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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엔군초전기념관(UN軍初戰記念館) - 오산 죽미령
    국내 나들이/기념관(記念館) 2020. 1. 13. 19:30

    유엔군초전기념관(UN軍初戰記念館)


    유엔군 초전기념관은 6.25전쟁에 참가한 UN군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고,

    자유와 평화를 위한 상호 이해와 협력의식을 느끼며 체험할 수 있는 역사문화교육의 장소이다.

    1950625일 촉발된 3년여에 걸친 민족 상호간에 발생한 비극적인 전쟁은 우리에게 깊은 상처와 슬픔을 안겨 주었다.

    현재 기념관이 위치하고 있는 오산 죽미령은 195075UN군이 첫 전투(初戰)를 벌인 격전지로

    많은 젊은이들의 희생으로 우리나라의 자유와 평화를 지켜냈던 장소이다.

    이곳에 기념관을 건립함으로써 그들의 희생에 감사하며 역경과 고난을 딛고 발전한

    대한민국의 행보를 후세에 전승하여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대지 14.062건축연면적 9333층 규모로 2013423일에 개관하였으며,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13-2-64호로 관리하고 있다.


    경기도 오산시 경기대로 742 (외삼미동)





    유엔군기와 6.25 한국전쟁 때 우리나라를 도와 준 16개국 국기




    기념관 상징 부조


    1952년 6.25전쟁 중 미군이 참호에 있는 사진을 바탕으로 만든 부조이다.

    유엔군이 우리나라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참전했던 그 의미를 되새기고자 제작했다.




    유엔군 참전의 교훈


    6.25전쟁은 유엔헌장을 위반한 침략의 주범인 북한을 비롯한 공산국가에 대해

     다시는 지구상에서 이러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유엔의 강력한 의지가 담긴 응징차원의 전쟁이었다.

    대한민국이 오늘날 경제대국, IT강국, 문화대국으로 발돋움하며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6.25전쟁 때 유엔의 즉각적인 조치와 21개 자유 우방국의 헌신적인 지원,

    그리고 낯선 땅 위에서 자유 민주주의를 위해 산화한 4만여 명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유엔이 항구적인 평화를 구현할 수 있는 국제 평화기구로서의 권위를 드높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고,

    아울러 유엔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아 기사회생한 대한민국도 자유 민주주위 국가의 일원으로서

    계속 남아 국제 평화에 기여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1차 결의문(1950. 6. 25)


    북한군이 남한을 무력 침공한 것을 평화를 파괴한 것으로 단정하고 즉각 38선 이북으로 철수할 것을 권고한 유엔의 결의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2차 결의문(1950. 6. 27.)


    유엔 회원국들에게 한국장부를 지원히고 북한의 무력 침공을 격퇴하여

    국제평화와 안전을 보장할 수 있도록 회원국들이 필요한 지원을 결정하는 결의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3차 결의문(1950. 7. 7.)


    한국을 지원하기 위해 유엔군 통합사령부의 창설과 운영을 결의한 문서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보낸 병력요청 편지




    김종태의 6.25전쟁일기 (1950)


    6.25전쟁 발발 당시 19세였던 김종태의 18쪽 자필 일기이다.

    일기에는 피난길 속에서 자신이 직접 본 참상과 고통이 적혀있으며,

    당시 사람들이 처음 접한 서양인(유엔군)에 대해 어떠한 인상을 받았는지 살필 수 있다.




    철수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죽어도 여기서 죽고 살아도 여기서 산다.









    6.25전쟁 당시 남북한 군사역 비교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원, 그들을 기억합니다.


    죽미령전투 참전용사 스미스부대 540명의 명판이 있는 추모공간이다.





    죽미령전투의 의의

    유엔군과 북한군의 첫 전투


    오산 죽미령에서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미 지상군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와 북한군은 첫 전투를 벌였다.

    북한군은 미군이 참전하지 않거나 적어도 개입하기 전에 전쟁을 끝낸다는 계획하에 남침을 감행하였는데,

    남침 개시 10여 일만에 미 지상군의 참전을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죽미령전투로 북한군은 전력을 재정비해야 했으며, 미군은 북한군의 전력을 새롭게 평가하게 되었다.

    6시간 15분의 죽미령전투는 미군의 초기 개입으로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반격을 시도하는 시간을 벌 수 있게 된 의미 있는 전투였다.




    잊지 못할 그들에게 메시지를 전해 보세요.





    유엔군 초전 기념비 (UN軍 初戰 記念碑)

     

    유엔군 초전 기념비는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UN군이 참전하여 오산 죽미령에서 최초로 북한과 접전하게 되었다.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국방부가 주관이 되어 1982년 4월 이 비를 세웠다.

    이 초전비는 최초 3개 진지를 구축하여 전투한 상황을

    상징하기 위해 3개의 비신(碑身)을 세웠고 동상은

    유엔군의 치열한 전투상황을 묘사하기 위한 모형으로 건립하였다.

    한국전쟁시 우리 국군이 한강선에서 격전중일 때 유엔은

    대한민국을 돕기 위한 결의와 더불어 자유우방들에게 파병을 권고하였다.

    이에 따라 유엔지상군의 특수임무부대가 긴급 편성되어 최초로 한국에 도착되었고

    그 편성은 미 제24사단 예하 제21연대 제1대대 (대대장 제임스 B. 스미스중령)의 B.C.중대와

    제52포병대대 A포대 장병 도합 540명으로 편성되었다.

    스미스 중령이 지휘하는 특수임무부대가 부산으로부터 북상하여

    1950년 7월 5일 죽미령 고개에서 배치하고 있던 중

    전차 33대를 앞세운 북한군 제4사단 5연대를 맞아 최초의 전투를 벌였던 것이다.

    이날 아침부터 6시간 15분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적살상 127명, 적전차 파괴 등의 전과를 올린 반면,

    180여명의 피해와 중화기를 모두 잃고 철수함으로써 패전의 한 장을 남긴 채 막을 내렸다.

    따라서 이곳에서 산화한 장병의 넋을 위로하고 초전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비를 건립하게 된 것이다.




    신 유엔군초전기념비 -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6.25전쟁 딩시 유엔군과 벌인 최초의 전투에서 전사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원진 기념비이다.

    초전비는 북한군에 맞서 유엔군이 방어한 최초의 성벽임을 나타내는 세 겹의 높은 탑신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중앙에 스니스 부대우너의 전투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매년 7월 5일을 기하여 죽미령 전투의 의의를 기리고 전몰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추념식이 거행된다.





    죽미령 전투(竹美嶺 戰鬪)

    이 곳 죽미령은 6.25 전쟁에서 유엔군과 북한군이 처음으로 전쟁을 벌인 격전지이다.

    195075, 오산 죽미령에 도착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좌측 능선에 B중대를,

    우측 고지에 C중대를 배치하고, 105mm 포대를 후방 수청리에 포진시켰다.

    오전 7시 북한군 T-34전차의 남진을 발견한 스미스 부대는 816분 첫 사격을 시작으로 전투를 시작하였다.

    치열한 접전으로 북한군의 전차 33대 중 6대가 파괴되었으며, 127명을 사상하였다.

    스미스 부대 역시 참전한 540명 중 보병 150, 포병 31명이 사상되었다.

    오후 230분 스미스부대의 퇴로가 차단되고 방어선이 붕괴되면서 퇴각하게 된다.

    이 전투는 승패와 상관없이 6.25전쟁에서 유엔군의 참전을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유엔기를 앞세우고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집단적 행동을 펼친 중대한 역사적 가치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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