍례는 서원에서 스승과 제자가 서로 인사하고 배운 바를 점검하는 의식이며, 홀기는 의식의 진행 순서를 적은 기록이다.




    입원록(入院錄)


    서원 창건 이듬해인 1543년부터 1888년까지 약 350년간 4,000여명의 유생들을 배출한 명부로

    입원년도, 성명, 자, 생념, 출신지, 사마시급제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소수서원이 배출한 사람들의 문집과 연보




    주세붕(周世鵬)의 무릉잡고(武陵雜稿)


    소수서원을 창건한 주세붕의 문집으로 아들이 편집하였다가 전란으로 없어진 것을 1859년(철종 10) 후손들이 다시 편집하였다.





    한국 도학의 계보





    이황(李滉)의 상방백심통원서(上方伯沈通源書)




    죽계지(竹溪誌)


    백운동서원의 창건과 배향인물에 관한 기록을 수집하여 엮은 것으로 1544년(중종 39)주세붕이 편찬하였다.




    퇴계선생문집(退溪先生文集)


    조선 성리학 발달의 기초를 형성한 퇴계 이황의 문집으로

    조선 중기 사상사 연구, 특히 성리학의 이해 수준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회헌 안향 (晦軒 安珦, 1243~1306)


    처음 이름은 유(), 후에 향()으로 고쳤으며 회암 주희(晦庵 朱熹)를 흠모하여 스스로 호를 회헌(晦軒)이라 했고

    본관은 순흥이며 시호는 문성공(文成公)이다.

    안향선생은 소백산 정기를 받고 태어나 순흥이 배출한 위대한 인물이며

    우리나라에 중국 주자학(朱子學)을 최초로 보급하여 우리나라에 유교의 토대를 만들었다.

    16~18세 때에는 숙수사를 왕래하면서 독학으로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1260(원종1) 18세 되던 해 과거에 급제,

    개성에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64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도첨의 중찬(都僉議中贊) 등 요직을 두루 거친 명관(名官)이었다.

    1289(충렬왕 15) 11월에는 고려 유학제거(儒學提擧)가 되어 왕과 공주를 호위하며 원나라에 들어가 주자전서(朱子全書)와 공자,

    자의 화상(畵像)을 가지고 이듬해 3월에 돌아와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였다.

    이후 1303(충렬왕 29)에는 국학학정(國學學正) 김문정(金文鼎) 을 중국 강남에 보내어

    공자와 72제자의 화상, 문묘에 사용할 제기, 악기와 육경(六經), 제자(諸子) ,사서(四書), 주자서(朱子書) 등을 구해오게 하였다.

    13046월 국학의 대성전이 완성되자 거기에 공자를 비롯한 선성(先聖)들의 화상을 모시고 문묘의 제도를 갖추게 하였다.

    그는 오늘날의 육영재단에 해당하는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해 장학사업을 펼쳐 인재양성을 장려하고 성리학보급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한편 선생이 살던 고려후기는 불교의 폐해와 무인(武人)의 장기집권 및 몽고 침입과 홍건적 난 등 이민족의 잦은 침입으로 국운쇠퇴기였다.

    이러한 때에 안향 선생은 중국 원나라에서 주자학을 도입해 새로운 학풍으로 어지러운 통치기반을 안정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안향 선생의 이러한 노력으로 마침내 주자학을 수양(修養)과 치세(治世)의 원리로 삼은 성리 학자들 중심으로 되어

    훗날 조선을 개창하게 되고 조선이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으면서 민족의 스승으로, 동방 도학(道學)의 비조로 추앙받게 되었다.

    선생의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눌목리(訥木里) 구정동(口井洞)에 있다.한편 1917년에는 중국 공자의 77대손인

    공덕성(孔德成) 씨가 회헌 안향선생을 ' 안자(安子)' 로 높이 찬양하여 지은 찬문과 안자묘(安子廟) 편액친필글씨를 보내왔다.

    또한 공자의 76대손인 공영이(孔令貽)씨는 회헌 안향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어 보내왔다.

    공덕성씨와 공영이씨가 보내온 안자묘 편액친필글씨와 회헌 안향의 신도비명은

    1977년 경기도 시흥시 의왕읍에 안자묘 건립과 함께 그곳에 보존되고 있다.


    성인의 학문을 모아 집대성한 분은 공자이시고 (集群聖之大成者孔子也)

    현인의 학문을 모아 집대성한 분은 주자이시고  (集群賢之大成者朱子也)

    공자와 주자를 조종으로 삼아 동방성리학을 집대성한 분은 고려의 안자(安子: 안향 선생을 높여 칭한 말)이시다.

     (祖孔宗朱以啓東方之聖學者安子也)

    중국 공덕성씨가 안향선생을 찬양한 찬문 全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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