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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양 다락골성지(줄무덤성지)
    국내 나들이/천주교(天主敎) 2019. 5. 11. 22:26

    청양 다락골성지(줄무덤성지)


    충남 청양 서쪽과 보령의 경계인 대명산 골짜기에 위치한 이곳은 한국의 두번째 사제인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1821~1861)

    그의 부친 최경환 프란치스코(1805~1839) 성인이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낸 생가터(새터성지)가 있다.

    기해박해(1839) 시절, 프랑스 파리외방선교회 소속인 모방 나신부와 샤스탕 정 신부가

    이곳에서 마지막까지 숨어 지내다 당시 교구장이신 앵베르 범주교의 편지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죽는다"를 받고

    홍성 관아에 자수하여 순교를 받아들인 곳이다.

    병인박해(1866)시절, 포졸들의 급습에 붙잡혀 공주와 홍주지역에서 치명하신 교우들을

    이 곳 교우들과 친인척 가족들이 야밤에 몰래 훔쳐와 경주 최씨 화숙 공파 종친묘를 이곳에 줄줄이 매장한

    무명 순교자, 증거자들의 줄무덤(줄묘) 37기가 모셔져 있는 곳이다.


    성지와 청양 관련 순교자. 증거자를 살펴보면

    성인으로는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과 복자로는 이성례 마리아, 이도기 바오로, 김시우 알렉시오, 최봉한(여옥) 프란치스코,

    김화춘 야고보, 김대권 베드로, 최해성(양복) 요한, 가경자로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있다.

    그 외 최 브리짓다, 최신덕 바오로, 최대종 요셉, 임만억 야고보, 정화경 안드레아, 김풍헌 토마스, 이여삼 바오로, 박 마티아,

    황 바오로, 김 아비파노, 김 예로니모, 김 그레고리오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다수의 무명 순교자와 증거자들이 있다.


    다락골성지(줄무덤성지) 미사시간

    미사시간 : 매일 1130(월요일 제외)

    순례예약 : 041-943-8122

    성지사무실 : 041-943-8123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다락골길 78-6 (농암리) 다락골성지



    청양 다락골성지(줄무덤성지)


    칠갑산 굽잇길을 켜켜히 돌아 돌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 들어서면 다락골이라는 고즈넉한 시골마을이 나온다.

    충남의 알프스. 다락골 성지의 어원은 달을 안은 골짜기’이다.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의 아버지 최인주가 신해박해(1791)를 피해 자신의 고향땅인 새터에 정착하게 되었고,

    이 때부터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여 병인박해(1866)때까지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다락골 교우촌은 서울, 경기, 내포(충청도 북서부), 전라도 북부지역에 형성된 큰 신앙공동체의 중간에 위치하여

    서로를 잇는 다리역할을 하였다.

    이곳은 크게 새터 성지와 줄무덤 성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새터 성지는 길 위의 사제최양업 신부와 그의 부친인 성인 최경환 프란치스코가 탄생한 유서 깊은 교우촌 자리이다.

    줄무덤 성지는 불러줄 이름 하나 없는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이 줄지어 있는 곳이다.





    다락골의 본래 지명은 다래골(Tarai-kol)이다.

    간혹 다리골(Taricol)로 불리기도 했으나 교회 기록에는 줄곧 다래골로 표기되었다. 

    1944년 유영근 신부가 다락골을 답사한 글에서 다락골(樓洞)이란 말이 처음 나오고,

    해방 후에 쓰인 최상종의 「최 신부 이력서」에 다락골의 한자 표기인 누곡(樓谷)이 처음 등장한다.
    1964년 다락골을 답사하였을 때의 기록에 다래골과 다락골이 섞여 쓰이는 것을 보면

    해방 전후부터 지역주민들이 다래골을 다락골로 이해하여 사용한 듯하다.

    이곳에 성지가 조성되는 과정에서 이 명칭은 다락골로 고정되었다.    




    무명 순교자 십자가상


    죽음의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진 가운데서도 부활의 희망을 잃지 않고 있는 순교자의 미소를 잘 담아내고 있다.

    불러줄 이름 하나 없는 처절한 죽음이지만 하느님 안에서의 영원한 삶, 부활을 의미한다.









    무명 순교자상(죽음)




    무명 순교자상(부활)




    십자가의 길 시작기도

    예수님이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땅이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한없이 내어 주었던 넉넉한 땅…
    받아들이고 삭히며
    좋은 것을 내어 주던 땅이,
    쓰레기 더미에 눌려
    신음 하고 있습니다.
    받기만 하고 되돌려 줄줄 모르는 사람들,
    거대한 욕심의 항아리를
    채우다 지쳤습니다.
    풍요의 산실인 땅은,
    마침내 말라버린
    어머니의 젖가슴이 되었습니다





    제1처 예수님 사형선고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땅이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한없이 내어 주었던 넉넉한 땅…
    받아들이고 삭히며
    좋은 것을 내어 주던 땅이,
    쓰레기 더미에 눌려
    신음 하고 있습니다.
    받기만 하고 되돌려 줄줄 모르는 사람들,
    거대한 욕심의 항아리를
    채우다 지쳤습니다.
    풍요의 산실인 땅은,
    마침내 말라버린
    어머니의 젖가슴이 되었습니다.




    제2처 예수님 십자가 지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농사꾼들이 십자가를 졌습니다.
    힘 있고 배웠다는 자,
    떠나버린 황량한 고향집,
    쓰러져 가는 울타리…
    손발이 부르트고
    허리 휘어지도록 일을 해도,
    나아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휘몰아친 태풍에 자식처럼 키우터 곡식이
    맥없이 쓰러지고,
    물밑 듯이 밀려오는 수입 농산물에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가슴..
    그 누가 위로해 줄 수 있겠습니까?...




    제3처 예수님 기력이 떨어져 넘어지셨습니다.

    예수님이 넘어지셨습니다.
    산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다이너마이트,
    포크레인으로 파헤쳐진 산,
    곳곳의 골프장 건설로 상처투성이가 된
    산이 넘어지고 있습니다.
    불도저로 밀어젖혀 동강이 나버린 산,
    산짐승들이 살 곳을 잃고,
    올가미나 덫에 걸려
    피 흘리며 죽어 가는 거기에
    우리의 생명도
    죽어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제4처 예수님, 성모님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이 만나셨습니다.
    숲과 공기가 만나 울고 있습니다.
    그늘을 만들어 쉼 자리를 주고,
    청정한 공기를 만들어 주던 나무.
    곧게 하늘을 향해 자라나던
    나무의 허리는
    한 순간 예리한 톱날 아래 잘리어지고
    온간 광고를 실은 전단지가 되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게 주어진 한 장의 종이가
    나무의 속살이고,
    나무의 잘려버린 일생임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제5처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를 졌습니다.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를 졌습니다.
    환경연합, 시민단체, 농촌을 살리려 애쓰는
    사람들이 시몬처럼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를 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자리에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묵묵히 주어진 일을 행하는
    가난한 소시민들이
    예수님의 고통에
    함께 동참하고 있습니다.
    참된 생명의 길로 나아가기 위하여…




    제6처 성녀 베로니카 수건으로 예수님 얼굴을 닦아 드렸습니다.

    베로니카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렸습니다.
    우리가 외면해 버린 사람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지나쳐 버린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늙고 병들어 거추장스럽고,
    정박아라서 부끄럽고,,
    가진 것이 없어 거리로 내 몰린 사람들,
    그들과 함께 계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눈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그들의 눈에 눈물을 닦아주어야 할
    베로니카는 누구입니까?




    제7처 예수님 두 번째 넘어지셨습니다.

    예수님 두 번째 넘어지셨습니다.
    들녘이 죽어 갑니다.
    발에 돋은 질긴 생명 잡초 원망스러워,
    단 한번 뿌린 제초제에 누렇게 말라버린
    여린 풀들은
    한줌의 거름도 되지 못하고 죽어갑니다.
    메뚜기 뛰놀던 들녘은
    비료에 농약에 절여지고 있습니다.
    내 자식 먹을 것과 팔것을
    구분하여 농사짓는
    서글픈 현실은 누구의 작품입니까?




    제8처 예수님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예수님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원하지 않은 아이라는 이유로,
    내게 능력이 없어
    아이를 잘 키울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정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먼저 태어난 사람들의 판단에 의해
    무참하게 죽어간
    태아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 빛보지 못하고
    부모를 원망하며 죽어갔을 어린 핏덩이들.
    그들 목숨에 대한 책임은 누구의 몫입니까?
    그들의 영혼은 정녕 누구로부터
    위로 받을 수 있습니까?




    제9처 예수님 세 번째 넘어지셨습니다.

    예수님이 세 번째 넘어지셨습니다.
    강이 넘어졌습니다.
    아이들의 멱감는 소리,
    송사리 잡는 맑은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강..
    푸른 산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강은
    그 도도한 품위를 잃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골짜기마다 쳐 박혀 있던 쓰레기
    빗물에 떠 밀려 온 날
    송사리 은어 떼도
    허연 배를 드러내고 떠올랐습니다.
    시커먼 거품을 물고 강은 말합니다.
    이제 더 이상 사람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고..




    제10처 예수님, 옷 벗김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옷 벗김을 당하셨습니다.
    계곡이 상처를 입고 있습니다.
    산 그늘을 돌아 흐르던 맑은 물소리..
    나무가지를 흔들며 지나가던
    바람의 노랫소리
    산새소리 아우러져 그 아름답던
    계곡은 온갖소음이 난무합니다.
    러브호텔이 주인처럼 버티어 서 있고,
    먹고 버린 음식물이 썩어 가고 있습니다.
    계곡은 도시의 뒷골목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제11처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나무가 말라 버렸습니다.
    단풍이 들기 전에, 열매가 익기도 전에
    나뭇잎이 병들고, 열매가 떨어져 내립니다.
    찬 겨울 어렵게 싹을 튀우고 꽃을 피웠건만
    어디 한 순간도 얼굴 반반히 들고
    웃어 본 적이 있었던가?
    어느 한 철 푸르고 싱싱하게
    마음껏 잎을 펼쳐 본 적이 있었던가?
    숨이 막힐 정도의 팍팍한 매연,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매캐한 공장 연기,
    이제는 정말 숨이 막힙니다.
    단풍들기도 전에 열매가
    익기도 전에 무너져 내리는
    나무의 슬픈 몸짓을 우리는알고 있습니까?




    제12처 예수님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바다가 죽었습니다.
    붉은 산호초 숲이 사라지고,
    진주를 키우던 조개들이
    독을 품어 안게 되었습니다.
    왜? 누구 때문에입니까?
    핵 발전과 몰래 버린 양심의 오물,
    온갖 산업 폐기물은
    서서히 바다를
    죽음으로 몰고 갓습니다.
    햇빛이 비치지 않는 바다 속은
    죽음의
    캄캄한 어둠이 있을 뿐입니다.




    제13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렸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십자가에서 내려졌습니다.
    하늘이 내려 앉았습니다.
    소나기가 지난 뒤
    어김없이 무지개가 걸려 있던 하늘,
    총총 빛나던 별빛, 어둠을 가르던 반딧불,
    그 아름답던 하늘에 구멍이 뚫렸습니다.
    고드름을 깨물어 먹었는데…
    눈도 맞으면 안되고
    하늘에서 내리는 비도 산성비란다..
    우리는 알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 때문이라는 것을..




    제14처 예수님 십자가에 묻히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묻히셨습니다.
    인간 생명이 죽음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뱃속의 아이가
    제 꼴을 갖추기가 힘이 들고,
    아이를 잉태하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 늘어 갑니다.
    복제 양 돌리가 만들어졌고,
    복제 송아지 영롱이가 만들어졌습니다.
    유전자 조작 농산물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가짜가 진짜처럼 행세합니다.
    혼돈과 분열 속에 생명은 죽음을 향해
    두려운 줄 모르게 치닫고 있습니다. 

           




    병인박해 시절 무명 순교자들의 묘

    한 무덤에 여러 사람을 함께 묻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줄묘라고도 부른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천주교들을 탄압할 때 홍주감옥에서 순교한 교도들이 매장되어 있다.    

    총 37기가 있으며, 주로 가족 단위로 매장되어 있다. 주위에 없어진 10개의 인가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천주교 탄압 때 마을 전체가 화를 당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곳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1791년의 신해박해(辛亥迫害) 직후로 추정된다.

    최양업 신부의 증조부인 최한일(崔漢馹)이 내포의 사도라 불리던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죽고 곧이어 박해가 일어났다.    

    그러자, 증조모인 경주이씨(慶州李氏)가 외아들 최인주(崔仁柱, 최양업 신부의 조부)를 데리고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청양 지역에는 이미 그 이전에 복음이 전파되어 있었으므로,

    신해박해 때에는 홍주(洪州)의 박취득(朴取得, 라우렌티우스)과 원베드로, 청양의 황바오로 등이 체포되기도 하였다.

    최인주는 다락골에서 장성한 뒤 이곳으로부터 오른쪽으로 약 700m 되는 골짜기로 이주하였다.    

    그뒤 신자들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새로 이루어진 마을이라는 뜻에서 ‘새터[新垈]’로 명명되었다.    

    최양업 신부와 그의 아버지인 최경환(崔京煥, 프란체스코)은 바로 이곳에서 태어나

    1830년대 초에 경기 안양의 수리산(修理山)으로 이주하였다.    

    그뒤에도 다락골의 신자들은 여러 차례 박해를 피해오다가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와 1868년 무진박해(戊辰迫害) 때 체포되었거나 피신하였다.    

    현재 이곳의 뒷산에 있는 30여 기의 줄무덤은 이때 순교한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병인박해 때 홍주나 공주에서 순교한 신자들의 무덤이라는 설과

    해미나 보령(保寧) 갈매못에서 순교한 신자들의 무덤이라는 주장도 있다.    

    또 당시 최양업 신부의 집안에서 이 줄무덤을 만들었는데, 
    박해가 두려워 천주교 신자들의 무덤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던 중

    관아에서 이 사실을 알고는 마을을 불살라 신자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고도 한다.    

    그후 대전교구와 청양성당에서 이곳의 줄무덤을 조사하여 그중 14기가 순교자의 무덤인 것을 밝혀냈다.    

    1982년 이곳에 무명 순교자비를 건립하고 사적지로 조성하였다.

    내포지방에 대한 박해의 손길은 이곳 다락골도 예외는 아니었다.    

    포졸들이 포악하게 교우들을 잡아갈 때 어린 아이들이 무서워 울음을 터뜨리니

    엄마가 "얘야, 지금 죽어야 천당간다."라고 달래어 함께 천당으로 데리고 갔다 한다.

    그 당시에 감영은 홍주, 그러니까 지금의 홍성에 있었다.

    1866년 대원군에 의한 병인박해 때 순교한 치명자들의 묘소로 추정되는 37여기 묘가 이곳 다락골에서 줄무덤을 이루고 있다.

    이 묘들의 주인공들이 누구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홍주와 공주에서 순교한 교우들이라는 설과 해미나 갈매못에서 순교한 교우들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다만 최양업 집안에서 이들의 유해를 순교지로부터 야음을 타 급히 옮겨다가

    이 마을 뒷산인 이곳에 매장하였다는 증언을 이 마을 노인들이 전하였다. 

        최양업 신부님 집안들은 박해가 닥칠까봐 이 무덤이 신자들의 것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으나

    몇 년 뒤 이 사실을 안 조정에서 이 마을을 불살랐고, 교우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오기선 요셉 신부님은 당신의 회고록인 '곡예사 같은 인생'에서 줄무덤에 대하여 두가지 증언을 하고 계시다.

    하나는 1952년 당시 청양 사람들을 통해 조사한 내용인데 박해를 목격하였던 최영천 노인을 직접 만나 증언을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1964년에 오 신부님은 이곳을 현지 답사하여 순교자들의 집터와 줄무덤 17기를 확인하셨다.

    또 하나의 증언은 1920년대에 공주에 사시던 송 아오스딩 노인께서 "청양 고개너머에 숱한 치명자들의 묘가 있느니라."하시며

    공주 감옥 뒤 황새바위에서 250여명의 교우가 치명당하셨는데 그 시체를 밤중 암암철야에

    이곳 청양 산너머 외딴 비탈에 매장하느라 두 발가락이 다 문드러졌다고 오기선 신부님께서는 증언하신다.

    그러므로 이곳 줄무덤 안의 주인공들은 홍주 감영이나 공주 황새바위에서 순교한 분들이다. 

        청양 성당에서는 이곳에 무명순교자 묘비를 세우고 1982년 11월 23일 묘비 제막식을 가졌다. 

        1986년 2월 16일 줄무덤에서 150년 된 십자고상과 묵주 1점이 출토되었다.

    이로써 구전으로만 전해진 이곳 줄무덤이 순교자 1986년 3월 11일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성해 일부를 절두산 순교 기념관에서 모셔왔다.

    순교 후 147년 만에 고향에 환향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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