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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성지순례길, 홍성 홍주읍성 조양문과 홍주진영터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8. 12. 6. 04:30
홍성 홍주읍성 조양문과 홍주진영터
홍성 홍주읍성(洪城 洪州邑城) 조양문(朝陽門) - 사적 제231호
1972년 10월 14일 지정
조양문은 홍성 홍주읍성(洪城 洪州邑城)의 동문(東門)으로 1870년(고종 7) 홍주목사 한응필(韓應弼)이
홍주읍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할 때 세운 문루(門樓)이다.
홍주읍성의 동문은 조양문(朝陽門), 서문은 경의문(景義門), 북문은 망화문(望華門)이라 하는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친필로 하사 하였으며 남문은 문루가 없는 홍예문이었다.
남문은 2013년 12월 홍화문(洪化門)으로 명명된 문루를 새롭게 건립했다.
북문은 역대 목사(牧使)나 영장(營將)들이 문루에서 사형수의 처형을 감시하기도 했는데,
1894년 동학운동 때는 수백 명의 동학군이 여기에서 처형되었다.
1906년(광무 10) 항일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홍주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때의 흔적이 조양문 곳곳에 보인다.
일본인들에 의하여 서문과 북문은 파괴되어 없어지고 조양문 또한 파괴하려 하였으나 읍민들의 강경한 반대로 보존되었고,
1975년 문루를 해체 복원하여 옛모습을 찾게 되었다.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조양로 119번길5 (오관리)
백지사지(白紙死址)와 집단구타(集團毆打)장면
신앙증거터 (鎭營將의 동헌) - 홍주순교성지 -
홍주성지순례길 홍주진영(현 KT홍성빌딩자리)
이곳은 조선시대에 홍주 진영의 동헌(즉 경사당)이 자리잡고 있던 곳이다.
당시 진영을 관장하던 진영장(鎭營將, 정3품)은 군사권과 죄인을 잡는 토포사(討捕使)의 직임을 겸하고 있었다.
천주교 박해 후기에는 이곳에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끌려와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다리뼈는 부서졌으며, 갈기갈기 찢어진 살점들은 형리들에게 튀어 나갔고 부서진 등뼈는 가죽을 뚫고 밖으로 튀어나왔다고 한다.
이곳에서 장살(杖殺, 죽을 때까지 때리는 형벌), 집단구타와 백지사(白紙死, 창호지로 질식사)가 자행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곳은 가장 많은 고문과 박해로 가장 많은 피를 흘린 곳이다.
“배교한다는 한 마디만 하면 살려주겠다”는 유혹이 순교자들의 신앙을 위협하였으나,
복자 박취득(朴取得, 라우렌시오)은 “죽음을 당할지언정 제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인간은 하느님을 섬기는 존재라는 것을 증거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용덕은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후배 순교자들에게 이어졌다.
이처럼 이곳 진영 터는 순교 선조들의 신앙이 깊게 배어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이곳을 순례하는 이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순교자들의 용덕과 숭고한 신앙을 기리고,
이를 기억하여 후손들에게 전해야 하겠다.
홍주순교성지 순교 3터(증거터 홍주 진영)
홍주읍성을 지키는 군인이며 죄인들까지 다스렸던 진영장이 머물던 곳으로
4대문 중 가장 중심인 조양문 바로 앞쪽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 많은 고문과 박해가 있었으며 가장 많은 피를 흘린 순교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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